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서병희(徐炳熙) 의진의 차지(次知)로서 경남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서병희는 경남 양산 사람으로 한약방을 경영하다가 일제에 의해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당한 직후인 1907년 음력 11월 허 위(許蔿) 의진에 참여하여 임진·한탄강 유역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서병희는 허 위 의병장으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병하라는 지시를 받고, 1907년 음력 12월 28일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윤정의(尹政儀) 의진과 제휴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서병희 의진은 1908년 2월 9일 윤정의 의진과 연합하여 경남 울산(蔚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였고, 또 3월 3일에는 경북 경주(慶州)군 산내(山內)면에서 일본군 경주수비대와 교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윤정의 의진과 결별한 서병희 의진은 향리인 경남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양산군 하서(下西)·하북(下北)면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8일 경남 산청(山淸)으로 옮겨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동의(朴東儀) 의진과 합진한 뒤, 이학로(李學魯)와 함께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2월 소모장 이성로(李聖老), 도포장 이춘실(李春實), 파수장 이국선(李局善), 연습장 김재익(金在益), 일초십장(一哨什長) 이치석(李致石), 이초십장 최덕수(崔德守), 삼초십장 정한수(鄭漢秀), 차지 김성렬 등으로 의진을 재편성한 서병희 의진은 이후 경남 전역을 전전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성렬은 이같은 서병희 의진의 차지로서 서병희 의병장의 지휘 아래, 1909년 6월 20일 칠원(漆原)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한편 군자금 800냥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경남 창원(昌原)군 양전(良田)면 호라리(虎羅里)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으며, 9월에는 군(郡) 재무주사 1명을 처단하였다. 특히 같은 해 11월에는 의령(宜寧)·고성(固城) 등지에서 군자금 200원을 수합하는 한편 일본인 상인들을 처단하다가 의령군 신반(新反)시장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610·61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07 10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