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의병으로 경북 선산(善山)·개령(開寧)·금산(金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륵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활동·종교활동·교육활동·학술활동 등을 통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김복출은 이같은 시기인 1906년 음력 5월 21일 경북 금산군 김천(金泉)시장에서 박일대(朴一大)·임천쇠(林千釗)·윤말용(尹末用)·이흑보(李黑甫)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각기 총칼을 휴대하고 경북 개령군 한곡(漢谷)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중순 김복출을 비롯한 상기인들은 총칼로 무장하고 개령군 용전(龍田)에서, 6월 26일에는 개령군 신평동에서, 6월 29일에는 금산군 진목곡(眞木谷)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후 김복출 일행은 충청도에서 활빈당 활동을 통하여 대일 투쟁을 하다가 의병으로 변신한 마중군(馬中軍) 의진과 같은 해 7월 초 개령군 모강수리(暮江藪里)에서 만나 양총과 환도를 휴대하고 금산군과 개령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이어 일행의 의병활동을 밀고한 친일 주구배의 집을 소각하였다. 한편 김복출 일행은 1907년 음력 2월 16일에도 개령군 구리령(鉤里嶺)에서, 또한 2월 21일 밤에는 선산군 건흥동(建興洞)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어 같은 해 3월 초 개령군 마곡령(馬谷嶺)에서 군자금을 모금한 뒤, 3월 6일 선산군 구미시장에 육혈포 탈환을 사기 위해 갔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1907년 5월 4일 평리원(平理院)에서 교수형을 받고,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420∼42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