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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權重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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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2016 훈격 애국장
1908년 (陰) 1월 경기도(京畿道)에서 전복규 의진(田福奎義陣)에 참여한 후 동지(同地) 연천군(漣川郡), 마전군(麻田郡) 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동년(同年) (陰) 2월 하순 전복규(田福奎)와 함께 한창렬 의진(韓昌烈義陣)에 참여하여 파주군(坡州郡), 교하군(交河郡)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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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08년 음력 1월 경기도에서 전복규의진(田福奎義陣)에 참여하여 연천군(漣川郡)과 마전군(麻田郡) 등지에서 활동하고, 같은 해 음력 2월 하순 한창렬의진(韓昌烈義陣)에 참여하여 파주군(坡州郡)ㆍ교하군(交河郡)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출신의 한창렬은 1908년 음력 2월 박종한의진(朴宗漢義陣)의 중군장(中軍將)으로 경기도 고양군(高陽郡)ㆍ파주군ㆍ장단군 등지에서 활동하고, 일병(日兵)과 교전 중 박종한 의병장이 부상을 당하자 전복규(田福奎)ㆍ권중삼(權重三) 등과 합세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그리고 부하 수십 명과 함께 1908년 2월 하순 파주군과 교동군(交洞郡)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권중삼은 1908년 음력 1월 하순 전복규의진에 들어가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연천군ㆍ마전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전복규와 함께 한창렬의진에 합류하여 같은 해 음력 2월 하순 파주군 대원리(大院里), 교하군 쇠현동(釗峴洞)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이른바 내란죄(內亂罪)로 징역 5년을 받고 상고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 대심원(大審院)에서 원판결 취소로 경성공소원으로 환송되었다. 1909년 11월 13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을 받았다. 1912년 9월 15일 은사(恩赦)에 관한 조서(詔書)에 의해 징역 5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控訴院 : 1908. 9. 22)
  • 判決文(大審院 : 1908. 10. 19)
  • 判決文(京城控訴院 : 1908. 11. 13)
  • 刑事控訴事件簿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19~2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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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중삼 - 경기 적성(積誠) -
본문
1881년 경기도 적성군(積城郡) 자장리(紫庄里)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高宗)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내정간섭을 공식화하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여 한국의 독립 의지를 말살하였다. 이로 인해 해산 군인과 의병이 힘을 합하여 촉발된 정미의병 시기에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08년 2월 당시 28세의 나이로 전복규(田福奎)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고향과 인접한 경기 연천(漣川)과 마전(麻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복규는 연천의 유생 출신으로 경기 일대의 연합 의병부대를 호령하던 김수민(金秀民) 의병부대의 좌익장(左翼將) 출신이다. 이후 경기 연합 의병부대의 수장인 김수민이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하고 적정을 살피다가 사로잡힌 후 경기 연합 의병부대의 세력은 약화하였다. 이때 전복규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는 유격전을 감행하며 의병 활동을 이어나갔다. 1908년 2월 전복규는 100여 명의 부대원을 거느리고 연천과 마전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때 전복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인 하는 사실을 통해 전투에 참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복규 의병부대는 이 무렵 경기 마전의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대담한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1908년 3월경 교하(交河) 쇠현동(釗峴洞) 동민에게서 120원에 상당하는 군자금을 거두었다. 이때 장단과 교하에서 활동하던 한창렬(韓昌烈) 의병부대의 의병장 한창렬과 부대원 최춘식(崔春植), 이용현(李容鉉)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던 중이었다. 당시 의병은 소규모 부대로 흩어졌다 필요할 때 의병부대별로 연합하여 전투를 계획하거나 군자금 모금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때 한창렬은 박종환(朴宗煥) 의병부대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일본 헌병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박종환이 부상당하자 흩어진 부대원을 규합하던 중이었다. 전복규 의병부대는 한창렬 의병부대 등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교전하기 위해 연천과 파주(坡州), 교하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8년 3월 말에 모금한 군자금은 약 1,000원에 이를 정도였고 세력도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복규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1908년 10월까지 지속해서 일본군 헌병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 과정에서 그 활동이 드러나 전복규, 한창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22일 한창렬, 최춘식, 이용현 등과 함께 경성공소원에서 재판을 받고 이른바 ‘내란죄’와 ‘강도죄’를 적용받아 징역 5년 형에 처해졌다. 한창렬이 교수형, 최춘식이 15년, 이용현이 10년 형을 선고받은 것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었다. 그러나 이에 항의, 상고하였는데 11월 13일 경성공소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이용현과 함께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1912년 9월 15일 은사(恩赦)에 관한 조서(詔書)에 의해 징역 5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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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징역 5년 경성공소원 1908-09-2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강도 원판결을 격소하고 다시 심문 및 판결하여 경성공소원에 환송함 대심원 1908-10-1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내란 징역 15년 경성공소원 1908-11-13 국가기록원
4 판결문 - 상고 기각 - 1908-12-05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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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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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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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형물 항일독립운동기념비 경기도 파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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