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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5월 2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강내면(江內面) 연정리(蓮亭里)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1900년대 초반 충남 천안군(天安郡) 동면(東面, 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龍頭里)로 이주하였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지역에서 유림(儒林)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천안과 공주(公州) 일대를 순회 전도하던 미국 감리교회(監理敎會) 선교사 케이블(E. M. Cable)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후 용두리 감리교회의 속장으로 활동하였다. 아들은 독립운동가로서 광복 후 미군정청 경무부장(警務部長)과 이승만(李承晩) 정권에서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 등을 역임하고,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했던 조병옥(趙炳玉)이다. 1919년 4월 1일 유관순(柳寬順)의 부친 유중권(柳重權)·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伯夏) 등과 함께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竝川里) 아우내장터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는 장날 인근 지역 주민들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참여하여 대규모로 전개되었고, 일제 군경의 발포로 19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천안의 남부 지역에서 준비된 2개의 거사 계획이 하나로 합쳐져 전개되었다.
만세시위 준비는 3월 13일 서울에서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귀향한 유관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월 16일 유중권·유중무(柳重武)·김구응·이백하 등 20여 명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유관순으로부터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상황을 상세하게 들었다. 그리고 유관순이 갈전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자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찬성한 후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과 논의를 통해 아우내장터의 장날인 4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인근 지역까지 만세시위 참여를 위한 연락망을 조직하였다. 또한 유관순 등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매일 밤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도록 하였다.
한편 천안군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 지역에서는 홍일선(洪鎰善)·이순구(李旬求)·김교선(金敎善) 등을 중심으로 3월 29일부터 만세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김교선은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고 돌아온 이순구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홍일선으로부터 만세시위 제의를 받자 즉시 찬성한 후 4월 1일 아우내장터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교선은 3월 29일경 이순구·박영학(朴永學)·한동규(韓東圭)·이백하 등을 찾아가 만세시위에 대한 동의를 얻고, 김상훈(金相勳)을 찾아가 만세시위를 제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병천에서도 거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고, 이후 2개의 만세시위 계획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3월 31일 밤에는 다음날의 만세시위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임을 각 지역에 알리는 신호로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 산마루, 충북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서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 아침 유중권·유중무·김구응·이백하 등과 함께 아우내장터로 이동하였고, 오후 1시경 장터의 한복판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곧이어 유중권·유중무·김구응·이백하 등이 호응하여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많은 주민들이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중권·김교선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장터 일대를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열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병천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등 5명의 일제 헌병이 곧바로 출동해 시위대의 강제해산을 명령하였다. 시위대가 해산에 불응하자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칼을 휘둘러 김상헌(金相憲)이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한 다수의 시위대가 일제 헌병들을 쫓아가 주재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제 헌병을 구타하였다. 이처럼 만세시위가 격앙되자 앞으로 나가 비폭력 만세시위의 의미를 강조하여 시위대를 자제시켰다. 하지만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계속 총검을 휘두르며 무력진압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이 사망하고 유관순도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유중권의 시신을 업은 유중무와 조카 조병호(趙炳鎬) 등이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들어가 고야마 소장과 헌병 상등병 미나토야 시즈카(湊谷靜) 등에게 일제 헌병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김상철(金相喆) 등은 100여 명을 규합해 주재소로 쳐들어가 유치장 벽을 부수고 구금된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분노한 주민들이 계속 주재소로 모이면서 3,000여 명으로 증가한 이들과 함께 일제 헌병들에게 대항하며 주재소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오후 4시경 천안에서 지원병력으로 급파된 철도엄호대원 6명이 아우내장터에 도착하였다. 고우(甲) 대위가 지휘한 철도엄호대 병력은 헌병대와 합세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며 강제 해산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천안헌병대로 연행되었고,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면서 다시 징역 3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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