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895년 여름 제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콜레라 퇴치에 진력하였고,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언더우드(H. G. Underwood) 등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호위하였다.
1899년 3월 휴가차 미국을 방문하였다. 1900년 봄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로부터 1만달러의 기부금을 기부받아 내한하였다. 1904년 11월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하고 원장을 맡았다. 1906년 세브란스 병원 내에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제중원의학교 교육도 계속하였다. 1908년 6월 첫 졸업생 김필순을 비롯한 7명을 배출하였다. 8월 일제가 구한국군을 해산하였다. 구한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일어나자 부상당한 한국인 병사들을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해 주게 하였다. 1909년 제중원의학교를 세브란스의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7년 5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아 교장을 겸했다. 1916년 10월 언더우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았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13일 전보로 귀국 중이던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을 다시 서울로 불러들였다. 16~17일에 열린 선교사 대책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한국 상황을 해외에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3월 9일 내무부장관 우사미(宇佐美勝夫)를 비롯한 총독부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열린 수차례 회합에 선교사 대표로 참여하여 총독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한국인에게 자유와 자치를 허용하도록 요구하였다. 특히 3월 9일 회합에서 한국인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평 사항으로 “1. 두 민족 간의 독특한 민족적인 다른 점에 대한 충분한 배려, 2. 한국어 교육의 특권, 3. 언론의 자유, 4. 출판의 자유, 5. 공공 집회의 자유, 6. 여행의 자유, 7. 사회 정화(일본 정부가 매춘 조직을 한국인을 상대로 강제하고 있으며, 한국인은 이에 대하여 자구책이 없음), 8. 한국인 차별 철폐” 등을 열거하면서 한국인들이 이런 것들 중 어느 것이라도 요구하면 감옥에 가야하고 범죄인처럼 취급을 받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사미에게 한국인들의 이러한 청원을 허용할 것인지 물었다.
또한 3.1운동의 부상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치료하게 하였으며, 일본 헌병 경찰의 가택 수색과 환자 이송에 저항하고 항의하였다. 5월 26일 3.1운동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양한묵(梁漢黙)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여 그 시신이 유족에게 인도되자, 그의 집을 방문하여 시신을 다시 검안하고 유족들을 위문하였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교장에 추대되었다. 선교사에서 은퇴하여 1935년 12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귀환해서도 한국인들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2~1943년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재무를 맡았으며, 열강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 1956년 8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96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5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Interview with Mr. Usami and Mr. Heda[Hishida], Seoul, March 9, 1919
- Report of First Session of Unofficial Conference, Chosen Hotel, March 22nd, 1919
- Report of Second Session of Unofficial Conference, Chosen Hotel, March 24th, 1919
- Report of Meeting with Mr. Sekiya on the afternoon of Saturday, March 29 and the evening of Sunday, March 30, 1919
- Commission on Relation with the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The Korean Situation. New York: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1919
- Commission on Relation with the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The Korean Situation 2. ibid, 1920.
- The Washington Post, 1942년 11월 7, 8일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11) 41권 225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7) 19권 179~189, 329~332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7) 20권 2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