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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5월 9일 중국 쓰촨성(四川省) 화양현(華陽縣)에서 태어났다. 자는 웨쥔(岳軍)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신규식(申圭植) 등의 독립운동을 다각도로 후원하였다. 1930년대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 및 국민당 중앙위원으로 재임하면서도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을 무렵 쓰촨성(泗川省) 주석 겸 청두행원(成都行轅) 주임을 맡았는데, 중국 국민당정부 포로수용소 내 한적(韓籍) 사병에 대한 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임시정부에 적극 협력하였다.
1906년 바오딩전국육군속성학당(保定全國陸軍速成學堂)에 입학하였다. 1908년 일본 도쿄진무학교(東京振武学校)에 입학하여 장제스(蔣介石)와 동학(同學)이 되었다. 1908년 도쿄에서 쑨원(孫文)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와서 천치메이(陳其美)가 지도한 상하이(上海) 해방을 위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상하이 기의(起義)가 성공한 후 후군도독부(滬軍都督府)가 성립되자 군무처(軍務處) 군계과장(軍械科長)이 되었고, 이어 제23사(第二十三師)의 참모가 되었다. 1912년 영장(營長)이 되고, 장제스·황푸(黄郛) 등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국민당을 탄압하고 국민당 인사를 살해하자, 이에 반대하는 제2차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4년 일본 사관학교에 재차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1915년 중국으로 돌아와 저장성(浙江省) 독서(督署) 참모가 되었다. 1917년 광저우(廣州)에서 호법(護法)운동에 참가하여 쑨원 대원수부(大元帥府) 참군(參軍)이 되었다. 1924년 국민혁명군 제2군에 들어가서 허난성(河南省) 경무처(警務處) 처장 겸 허난성 성회(省會) 카이펑시(開封市) 원경청(員警廳) 청장이 되었다. 1926년 북벌전쟁 중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총참의(總參議) 겸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27년 10월 장제스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다.
1928년 국민정부 군정부(軍政部) 정무차장(政務次長) 겸 병공서(兵工署) 서장을 지냈고, 퉁지대학교(同濟大學校) 총장도 겸하였다. 1929년 3월 국민당 제3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4월 상하이 특별시장이 되어 1932년까지 재직하였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성립된 신중국건설학회(新中國建設學會)의 주요인물로서 장제스 정권의 실력 증강을 도왔다. 1932년 상하이시 시장에서 물러나 허난(河南)·후베이(湖北)·안후이(安徽) 3성(三省) 공산당근거지를 소탕하는 총사령부 당정위원 겸 정무지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베이핑(北平) 정무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3년 7월 후베이성(湖北省) 정부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12월 국민정부 외교부장관이 되어 1937년 3월까지 재직하면서 대 일본 교섭을 담당하였다. 1937년 2월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겸 외교전문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일본과의 교섭을 이어갔다. 그해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되었다. 11월 상하이가 함락되자 중화민국 대표로서 주중 독일대사의 중재로 일본과 교섭을 강화해 나갔으나, 일제가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한 후 담판이 결렬되었다. 1937년 겨울 국민정부가 충칭으로 천도한 후 행정원 부원장이 되었고, 국민정신총동원회 비서장을 맡았다. 1938년 국방최고위원회 충칭 행영(行營)주임이 되어 항일전쟁 중 장제스 곁에서 전시 전략을 세웠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쓰촨성 주석 겸 청두행원 주임을 맡아 항전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힘썼다. 6년여 간 쓰촨성 주석으로 있으면서 항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 1945년 8월 29일부터 10월 10일까지 개최된 충칭(重慶) 국공회담에 국민정부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의 투항을 촉구하였다.
1946년 1월 국공내전을 방지하기 위한 충칭 정전협정에 국민정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7년 4월부터 1948년 5월까지 행정원 원장을 지냈다. 1948년 총통부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제1기 국민대회 대표가 되었다. 1949년 2월 충칭 수정공서(綏靖公署) 주임이 되었다가 수정공서가 폐지되자 다시 서남군정장관(西南軍政長官)에 임명되었다. 1950년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中央改造委員會) 위원이 되었다. 1951년 행정원설계위원회(行政院設計委員會) 위원이 되었다. 1952년 중일문화경제협회(中日文化經濟協會)를 창설하여 일본과 협력하며 대일본 외교 정책을 주도하였다. 1954년 5월 총통부 비서장이 되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중일관계와 미국(中日關係與美國)』, 『중일관계 비밀기록(中日關係密錄)』, 『나와 일본, 70년 세월(我與日本七十年)』, 『수양에 관하여(談修養)』 등의 저서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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