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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24
성명
한자 張群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중국(中國) 국민정부(國民政府) 외교부장(外交部長)국민당(國民黨) 중앙위원(中央委員)으로 재임하면서 신규식(申圭植) 선생 등의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을 다각도로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중경(重慶)으로 이동하여 환국할 때까지 변함없는 후원을 계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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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장췬(張群)은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에 따른 한국인 탄압과 관련하여 일본 당국과 협의를 진행하였다. 1935년 일본군과 일제 만주국군이 치하얼성(察哈而省)의 구위안(沽源)과 두스커우(獨石口) 일대로 침공했을 때, 일본 측과 여덟 차례에 걸친 대일 회담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일본은 침공 이유를 중국 측의 대일친선 우호정책의 결여라는 지극히 억지스러운 명분을 제기하였다. 일본이 침략행위 직후 중국 측에 내세운 요구사항은 1. 일본 비행기의 항행 자유, 2. 관세 인하, 3. 한국인의 비법(非法) 행동 단속, 4. 일본인 고문의 채용, 5. 배일(排日) 언동의 단속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배경으로 추후 중국이 이른바 배일주의 단속을 어떻게 시행하는 가를 주시하겠다면서 협의를 일단락 지었다. 장췬은 이 과정에서 불거진 일본 당국의 항일 한국인 문제를 원론적인 수준에서 동의했지만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를 지속하였다.

또한 일본군으로 동원되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 청년들의 업무도 맡았다. 1945년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에서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적(韓籍) 포로 활용에 관해 각 지역의 행영(行營) 주임과 전구 사령장관에게 전문을 하달했다. 이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각 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적 포로에게 공작을 맡길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사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촉할 것을 청”하고, “포로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적 인원에게 공작을 맡길 필요가 있을 때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통지”토록 되어 있었다. 당시 청두(成都) 겸 쓰촨성(四川省) 정부 주석을 맡으면서 위와 관련된 업무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장췬의 활약은 중국 내 한국인들의 항일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 항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삼천리(三千里)(삼천리사, 1938. 5. 1) 제10권 제5호 156~157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11) 제10권 192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11) 제40권 49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장췬(장군) 자 : 웨쥔(岳軍) 중국 쓰촨성(四川省) 화양(華陽) -
본문
1889년 5월 9일 중국 쓰촨성(四川省) 화양현(華陽縣)에서 태어났다. 자는 웨쥔(岳軍)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신규식(申圭植) 등의 독립운동을 다각도로 후원하였다. 1930년대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 및 국민당 중앙위원으로 재임하면서도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을 무렵 쓰촨성(泗川省) 주석 겸 청두행원(成都行轅) 주임을 맡았는데, 중국 국민당정부 포로수용소 내 한적(韓籍) 사병에 대한 처리 문제와 관련하여 임시정부에 적극 협력하였다. 1906년 바오딩전국육군속성학당(保定全國陸軍速成學堂)에 입학하였다. 1908년 일본 도쿄진무학교(東京振武学校)에 입학하여 장제스(蔣介石)와 동학(同學)이 되었다. 1908년 도쿄에서 쑨원(孫文)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였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와서 천치메이(陳其美)가 지도한 상하이(上海) 해방을 위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상하이 기의(起義)가 성공한 후 후군도독부(滬軍都督府)가 성립되자 군무처(軍務處) 군계과장(軍械科長)이 되었고, 이어 제23사(第二十三師)의 참모가 되었다. 1912년 영장(營長)이 되고, 장제스·황푸(黄郛) 등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국민당을 탄압하고 국민당 인사를 살해하자, 이에 반대하는 제2차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4년 일본 사관학교에 재차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1915년 중국으로 돌아와 저장성(浙江省) 독서(督署) 참모가 되었다. 1917년 광저우(廣州)에서 호법(護法)운동에 참가하여 쑨원 대원수부(大元帥府) 참군(參軍)이 되었다. 1924년 국민혁명군 제2군에 들어가서 허난성(河南省) 경무처(警務處) 처장 겸 허난성 성회(省會) 카이펑시(開封市) 원경청(員警廳) 청장이 되었다. 1926년 북벌전쟁 중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총참의(總參議) 겸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27년 10월 장제스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다. 1928년 국민정부 군정부(軍政部) 정무차장(政務次長) 겸 병공서(兵工署) 서장을 지냈고, 퉁지대학교(同濟大學校) 총장도 겸하였다. 1929년 3월 국민당 제3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4월 상하이 특별시장이 되어 1932년까지 재직하였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성립된 신중국건설학회(新中國建設學會)의 주요인물로서 장제스 정권의 실력 증강을 도왔다. 1932년 상하이시 시장에서 물러나 허난(河南)·후베이(湖北)·안후이(安徽) 3성(三省) 공산당근거지를 소탕하는 총사령부 당정위원 겸 정무지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베이핑(北平) 정무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3년 7월 후베이성(湖北省) 정부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12월 국민정부 외교부장관이 되어 1937년 3월까지 재직하면서 대 일본 교섭을 담당하였다. 1937년 2월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겸 외교전문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일본과의 교섭을 이어갔다. 그해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되었다. 11월 상하이가 함락되자 중화민국 대표로서 주중 독일대사의 중재로 일본과 교섭을 강화해 나갔으나, 일제가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한 후 담판이 결렬되었다. 1937년 겨울 국민정부가 충칭으로 천도한 후 행정원 부원장이 되었고, 국민정신총동원회 비서장을 맡았다. 1938년 국방최고위원회 충칭 행영(行營)주임이 되어 항일전쟁 중 장제스 곁에서 전시 전략을 세웠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쓰촨성 주석 겸 청두행원 주임을 맡아 항전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힘썼다. 6년여 간 쓰촨성 주석으로 있으면서 항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 1945년 8월 29일부터 10월 10일까지 개최된 충칭(重慶) 국공회담에 국민정부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의 투항을 촉구하였다. 1946년 1월 국공내전을 방지하기 위한 충칭 정전협정에 국민정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7년 4월부터 1948년 5월까지 행정원 원장을 지냈다. 1948년 총통부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제1기 국민대회 대표가 되었다. 1949년 2월 충칭 수정공서(綏靖公署) 주임이 되었다가 수정공서가 폐지되자 다시 서남군정장관(西南軍政長官)에 임명되었다. 1950년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中央改造委員會) 위원이 되었다. 1951년 행정원설계위원회(行政院設計委員會) 위원이 되었다. 1952년 중일문화경제협회(中日文化經濟協會)를 창설하여 일본과 협력하며 대일본 외교 정책을 주도하였다. 1954년 5월 총통부 비서장이 되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중일관계와 미국(中日關係與美國)』, 『중일관계 비밀기록(中日關係密錄)』, 『나와 일본, 70년 세월(我與日本七十年)』, 『수양에 관하여(談修養)』 등의 저서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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