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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윤준희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간도로 이송하던 현금 15만원을 탈취, 무기구입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체포되어 1921.8.25.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청년들의 독립전쟁, '간도 15만원 사건'

윤준희 / 임국정 / 한상호 / 김강

윤준희 , 1895 ~1921 , 독립장 (1963) 임국정 , 1896 ~1921 , 독립장 (1963) 한상호 , 1900 ~1921 , 독립장 (1963) 김강 , 미상 ~(1920) , 독립장 (1995)

1. 일제를 당혹케 한 청년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의 그날

1920년 1월 4일 아침 8시 반경, 장총과 권총, 군도 등으로 무장한 일본인 경관 3명과 한인 순사 1명, 조선은행(朝鮮銀行) 회령지점의 서기 김용억(金容億), 회령의 상인 진길풍(陳吉豊) 등 6명으로 구성된 호송대가 철제 궤짝과 우편물 행낭을 실은 두 마리 말을 앞세우고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에서 북간도 용정(龍井)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이 운반하는 것은 바로 일화(日貨) 15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대략 현재 가치로는 13억 5,0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소총 5,000정과 탄환 50만 발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는 당시 만주지역의 독립군을 모두 무장시키고도 남는 거금이었다.

이 15만원은 일제가 길회철도 공사를 위해 1919년 10월 중순에 35만 원, 11월 중순 28만 원을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지점으로 운반했으며, 이날도 길회철도 부설을 위한 자금을 운반하고 있던 것이다.

조선은행 용정지점
조선은행 용정지점

호송대는 이날 오후 5시경 간도 용정촌(龍井村) 남방 2리 부근에 위치한 동량어구(東梁於口)에 도착했다. 이때 “사격”이란 소리와 함께 중국인 마적처럼 의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총을 쏘며 호송대를 습격했다. 선두에서 호송대를 이끌던 경관 나가토모(長友嘉相次)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날 습격으로 호송대는 조선은행 용정지점으로 운반하고 있던 철제 궤짝과 우편물 행낭을 실은 두 마리 말을 모두 탈취당했다.

일제 당국은 사건 직후 주동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집중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는 습격자들을 ‘총기를 휴대한 조선인 마적 십수 명’으로 파악하며, 정확한 숫자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서기 전홍섭(全洪燮)이 체포되면서 사건 주동자들의 대략적인 신상이 드러났다. 사건의 주역은 바로 청년 윤준희와 임국정, 한상호, 최이붕(崔以鵬), 박웅세(朴雄世), 김준(金俊)이었다.

청년들은 호송대 습격 후 사전에 약속한 대로 움직였다. 박웅세와 김준은 집으로 귀환했고, 윤준희와 최이붕, 한상호는 국자가(局子街, 오늘날 연길) 교외에 위치한 와룡동(臥龍洞)을 거쳐, 1월 5일 약속한 장소인 왕청현(汪淸縣) 의란구(依蘭溝) 유채구(有菜溝)로 탈취한 현금을 무사히 옮겼다. 이때 청년들은 최이붕의 동생인 최봉준의 도움을 받아 현금을 무사히 운반했다.

2. 청년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의 ‘독립전쟁’ 준비

1895년 12월 26일 함경북도 회령군 봉의면에서 태어난 윤준희는 유년시절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이후 중국 용정촌으로 이주한 윤준희는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신학문을 수학했고, 1907년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 영신학교(永新學校) 교원으로 민족교육활동을 이어나갔다.

한상호는 1900년 2월 23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온면에서 태어나, 일찍이 중국 연길현 길인향 와룡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와룡동에 위치한 창동학교(昌東學校)에서 수학했다는 의견도 있다. 졸업 후 와룡동소학(臥龍洞小學)에 재직하며, 한인 청년의 민족정신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동휘
이동휘

임국정과 최이붕도 창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었다. 임국정은 1896년 9월 21일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에서 태어나, 일찍이 가족들과 함께 북간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임국정은 최이붕과 함께 창동학교에서 수학하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임국정은 창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는 한편, ‘훈춘선인기독교우회(琿春鮮人基督敎友會)’의 서기(書記)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어나갔다.

임국정과 최이붕은 창동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전쟁에 나서기 위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에 입교했다. 동림무관학교는 독립전쟁에 필요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이동휘(李東輝)와 이종호(李鍾浩) 등이 1914년 6월 중국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 설립한 무관학교였다. 이때 임국정과 최이붕은 동림무관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김하석(金夏錫)에게 교육받으며, 인연을 쌓았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에 동림무관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고, 임국정은 30여 명의 학생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자를 대거 모집하던 러시아 우랄 지역으로 떠났다.

3. ‘독립전쟁’에 나선 청년들, ‘간도 15만원 사건’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파악한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는 파리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1919년 1월 북간도 한인들은 국자가 소영자(小營子)에서 기독교 전도대회를 개최하고, 비밀리에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들과 공동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북간도 지역의 위원들을 선정했다. 1918년 무렵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로 돌아온 임국정은 이때 용정촌 영신학교(永信學校)에서 조직된 ‘기독동지청년회’에서 북간도 청년회 대표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해 2월 25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국내조선인회의(全露國內朝鮮人會議)’에 파견되었다. 러시아와 중국 관내, 만주, 국내 지역 등의 대표자들은 해당 대회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결성하고, 연해주와 북간도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함께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청년들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했다. 철혈광복단은 1911년 초 이동휘가 간도에 왔을 때 조직한 광복단(光復團)과 러시아 지역에서 1917년 2월 혁명 이전 조직된 청년 비밀결사인 철혈단(鐵血團)이 1918년 가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고양된 운동조건에 부응하여 통합·조직된 단체였다. 철혈광복단에는 동림무관학교와 명동·창동·영신학교 등 북간도 민족학교 출신 청년들이 대거 참여했다. 철혈광복단은 비합법적인 전투적 비밀결사 단체로서 대중적·합법적 정치단체였던 대한국민의회나 북간도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인적 공급원 역할을 하였다. 윤준희와 한상호, 임국정, 최이붕 등도 철혈광복단에 참여해 조국의 독립에 종사하겠다는 맹세를 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3월 7일 북간도 한인들에게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북간도 한인들은 3월 13일 용정의 서전평야(瑞甸平野)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태극기를 들고 거리시위에 돌입했다. 이때 일제의 간도 지역 진출을 우려한 중국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그 결과 1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이 넘는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현장에서 순국한 채창헌(蔡昌憲)은 동림무관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임국정과 함께 러시아 우랄 지역으로 함께 떠났다가 북간도로 돌아온 인물이었다.

청년들은 3·13 용정 만세운동 직후 오로지 ‘독립전쟁’을 통해서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깨달았다. 윤준희와 한상호, 임국정, 최이붕 등 철혈광복단 단원들은 비밀리에 모여 의견을 모았다. 회의 이후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자신들 집에 있는 송아지들을 팔아 마련한 돈을 가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당시 내전 중이었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무기를 구매할 수 있었고, 1919년 3월 17일 중국 관내와 만주, 국내 지역 등 대표들이 결성한 대한국민의회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한상호는 같은 철혈광복단 단원이자 대한국민의회 선전부장(宣戰部長) 대리로 활동하던 김하석의 소개로 600여 명의 한인 청년들과 함께 동중철도(東中鐵道)의 호르바트(Д.Л. Хорват) 부대로 파송되었다. 임국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의 김하석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구매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윤준희도 영신학교 교원이었던 신영욱(辛永旭)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러시아 등지에서 구매한 무기를 자신이 서기로 일하던 용정촌 야소병원(耶蘇病院)에 숨기며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모으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임국정과 윤준희, 최이붕, 박웅세 등은 ‘청년맹호단(靑年猛虎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북간도 지역 내 한인 밀정과 친일 협력자들에 대한 경고문을 살포하고, 개천절을 기념해 태극기를 게양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동시에 군자금 모집을 위한 계획도 본격적으로 수립되기 시작했다. 1919년 9월 초순 임국정과 최이붕은 김강과 서성권(徐成權)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간도청년회(間島靑年會)’에 참여하기 위해 구소하(九所河) 지역에 도착했다. 간도청년회 회원들은 당시 대한국민의회 선전부와 긴밀히 연락하며 활동했다. 임국정은 이때 간도청년회 운동부장(運動部長)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최이붕(최계립)과 임국정
최이붕(최계립)과 임국정

간도청년회 조직 집회 직후 윤준희와 임국정, 최이붕은 김하석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을 위해 조선은행 자금을 탈취할 계획을 촉구하는 서신을 받아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해당 계획은 당시 조선은행 회령지점 서기로 일하고 있던 전홍섭을 포섭하여 자금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1919년 12월 전홍섭은 1920년 1월 4, 5일경 조선은행 회령지점으로부터 용정지점까지 현금 수송이 진행될 것 같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이에 1920년 1월 1일, 윤준희와 최이붕, 임국정은 김하석과 만나 작전을 가다듬고, 1월 4일 작전을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 6명은 일제로부터 현금 15만 원을 성공적으로 탈취했다.

이렇듯 ‘간도 15만원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단순 탈취사건이 아니었다. ‘간도 15만원 사건’은 3·13 용정 만세운동 이후 철혈광복단 청년들이 철저히 계획하여 달성한 ‘독립전쟁’의 쾌거였다.

4. 밀고로 스러진 청년들의 ‘독립전쟁’

추격대를 따돌리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던 임국정이 1월 9일 의란구 유채구에 도착하며,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 청년들이 한 장소에 모였다. 청년들은 이곳에 머물고 있던 김하석과 논의 끝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탈취한 자금을 대한국민의회의 선전부에 헌납하여 사용하기로 했다. 이때 리더격인 윤준희가 재무취급자로 임명되었다.

청년들은 1월 10일 국경을 넘어 러시아령 모구위(毛口威)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자금을 분산하여 소지하고, 1월 22일 포시에트 항구에서 기선(汽船)을 타고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 각자 거처를 마련하여 숨었다.

이튿날 밤 철혈광복단 단장 전일(全一)은 회의를 소집하고, 구체적인 자금 사용 계획을 수립했다. 회의 결과 무기 구매와 사관학교 건립, 신한촌 내부에 신문 발간 및 도서 출판을 위한 사무소 건물 매입 계획이 결정되었다. 이때 원활한 계획 수행에 필요한 회의 개최를 위해 단체 합숙을 권한 김하석의 제의에 따라 청년들은 한 숙소에서 합숙하게 되었다.

무기 구매의 책임은 임국정이 맡았다. 임국정은 과거 김하석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구매한 경력이 있었다. 임국정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사령부 포병부 무기고 책임자 몰린 대위와 소총 1,000자루, 탄약 약 100상자, 기관총 10문을 약 32,000여 원에 거래하기로 합의했다. 거래를 주선한 중개인은 과거 홍범도와 의병활동을 함께한 엄인섭(嚴仁燮)이었다.

그러나 엄인섭은 무기 밀매를 알선하는 한편, 정보를 일제 측에 전달했다. 엄인섭이 정보를 전해준 인물은 기토 가쓰미(木藤克己)였다. 그는 표면상으로 ‘일본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제 업무는 독립운동가들의 동정을 조사하고 체포하는 것이었다. 엄인섭 등 밀정으로부터 임국정과 김하석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총 2,000여 정의 구매를 의뢰했다는 정보가 1월 28일 기토 가쓰미에게 탐지되었다. 일제는 1월 10일 북간도 와룡동을 포위하고 일제 수색을 통해 ‘간도 15만원 사건’ 주역들의 신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전홍섭을 이미 체포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밀정의 정보를 통해 무기 매매 일정을 파악한 기토는 청년들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월 30일 저녁. 김하석과 최의수(崔義洙)가 네 청년의 숙소로 찾아와 청년들의 무기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일부 반발이 있었지만, 임국정이 승낙하며 책임자 윤준희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의 권총과 수류탄은 김하석에게 인계되었다. 1월 31일 새벽 3시, 기토 가쓰미가 체포 과정을 지휘하는 가운데 일본군 헌병대 1개 소대 병력이 네 청년의 숙소를 둘러싸고 잠들어 있던 청년들을 급습했다. 체포 과정에서 최이붕은 도주에 성공했지만,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체포되고 말았다.

이날 체포된 세 청년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 지쿠젠마루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일주일간 혹독한 심문을 받으며 악형을 견뎌야만 했다. 체포된 세 청년을 실은 지쿠젠마루호는 일본 모지항(門司港)과 요코하마항(横浜港)을 거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세 청년은 재판 관할 법원이 위치한 함경북도 청진(淸津)으로 이송됐다.

간도 15만원 사건 고등법원 판결문
간도 15만원 사건 고등법원 판결문

청진지방법원에서 세 청년과 전홍섭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이 진행됐다. 1심에서 임국정과 윤준희는 사형, 한상호는 무기징역, 전홍섭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어진 2심과 3심은 서울의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진행되었고, 1921년 4월 4일에 최종심의 선고가 이뤄졌다. 고등법원은 최종심에서 윤준희와 임국정, 한상호 3인에게 사형, 전홍섭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그리고 1921년 8월 25일, 윤준희와 임국정, 한상호 세 청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

5. ‘간도 15만원 사건’의 ‘연루자’, 김강

1920년 만주로 군대를 출병한 일제는 이른바 ‘간도 15만원 사건’의 연루자라는 명목 아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살해했다. 1912년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활동해 온 김강도 이러한 이유로 일제에 의해 피살 순국했다.

김강
김강

김강은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하던 중,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될 위험에 처하자, 1912년 중국 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김강은 하얼빈으로 이동해 한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3년 간민회(墾民會)가 조직되자, 그는 용정으로 돌아와 간민회 일본조사부원(日本調査部員)으로 활동하는 한편, 동제회(同濟會) 평의원과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 회원 등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그해 11월 연길현 춘양향(春陽鄕)에서 북간도 지역 대표들이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자, 이에 참여했다. 김강은 대한국민회 통신부(通信部) 부원과 연길현 상의향(尙義鄕) 태평구(太平溝)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제1중부지방회의 중부경호부장(中部警護部長)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협력자들을 처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1919년 11월 정식으로 출범한 간도청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청년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1920년 11월 13일 연길현 태평구 용포동(龍浦洞) 부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 일제의 카노 기병연대(加納騎兵聯隊)에 이른바 ‘간도 15만원 사건’의 연루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중국 연길현 동불사(銅佛寺) 북구(北溝)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6. 맺음말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용정)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용정)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인 세 청년의 무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황량한 공동묘지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에 이지택(李智澤)과 임병철 등 유가족과 동지들은 세 청년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묘소를 이장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대한민국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세 청년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1966년 11월 24일 세 청년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간도 15만원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철혈광복단 청년들은 철저한 계획 끝에 ‘간도 15만원 사건’이라는 쾌거를 달성할 수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아가던 청년 독립군들의 뜨거운 ‘독립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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