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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임천택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7년

주요공적

1922년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 활동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미주지방위원으로 독립운동 전개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대전현충원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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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택 / 서병학 / 박창운

임천택 , 1903 ~1985 , 애국장 (1997) 서병학 , (1885) ~미상 , 애족장 (2021) 박창운 , 1889 ~미상 , 애족장 (2011)

1. 세 남자의 독립운동 행적 찾기에 앞서서

1) 조국에서 멕시코로

1905년 1,018명의 한인들이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 크루스(Salina Cruz) 항구에 첫발을 디뎠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멕시코 이민이 시작된 것이다. 멕시코에 간 한인은 대부분 본국에서의 절망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20대 초반의 젊고 활기찬 사람들이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의 눈 앞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일이 매일 벌어졌다. 특히 이들에게 에네껜 농장에서 4년간의 갖은 고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멕시코 한인들의 고통은 1909년 5월 농장에서 풀려나면서 해방됐다. 이후 멕시코 한인들은 국민회 메리다(Mérida) 지방회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갔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았다. 멕시코 한인의 이민사는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멕시코 한인 사회의 역사는 크게 여섯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멕시코 한인 사회사 시기구분

  • 1기

    멕시코 이주부터 에네껜 농장 시대로 한인들이 고된 노동에 종사하던 시기

  • 2기

    에네껜 농장에서 해방된 1909년 5월부터 1920년까지 멕시코 혁명이 진행되던 시기. 이때는 한인들이 멕시코의 각지로 흩어져 유랑하던 기간임.

  • 3기

    1921년부터 멕시코 한인들 가운데 약 300명이 쿠바로 재차 이민을 시도하면서 한인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현지화가 진행되던 기간. 이 시기 멕시코 현지에서는 소노라 왕조(Sonora, 1923∼1934)와 카르데나스(Lazaro Cardenas, 1934∼1940)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근대 국가의 기틀이 갖춰짐.

  • 4기

    1941년부터 1945년까지로, 멕시코 혁명이 완전 종식되면서 이민 1세가 대부분 은퇴하고 1.5세와 2세가 중심이 되어 한인 사회를 이끌어 가던 시기. 이 기간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으며, 멕시코 한인의 경제가 안정되어 감. 미주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연결되어 조국의 독립 운동에 매진함.

  • 5기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이다. 한인 이민 1세들이 사라지고 2세, 3세들이 한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기간. 이때는 민족적 정체성보다 한인들 간의 친목과 단결에 중점을 둠.

  • 6기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중남미 이민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주류를 이루어 감.

2) 멕시코에서 쿠바로

1921년 멕시코의 한인들 가운데 약 300명이 쿠바로 재이민을 갔다. 한국에서 멕시코로 이민 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쿠바 이민사는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인의 쿠바 이민사 시기구분

  • 1기

    1921년부터 1929년까지로 한인들이 쿠바로 이주·정착, 그리고 국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기간.

  • 2기

    1930년부터 1941년까지 대공황 이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대공황으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삶이 궁핍해짐. 이런 어려움에도 쿠바 한인들은 국민회를 중심으로 경제적 난국을 극복하고자 노력함.

  • 3기

    1942년부터 1945년까지로 국민회를 중심으로 한인들이 일치단결하여 조국의 광복 사업에 열중하던 시기. 특히 쿠바 한인들은 1943년 재큐한족단을 조직하여 대외 선전 활동을 하면서 독립 운동 자금을 후원.

  • 4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항일 운동의 강력한 힘이 사라지자 한인들 간의 결속의 끈이 느슨해져 버리면서 도시로 흩어진 시기.

2. 세 남자의 가슴속에 새겨진 두 글자 ‘독립’

1) 가장 멀리 이민 간 세 남자의 생애

▫ 임천택

임천택이 저술한 『쿠바이민사』(태평양주보사, 1954)ⓒ한국이민사박물관
임천택이 저술한 『쿠바이민사』(태평양주보사, 1954)ⓒ한국이민사박물관

1903년에 태어났다. 모친을 따라 멕시코로 건너올 때가 2살이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재이주한 것은 그의 나이 18살이 되던 때였다. 어린 시절을 멕시코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멕시코는 ‘제2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쿠바였다. 그는 쿠바에서 결혼을 하여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다. 개인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국민회 지방회 활동, 교육활동, 종교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멕시코와 쿠바 지역에서 전개한 활동의 기저에는 ‘독립’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서병학

1885년에 태어났다. 동생 서병욱이 서울에서 상업활동을 하고 있었다. 본인도 이민 오기에 앞서 장사로 가정을 꾸려 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병학의 어린 시절 삶을 말해주는 자료가 부족하여 세부적인 삶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그 역시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들과 함께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4년간 중노동을 했다. 1921년 멕시코 한인 일부가 쿠바로 재이민 갔을 때 동석했다. 멕시코와 쿠바 한인 사회를 이끌었으며,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았다.

▫ 박창운

1889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자유와 독립 쟁취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들과 함께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4년간 중노동을 했다. 멕시코에서 사용한 이름은 박 라몬(Ramon Pack)이다. 1910년 1월 26일 멕시코 메리다에서 현항건의 딸 현귀봉(뒷날 현미숙으로 개명, 멕시코 이름은 현 후아기나)과 결혼했다. 이들은 6남매를 두었다. 1921년 3월 200여 명의 한인과 쿠바로 재이주했다. 같은 해 6월 마탄사스로 이주하여 평생을 살았다. 그 또한 멕시코와 쿠바에서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2) 독립을 향한 여정

▫ 임천택

(1) 단체활동

마탄사스 동포의 동정금(신한민보 1937년 10월 21일자)
마탄사스 동포의 동정금(신한민보 1937년 10월 21일자)

► 1922년 7월,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Matanzas)지방회 서기

► 1926년 8월, 마탄사스지방회 임시서기

► 1927년, 마탄사스지방회 총무, 서기 겸 실업부원,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신한민보』통신사무 담당

► 1930~1931, 1929년 카르데나스(Cardenas)로 이주, 카르데나스지방회 회장, 학무원

► 1931,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접촉. 쿠바 한인 소식 전파 및 독립운동 자금 지원활동 시작.

► 1937~1939년, 마탄사스지방회 총무

► 1941년 12월 28일, 쿠바 대한인국민회 3개 지방대표회 11인의 한사람으로 재큐한족연합외교회 결성

► 1943년 4월, 아바나(Havana) 등 3곳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통합하여 재큐한족단을 창립.

► 1944년, 마탄사스지방회 재무로 활동.

(2) 교육활동

임천택 군을 소개(신한민보 1942년 6월 4일자)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 지방회 고문으로 추천된 임천택의 이력을 소개하고 있다.
임천택 군을 소개(신한민보 1942년 6월 4일자) 대한인국민회 마탄사스 지방회 고문으로 추천된 임천택의 이력을 소개하고 있다.

► 1925~1927년, 마탄사스 소재 민성국어학교 교장으로 활동

► 1930~1931년, 쿠바 진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인 자녀들의 정체성과 민족의식 함양에 노력.

► 1932~1935년, 멕시코 재이주. 민성학교 교장

► 1932년, 마탄사스 지방에서 청년학원 세우고 교장 겸 교사로 활동, 청년학원은 야학교임. 독서, 동화구연, 토론, 강연회 등을 통해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줌.

(3)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

► 1938년 7월, 마탄사스에 대한여자애국단 지부가 설립되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군 후원금을 내고 모집.

(4) 국내 교류 활동

► 1926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지식인들과 교류. 한국에서 보내 온 서적, 신문, 잡지 등을 한인들과 돌려 읽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했다. 국내에서 발행하고 있던 『별건곤』, 『삼천리』, 『조선일보』등에 쿠바 한인들의 열악한 사정을 알렸다.

► 1937~1939년, 마탄사스지방회 청년부 강사로 국어교육을 실시

▫ 서병학

(1) 단체활동

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1주년 기념식ⓒ독립기념관
국민회 메리다지방회의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1주년 기념식ⓒ독립기념관

► 1909년, 멕시코 메리다지방회 회원 가입.

► 1911년, 멕시코 메리다지방회 사찰.

► 1913년~1915년, 멕시코 오학기나지방회 서기 및 학무.

► 1916년, 멕시코 오학기나지방회 부회장 선임.

► 1917년 8월, 메리다지방회가 호보야 경찰소를 설립할 당시 임원으로 활동.

► 1922년 3월, 마탄사스지방회 서기로 선임.

► 1924년 3월, 마탄사스지방회 신한민보 대금 수봉위원으로 활동.

► 1937년 2월, 하바나지방회 설립 및 지방집행위원장으로 활동.

► 1937년 7월, 하바나지방회에 청년부 설치하고 학무원으로 활동.

► 1938년, 하바나지방회 서기 및 선전, 청년부 서기 및 교육, 하바나 국어학교 교사, 하바나지방회 수전위원 등으로 활동.

► 1941년, 하바나지방회 집행위원 서기로 활동.

► 1943년, 하바나지방회 서기 및 교육위원으로 활동.

► 1945년, 하바나지방회 교육위원으로 활동.

(2) 교육 및 민족의식 고취 활동

► 1913년 8월, 오학기나지방회 임원으로 학교 설립에 앞장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학교 설립 지원금을 청원.

► 1922년 11월, 민성학교 교사로 활동.

► 1923년 3월, 민성국어학교 개학실 날 국어교육의 필요성을 역설.

► 1924년 3월, 3.1운동 기념일 기념 예식 거행. 전례위원으로 임천택과 함께 독립운동의 필요성 역설.

► 1925년 11월, 마탄사스지방회 전례위원으로 박은식 선생 추도회를 주최. 임천택과 함께 ‘민족의 자유 위하시다가’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며, 국권회복 의식을 고취

► 1935년, 쿠바 수도 하바나에 있던 만국신문 기자구락부에 입회하여 한국사정을 소개하고 독립청원을 역설함.

► 1937년 3월, 하바나 국어학교 설립에 앞장섬. 국어교사로 활동.

► 1940년 11월, 광복군 축하식 주최, 축사낭독을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

► 1942년 11월, 대일선전1주년 기념식을 주최. 여기서 임시정부의 대일선전 전보를 낭독함.

(3) 독립운동 자금 지원

► 1916~1924년, 대한인국민회 의무금 30달러 납부.

► 1917년 4월, 안창호 멕시코 여비로 15달러 기부.

► 1940년~1941년, 광복군 후원금 1달러 70센트 기부.

► 1941년 6월, 독립금 60센트 기부.

▫ 박창운

(1) 단체활동

► 1911년 4월, 백한성 등 9명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신입 회원으로 가입.

► 1917년, 메리다지방회 외교원으로 활동.

► 1921년 6월,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주한 뒤 쿠바 마탄사스지방회를 창설. 아바나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한인에게 일본 재외국민 등록 요구 거부.

► 1921년 10월, 마탄사스지방회 외교원으로 선임.

► 1922년 1월, 마탄사스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임.

► 1924년 4월~1928년, 마탄사스지방회 외교원으로 선임.

► 1929년~1931년, 마탄사스지방회 회장으로 3년간 활동.

► 1937년, 마탄사스지방회 교육부 위원.

► 1941년, 마탄사스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활동. 한중 합작으로 한국광복군 축하식을 주최.

►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에 따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설립. 이때 임천택과 함게 미주지방위원으로 선임.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선전사업 활동 전개.

► 1942년 1월, 임천택과 함께 아바나지방회와 카르데나스지방회로 가서 재큐한족연합외교회 조직 경위와 행정 체계를 설명.

(2) 교육 및 민족의식 고취 활동

► 1917년 1월, 한인 학교인 해동학교에 재정지원

► 1925년 2월, 대한인국민회 창립 기념일에「국민회의 역사」라는 주제로 강연. 독립을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일치단결할 것을 주장.

► 1926년 8월, 한인2세를 위해 설립된 민성국어학교 교사로 활동.

► 1928년 8월, 민성학교 교장 취임.

► 1929년 11월, 민성학교 임원으로 활동.

► 1930년 3월, 민성학교 교장 재취임.

► 1930년 6월, 장인환 의사 사망 소식을 듣고 추도회를 열고 추도사를 함.

► 1936년 3월, 임천택과 함께 지방회 청년부를 조직하고 조례를 만듬. 청년부에 야학 개설, 체조 및 군사훈련, 강연회, 독서회등을 통해 청년들의 민족의식 함양에 앞장섬.

► 1942년 11월, 하바나에서 침략국타도회가 열리자 이승택과 함께 한인 대표로 참석.

(3) 독립운동 자금 지원

박창운 가족(쿠바 마탄사스, 1930년대)ⓒ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박창운 가족(쿠바 마탄사스, 1930년대)ⓒ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 1909년 11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재정 곤란 소식을 듣고 24페소 50전을 보냄.

► 1917년 3월, 해동학교 재정을 후원하고자 유지동맹원을 결성하고 동맹금을 기부.

► 1917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 안창호의 멕시코 초빙에 필요한 비용으로 25달러를 기부.

► 1923년 10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요청으로 한국 수재 구제금 모금 활동이 일어남. 이때 구제금 25달러를 보냄.

► 1925년 2월, 기근구제금 23달러 60센트 기부.

► 1929년 10월, 독립전쟁에 사용할 목적으로 300달러 기부.

► 1930년 6월, 장인환의사 사망 소식을 듣고 20달러 25센트를 기부.

3. 세 사람이 남긴 향기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은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조직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무형의 한족정부(韓族政府)’라 불릴 만큼 1910년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었다. 1910년대 미주 지역에서 국민회는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정부 역할을 맡았다.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을 자임했다. 대한인국민회 지부가 멕시코에는 1909년, 쿠바에는 1921년 설립되어 한인의 이익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역할을 다하였다.

멕시코에 이민 온 세 사람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대한인국민회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쏟았다. 이들은 멕시코 지방회에서는 한 사람당 1페소의 월 연금을 거리낌 없이 정기적으로 납부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의무금·가옥채·기계채 등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국민회에 필요한 각종 특별의연을 모집하고, 동맹 저축, 애국 동맹금을 거둘 때 기꺼이 돈을 냈다. 1919년 1월에는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을 위해 특별의연으로 1인당 20페소 이상을 거두었다. 3.1 운동 기간에는 메리다 지방회 소속의 한인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 총회에 보낸 돈이 약 1,000달러가 넘었다.

메리다 지방회 설립 직후 일어난 멕시코 혁명의 영향으로 한인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이 기간 멕시코 한인 사회에는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한인들은 심각한 생활난과 경제적 상승을 위해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그 가운데는 경제적 상황이 훨씬 좋은 미국으로 간 사람도 있었고, 1921년에는 쿠바로 집단 이민을 떠나기도 하였다. 임천택, 서병학, 박창운은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민 간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와 쿠바 지역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상호 단결을 통하여 한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쏟았다.

세 사람은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을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시켰다.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지도력을 발휘했다. 나아가 독립운동을 일생에 거쳐 적극 후원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숭무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을 양성하여 원동 지역의 독립군으로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무장투쟁 분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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