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19년 이래 1941년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에서 기자와 편집부장 등을 지냈다. 1920년 12월 조선불교회(朝鮮佛敎會) 간부로 활동했다. 1925년 11월 고(故) 박은식(朴殷植) 추도회(追悼會) 발기인, 1926년 4월 국수회(國粹會) 회원의 창덕궁(昌德宮) 난입 사건 탄핵을 위한 전형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41년 10월 하순경부터 서울에서 이극로(李克魯)·안호상(安浩相)과 함께 이우식(李祐植) 등에게 우리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위해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출자하도록 권유했다. 이우식은 1942년 1월까지 20만 원을 제공하기로 확약했다. 이 일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1942년 12월 23일 서울에서 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洪原警察署)로 압송되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사전 편찬에 직접 참여했거나 재정 지원을 한 사람 등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총 33명을 검거하였으며, 모두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송치하였다. 1943년 4월 중순경 신윤국(申允國) 등과 함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어학회사건예심판결문(함흥지방법원:1943. 9. 30)
- 한글학회50년사(한글학회, 1971년) 14~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