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10월 이래 충남 예산에서 농촌의 문맹퇴치와 농민의 단결, 민족정신을 고취 시키기 위해 형 윤봉길 (尹奉吉) 의사 (義士) 가 조직한 각곡독서회 (角谷讀書會) 와 월진회 (月進會) 에 가입하여 1930년까지 농민의 단결과 청소년의 애국사상을 고취 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직전 형의 유품인 농민독본 (農民讀本) , 일기, 월진회취지서 등을 은닉하여 귀중한 유품을 보존하였고 윤의사 의거 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 하에서 윤의사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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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1926년 10월부터 예산지역의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활동하였다.
윤영석은 윤봉길의 동생으로 윤봉길이 1926년 10월 조직한 각곡독서회(角谷讀書會)에 가입하고, 1929년 3월 28일 일본침략정책을 풍자한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다. 그리고 4월 8일에는 윤봉길이 야학생 중심으로 조직한 월진회(月進會)에 가입하여 농촌개혁운동과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0년 3월 15일 윤봉길이 중국으로 망명한 뒤로는 그가 월진회를 이끌며, 토론회와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그는 윤봉길이 보낸 편지를 보고, 그의 거사를 깨닫고 윤봉길이 직접 쓴 농민독본(農民讀本)·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월진회취지서(月進會趣旨書) 등을 천장에 극비 보관하였다.
1932년 5월 정종호(鄭鍾浩)가 만든 예산농고(禮山農高) 독서회 조직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런데 1932년 12월 정종호가 예산농고 독서회 사건으로 붙잡히고 조사가 확대되자,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1933년 1월 중순 경 출가(出家)하여 해방될 때까지 선의(璇儀)라는 가명을 가지고 피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己巳年 日記(尹奉吉, 1929)
- 創立趣旨書(月進會, 1929. 4. 8)
- 尹奉吉義士의 書信(1931. 8. 15)
- 韓國日報(1972. 8. 10)
- 寶物指定書(文化公報部, 1976. 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