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전북 순창(淳昌) 사람이다.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高敞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3월 상지대학(上智大學)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1940년 11월경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재학 중, 동아연맹(東亞聯盟) 한국학생 좌담회에서 김창옥(金昌沃)·박석우(朴錫祐) 등을 만나 그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협의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민족을 통치할 수 있는 지도원리를 파악함과 동시에 혈맹적(血盟的) 동지를 규합하여 우리 민족을 지도·계발하는 독립소지(獨立素地)의 배양에 노력하여 점차 독립기운을 양성하고 태평양전쟁 말기에 들어 일본의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이용하여 일본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강요하여 한국의 독립을 실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동년 11월 동아연맹 좌담회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김창옥·박석우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할 비밀결사 '우리들'을 조직하였다.
그 후 동년 12월 중순경 회원들과 회합하여 독립 달성을 위한 1단계로서 역사·경제·민족정치·사회학·철학 등 각 분야별로 민족운동의 지도원리를 연구하기로 협의·결정하였으며, 1941년 2월 초순경에는 그룹의 비밀유지와 동시에 연구 결과를 각각 취합하여 발표할 것을 협의하였다.
1941년 4월 동북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법문학부에 입학한 그는 동년 8월 귀국하여 전남 담양군 창평면(昌平面) 창평리에 있는 그룹회원 박석우의 집에서 회원들과 함께 연구상황을 상호 보고하는 등 독립정신 앙양에 노력하다가 붙잡혔다.
1944년 10월 6일 산구지방재판소(山口地方裁判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3집 771면
- 판결문(1944. 10. 6. 산구지방재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