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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330
성명
한자 李文千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0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21 제주도(濟州道)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 등이 주도하는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에 참여하여 1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였으며, 동월(同月) 23일에도 동리(同里) 신작로에서 함덕리까지 많은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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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계속된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朝天里)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도내의 저명한 유학자이며 지사인 김시우는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김장환과 함께 사방으로 연락을 취하며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때 이문천은 만세시위의 계획을 듣고 적극 찬동하였으며, 그와 함께 김시은(金時殷)·김시범(金時範)·김영배(金營培) 등도 만세시위 계획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들은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장소는 조천리에서 약간 떨어진 미모치(味毛峙; 일명 미밑 동산, 혹은 만세동산이라 일컫음) 동산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신촌(新村) 함덕리(咸德里) 등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며 다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이문천을 비롯한 5, 6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미모치에 모여들었다. 그런 가운데 김시범은 독립선언서 낭독하였고, 김장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문천을 비롯한 시위군중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연창하면서 시가지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들은 출동한 일본 군경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고재륜을 비롯한 중심 인물 12명이 붙잡혔다.

이어 22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다시 많은 군중들이 모여 검속된 애국인사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한 것이다.

이문천은 이와 같은 조천리의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이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5. 29. 大邱覆審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名籍表(大邱監獄)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27面
  • 濟州抗日獨立運動史(濟州道, 1996) 427∼431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문천 - 제주(齊州) 1919년 제주군 신좌면 만세운동
본문
1892년 3월 17일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잡화상(雜貨商)으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21일에서 24일까지 4일간 신좌면 조천리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중, 21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조천리의 만세운동은 제주 일대에서 명망 있는 유학자(儒學者)이던 김시우(金時宇)의 아들인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3월 16일 경 제주도로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과 논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뜻을 함께 할 동지 14명을 모았는데, 이 때 함께 참여하였다.3월 21일 아침 10시, 인근 지역의 서당 학생 등 150여 명이 신좌면 조천리 미밋동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장서 만세를 외치며 조천 비석거리를 향해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였다.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 500여 명에 달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급히 출동하여 해산을 권유하였으나 사람들은 이에 저항하였다. 대치 중 일제 경찰이 증원되었고, 이들이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김시범 등 9명이 붙잡혔는다. 이 때는 몸을 피하였다.이어진 22일에도 조천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었으나, 이때는 미처 참여하지 못하였고, 이어진 23일에는 김연배(金年培)·백응선(白膺善)과 함께 100여 명의 시위대를 모아 조천장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후 사람들에게 함덕리(咸德里) 방면으로 진출할 것을 역설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함덕리로 행진하였다. 이곳에서 주민들과 합류하여 800여 명의 큰 무리가 되어 더욱 열성으로 시위를 주도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총칼을 이용하여 강제 해산을 요구할 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풀려난 이후 조천리 시위 주도자 14명이 감옥에서 받은 돈을 모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에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범 징역 8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5-2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4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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