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계속된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朝天里)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도내의 저명한 유학자이며 지사인 김시우는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김장환과 함께 사방으로 연락을 취하며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때 이문천은 만세시위의 계획을 듣고 적극 찬동하였으며, 그와 함께 김시은(金時殷)·김시범(金時範)·김영배(金營培) 등도 만세시위 계획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들은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장소는 조천리에서 약간 떨어진 미모치(味毛峙; 일명 미밑 동산, 혹은 만세동산이라 일컫음) 동산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신촌(新村) 함덕리(咸德里) 등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며 다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이문천을 비롯한 5, 6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미모치에 모여들었다. 그런 가운데 김시범은 독립선언서 낭독하였고, 김장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문천을 비롯한 시위군중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연창하면서 시가지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들은 출동한 일본 군경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고재륜을 비롯한 중심 인물 12명이 붙잡혔다.
이어 22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다시 많은 군중들이 모여 검속된 애국인사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한 것이다.
이문천은 이와 같은 조천리의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이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5. 29. 大邱覆審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名籍表(大邱監獄)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27面
- 濟州抗日獨立運動史(濟州道, 1996) 427∼43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