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1919년 귀국하여 '국민대회'에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 등과 함께 3월 중순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면서 각 방면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대표자들이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정부수립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4월 19일 그의 집에서 안상덕(安商德)·현석칠(玄錫七)·김유인(金裕寅) 등이 회합을 갖고 자금을 모집해 서울 보신각 일대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 후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4월 5일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집행위원으로 피선되는 동시에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4월 9일에는 박사직(朴思稷)·김병규(金秉圭)·김종범(金鍾範) 등과 '조선교육개선회'를 조직하였다. 동년 9월에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흑도회(黑濤會) 결성을 주도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1922년 1월 귀국하여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를 조직하였다. 무산자동지회는 '동일한 사회운동에 뜻을 두는 사람만이 회합하여 무산자계급의 생존권을 확립한다'는 목적 아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그는 1922년 11월 '신생활' 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간도에서 동양학원(東洋學院), 영고탑(寧古塔)에서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다시 소련으로 망명해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4년 귀국하여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의 결성을 주도하고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378面
- 東亞日報(1921. 4. 9, 1922. 11. 26, 1923. 7. 7, 1925. 10. 20, 1926. 5. 10)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488·565·566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김준엽, 김창순) 第2卷 31∼33·42·44·66·67·70∼79·108·112·113·136·137·216·229·242·249·257·309·313·371·390∼392·408·412·436∼440面
- 豫審終結決定書(京城地方法院, 1919. 8. 30)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12. 19)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67·79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14·118·144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33∼14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196, 664∼66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95·99·114·99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2輯 685∼98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