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32년 9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하관시(下關市)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5학년을 중퇴하였다.
1936년 2월경에는 다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동경(東京)으로 가 우편배달부 등을 전전하면서 사립 목백상업학교(目白商業學校)를 거쳐 입정대학(立正大學) 고등사범부(高等師範部)에 입학하였지만, 1941년 중퇴하고 말았다.
동경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인의 한인에 대한 민족차별을 목도하면서 민족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40년 3월경에는 동아연맹(東亞聯盟)에 출입하기 시작하였으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의 한국통치의 기본방침이 한민족 말살에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1940년 11월경 동아연맹 한인학생 좌담회에서 알게 된 박석우(朴錫祐) 등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40년 12월경 그의 주도하에 박석우 등 3인의 동지들과 함께 민족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비밀결사 「우리들」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경제국대학 식물원에서 회합을 가지고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1단계 조처로 학생의 처지임을 감안하여 각자 전문분야에서 민족 지도원리의 연구에 노력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역사 분야를 담당하였다.
1941년 8월경에는 일시 귀국하여 전남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의 박석우 집에서 다시 회합을 열고 그 동안의 활동을 검토하면서 독립의식 앙양에 더욱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뒤 일본에 돌아가서도 이와 같은 회합을 수차에 걸쳐 갖고 독립결의를 다져 가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44년 10월 6일 산구(山口)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판결문(1944. 10. 6 산구지방재판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3집 7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