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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016
성명
한자 裵敏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3 훈격 애국장
1917. 3. 23 평남(平南) 평양(平壤)에서 장일환(張日煥)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조직, 동회(同會) 통신원 겸 서기에 임명되어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1919. 3. 10 함북(咸北) 성진(城津)에서 군중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9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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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평양(平壤)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7년 3월 장일환(張日煥)·백세빈(白世彬) 등 숭실학교 학생 및 기독교인 등 30여 명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서기 겸 통신원(通信員)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조선국민회는 박용만(朴容萬)이 지도하는 미주(美洲) 국민회(國民會) 등 해외 독립운동단체들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군자금을 모아 간도(間島)에 토지를 구입하여 그곳을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을 것을 목표로 하였다. 동년 6월에 그는 노덕순(盧德淳) 등과 함께 식지(食指)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血書)하고 국민회의 단결과 장래의 활동방침을 맹약하였다. 그러나 1918년 2월 일경에 조직이 발각되면서 다른 회원 24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함경북도 성진(城津)으로 이사한 그는 1919년 3월 초순 10여 인의 그 지방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그레이슨〔具禮善〕 목사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하여 성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키로 하고 거사 날짜를 3월 10일로 정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윽고 3월 10일 오전 10시, 그레이슨이 경영하는 제동병원(濟東病院) 앞 광장에 5천여 명의 읍민이 집결하여 선언문과 궐기사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다음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일경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투석전으로 맞서는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어쩔 줄 몰라 했고, 결국 나남(羅南)에 주둔하는 일본군 기병대의 지원 병력이 증파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성진에서의 만세시위는 함경북도 지방에서의 3·1독립운동을 촉발하는 뇌관 구실을 하였다.

이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 붙잡힌 그는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919년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9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10. 11 고등법원)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763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2권 490∼49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58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배민수 - 충북 청주(淸州) 성진군 성진면 3.1만세운동
본문
1896년 10월 8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사주면(四州面) 금천동(金川洞)에서 아버지 배창근(裵昌根)과 어머니 장희운(張喜云)의 독자로 태어났다. 배창근은 대한제국 군대 청주진위대(淸州鎭衛隊) 부교(副校)로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전쟁에 투신하여 그해 8월 일본군 2명을 처단하였다. 이 일로 1908년 여름 붙잡혀 교수형을 받고 사망하였다.아버지를 여읜 후, 청주의 양반 지주였던 외가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7세부터 3년간 한학 교육을 받았다. 이후 북장로회 선교사가 운영하는 청남기독교소학교에 입학하여 16세인 1912년까지 재학하였다.1913년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진학하였다. “조국과 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는 기독교 동료”를 사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교회나 성경독회·기도회 등 종교 집회와 스포츠·음악 활동 등 여가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학생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노덕순(盧德淳)·김지수(金智洙)·이보식(李輔植)·박인관(朴仁寬)·김형직(金亨稷) 등 선배들과 활동하였다. 1913년 여름 평양(平壤) 기자묘(箕子墓) 숲에서 김형직·노덕순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서하는 단지혈서서약(斷指血書誓約)을 하였다.1917년 3월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조선지회를 조직하여 통신원 겸 서기로 활동하였다. 조선지회는 하와이 국민회 지도자 박용만(朴容萬)의 지도에 따라 숭실중학 출신인 장일환(張日煥) 등 하와이국민회와 연계된 국내 청년과 만주의 백세빈(白世彬)이 주도한 비밀결사이다. 1917년 2월 김형직 등과 함께 지회 결성에 동의하여 조직을 결성하였다.조선지회가 설정한 당면 활동 목표는 곧 도래할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여 국내·미주·만주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고 간도에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지하조직망을 확대하고 연락사업과 선전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지회 활동으로 1918년 1월 2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틀 후 평양경찰서로 이송되어 장일환·백세빈·김병두(金炳斗) 등 동료 24명과 함께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1919년 2월 8일 풀려나 함경북도 성진(城津)으로 이동하였다. 성진에서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 욱정교회 목사 강학린(姜鶴麟) 등과 교류하였다. 그해 3월 성진지역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함께하였다. 강학린·서재영(徐在英)·김원배(金元培)·김성우(金聲宇)·이화선(李化善) 등 성진지역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제동병원(濟東病院)에서 수차례 회합을 가졌다. 3월 7일 그리어슨의 사택에서 회합을 갖고 만세운동 준비 작업을 서두르기로 합의하였다. 그리어슨 선교사 구내 주택에서 선언서와 격문 3만매를 인쇄하고, 10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3월 10일 오전 10시 제동병원 앞 광장에 5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선언서 낭독과 기도 및 연설이 있은 다음 강학린 등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 시위에 놀란 일제 경찰은 나남(羅南)의 일본군 기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3월 11일 다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이날은 경찰, 군인, 소방대 등 100여 명의 일제 군경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를 한 끝에 1명이 사망하고 9명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강학린을 비롯한 30여 명과 함께 끌려갔다.1919년 6월 28일 1심에서 이른바 소요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에 벌금 30원, 노역 30일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해 9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1923년 1월 독립운동 현황을 살피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4개월간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에 체류하며 독립운동의 최고기관과 방략을 논의하기 위해 해외 민족운동 진영이 총동원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참관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와 숭실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4년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로 진학하여 1928년 3월 졸업하였다. 숭실전문 재학 중 조만식(曺晩植)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193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31년 5월 21일 시카고(Chicago) 매코믹(McCormick)신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5월 4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33년 9월 장로교 총회 농촌부 사무국 초대 총무를 맡아 본격적으로 기독교 농촌운동을 전개하였고, 1934년 장로회 목사가 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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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10-11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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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산재 경기도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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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석 독립유공자 추모비 서울특별시 동작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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