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강원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당시 양양 지역 만세시위의 본산인 임천리에서 이교학(李敎學)·이교성(李敎聲)·조화벽(趙和璧) 등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꾀하고 동년 4월 4일 양양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4월 6일과 9일에도 시위에 참가하여 피검되었으나 학생임을 감안, 석방되었다.
1925년 9월에는 함북(咸北) 무산(茂山)에서 상해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박유덕(朴有德)과 회합, 국외망명을 기도하다가 피검되어 양양경찰서로 송치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후 박유덕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한 것에 연루·붙잡혀 1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1년에는 양양농민조합(襄陽農民組合)을 결성하여 소작쟁의 및 농촌계몽에 힘쓰다가 조합원 130여명과 함께 붙잡혀 1934년 6월 2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함흥형무소 가출옥보고서
- 동아일보(1933. 2. 10)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12·6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