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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768
성명
한자 盧炳禮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양양(襄陽) 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가담(加擔)하고 1931년 양양농민조합(襄陽農民組合)결성(結成)하여 소작쟁의(小作爭議)농촌 계몽(農村啓蒙) 등에 활약(活躍)하다가 피검(被檢)되어 징역 3년 언도(言渡)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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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강원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당시 양양 지역 만세시위의 본산인 임천리에서 이교학(李敎學)·이교성(李敎聲)·조화벽(趙和璧) 등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꾀하고 동년 4월 4일 양양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4월 6일과 9일에도 시위에 참가하여 피검되었으나 학생임을 감안, 석방되었다.

1925년 9월에는 함북(咸北) 무산(茂山)에서 상해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박유덕(朴有德)과 회합, 국외망명을 기도하다가 피검되어 양양경찰서로 송치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후 박유덕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한 것에 연루·붙잡혀 1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1년에는 양양농민조합(襄陽農民組合)을 결성하여 소작쟁의 및 농촌계몽에 힘쓰다가 조합원 130여명과 함께 붙잡혀 1934년 6월 2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함흥형무소 가출옥보고서
  • 동아일보(1933. 2. 10)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12·61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노병례 - 강원 양양(襄陽) 양양군 양양면 만세운동
본문
1903년 3월 18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서면(西面) 용천리龍(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양양군 양양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양양면의 만세운동 준비는 유림과 기독교인에 의해 1919년 3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유생 이석범(李錫範)이 1919년 3월 3일 서울에서 열린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면서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 왔다. 곧바로 자신이 거주하는 도천면 중도문리(中道門里)에서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능렬(李能烈)을 앞세워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또한 양양면 임천리(林泉里)로 건너와 이교완(李敎完)의 집에 머무르면서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때 최인식(崔寅植)이 이석범의 취지에 적극 동조하며 시위 조직에 나섰다. 기독교계는 양양감리교회(襄陽監理敎會) 청년부원 김필선(金弼善)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조영순 전도사의 딸이자 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 조화벽(趙和璧)이 3월 말 양양을 찾아와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김필선은 양양보통학교 8회 졸업생이자 평소 같이 교회를 다니던 친구인 김계호(金啓鎬)·김재구(金在龜)·김규용(金圭容)·김주호(金周鎬)·김봉운(金鳳運)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상여 보관처에 숨어 들어가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때 유림계를 중심으로 임천리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시위를 추진하였다.유림계와 기독교계가 연합으로 시위를 준비하면서 양양면과 이웃 서면에 마을마다 책임자를 두고 많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919년 4월 3일 군수 이동혁(李東赫)과 군청 직원 심운택(沈雲澤) 등 관리와 경찰들이 임천리를 급습하여 이석범 등 22명을 체포하였다. 태극기 374매도 압수되었다. 하지만 최인식·김필선·김재구·김규용·김계호 등은 검거를 피해 거마리(車馬里)에 있는 김종태(金鍾台)의 집에서 밤새 시위를 준비하였다.4월 4일은 양양 장날이었다. 양양면소재지로 들어오는 다섯 군데 길을 따라 장꾼과 함께 시위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때 구장인 노병우(盧炳禹)와 최명옥(崔明玉)이 이끄는 서면 용천리 시위대 앞에서 최선극(崔善極)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세워 들고 선두로 장터에 들어왔다. 점심때는 만세 군중이 더욱 불어나 4,000여 명에 달하였다. 오후에 시위 지도부와 경찰이 임천리에서 붙잡힌 22명의 석방 교섭을 하다가 손양면 가평리(柯坪里) 구장 함홍기(咸鴻基)가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난 시위대는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때려 부수었다. 경찰이 총을 쏘면서 권병연(權炳淵)과 김학구(金鶴九)가 사망하였다. 이후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붙잡혔으나, 학생 신분임이 감안되어 풀려났다.1927년 12월에 결성한 양양농민조합(襄陽農民組合)의 서무부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양양청년동맹(襄陽靑年同盟)과 신간회(新幹會) 양양지회에서도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2년 5월 5일 단오날을 기해 양양농민조합이 계획한 시위에 필요한 격문을 집에 숨겨두었다. 이 사실이 5월 1일에 발각되면서 100여 명이 넘는 조합원과 함께 붙잡혔다. 1934년 6월 2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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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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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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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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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양양 3·1운동 기념비 강원도 양양군
2 사당 충렬사 강원도 양양군
3 비석 양양 3·1만세운동 유적비 강원도 양양군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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