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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8332
성명
한자 元容八
이명 元容錫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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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05년 원주(原州), 횡성(橫城), 제천(堤川), 영월, 홍천 등지에서 격문(發)하여 천여명의 의병을 모집 왜적과 투쟁(鬪爭)하였고 초기의병에게도 여주(驪州) 심상희 의진(沈相禧義陣)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제천(堤川) 유인석 의진에서 중군책임자로 활약한 바 있으며 1907년 피체(被逮)되어 서울에서 심문(審問)하는 왜장(倭將)관원(官員)을 꾸짖고 일인(日人)이 주는 음식(飮食)을 거절하는 등 항거하다가 옥중 순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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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의진(義陣) : 의병의 군진. 의병 부대를 배치한 것.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북 제천군 한수면 서운 출신이다.

그는 1차·2차 의병전쟁에서 모두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1907년 순절한 인물이다. 1차 의병전쟁에서는 여주 의병장 심상희(沈相禧)의 후군장에 임명되어 여주 의진의 전세를 크게 뒷받침해 주었다. 당시 여주 의진은 경기도의 각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남한산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하는 연합전선이 구성되어 심상희가 그 여주대장이 되었다. 그것은 심상희의 여주 의병이 다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따로 지휘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적의 이간책으로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퇴한 뒤에 여주 의진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심상희는 다른 의병진과 화합, 협력하지 못하였던 듯하다. 1896년 2월(음) 장호원(長湖院)의 병참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원주를 거쳐 청풍으로 패퇴하였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여주진이 해산되자 원용팔은 일시 의암(毅菴) 진의 중군장(中軍將)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가 의암 진에 머문 것은 불과 보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 동안 거의 우기에 있었으며, 전투도 없었다. 그리고 의암의 의진은 처음부터 긴밀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출신 배경이 다른 원용팔이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후 을사조약이 있기 2개월 전인 1905년 9월 중순 경(음력 7월경)에 초기 의병 때 같이 의진에서 활약하던 회당 박정수(悔堂 朴貞洙) 등과 함께 재거사를 계획하고, 각처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집결시켰다.

그는 의거를 결정함과 함께 호남의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등 1차 의병전쟁 때의 각지 의병대장들에게도 글을 보내어 함께 일어날 것을 권고하였으며, 또 의암 유인석에게도 글을 올려 거의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현재의 불행한 형편으로 말한다면, 일본이 말로는 고문이라는 명색을 갖고 있지만, 나라의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니 소위 10부 대신이라는 것을 벌써 일본 정부로 화하여 버렸습니다.

들판을 태우는 큰 불길이 8도로 퍼져서 시골에 약간 남은 옛 풍속도 몇 날 안에 다 없어지게 되고, 소위 재판이니 세금을 받느니 하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새로 정한 약조(約條)가 1백60조나 된다고 하니, 무슨 흉모(兇謀)가 이렇게까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을 차례차례 실시하여 그들의 욕심을 채우고야 말게 되겠습니다.

이 시기의 형편이야말로 칼자루를 남에게 맡겨서 나를 죽이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산림 천택(山林川澤)을 점거하는 일이나, 호구를 등록하고 군대를 개혁하는 일같은 것을 제 마음대로 하고, 일찍이 우리를 나라로 보는 일이 없으니, 아 사람으로서야 이 모양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위의 글은 회당(悔堂) 박정수(朴貞洙)가 원용팔을 대신하여 쓴 글인 것으로 보인다.

또 그들은 격고문(檄告文) 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역적과 오랑캐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산림 천택을 다 점령하여 버리며, 재정과 토지를 그만 제 물건으로 만들었다.

왕실이 불탄 것 같으니 새 둥우리가 벌써 엎어졌는데 알이 온전할 리 없고, 흙집이 이미 기울어졌으니, 가죽이 남지 않았는데 털이 어디 붙어 있을 것이랴. 시랑(豺狼)이 우리 생민을 못 살게 구니 미운 것이 이 이상 없으며,

견양(犬洋)이 우리 예속(禮俗)을 더럽히니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듣고만 있을 것이랴. 사람마다 원·안(袁安)의 탄식이요, 채·애(蔡哀)의 곡성이로다.

심지어는 간악한 백성들을 깊이 맺고 악한 무리들을 널리 벌여 놓으니, 소위 일진회(一進會)라는 것이 어떤 난적(亂賊)의 무리인지,

만일 저들 하는 대로 버려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이하고서야 말 것이다. 또 고문(顧問)이라는 관직을 만들어서 지방관의 직책을 빼앗고, 8도에 가득차게 그 무리들의 앞잡이들을 배치하여 온 나라 안을 그물질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올가미를 씌운다.

요(堯)·순(舜)·우(禹)·탕(湯) 제왕(帝王)의 글은 끝내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끊어지고, 공(孔)·맹(孟)·정(程)·주(朱) 성현의 학문은 멸망의 참변을 당하고 말 것이니 이를 어찌하리오. 다시는 예전 조선의 전장법도(典章法度)가 아니오, 완전히 소일본(小日本)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뱀과 돼지가 겹쳐 다가드니 화가 우리나라에서 시작하는데, 물과 불이 깊어만 가니 운수를 어찌 하리오. 의(義)를 바로하면 이(利)가 그 안에 있는 것이오,

오랑캐로 변하면 사는 것이 죽음만 못한 것이다. 사람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요, 난이 극한에 가면 다스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문을 열고 도적을 들인 무리가 아니면 그 뉘라서 저들의 고기를 먹으며 가죽을 깔고 잘 생각이 없을 것인가···

아 인재를 다른 데서 빌어 오지 않아도 될 것이니, 스스로 너무 겸손하지 말고 사람마다 각각 당연한 일로 보아서 맹세코 이 환란을 건지기로 하자.

이렇게 충정을 다하여 포고한 후에도, 만일 의리를 모르고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역적의 당파를 먼저 베는 벌을 받을 것이요,

털끝만큼도 용서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위로는 조정 신사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깊이 명심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지어다.'

이상에서 본 바 원용팔의 의거 취지는 많은 친지·지사 및 민중들의 공명(共鳴)을 얻었으며, 격고문이 각 고을에 돌려짐과 함께 제천(堤川)·청풍(靑風)·횡성(橫城)·홍천(洪川) 일대에 걸친 충청북도와 강원도 지역이 모두 호응하게 되었으며, 원주(原州)의 동쪽 주천(酒泉) 지방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모여드는 장병들이 1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용팔 등은 직접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장병들을 모아 편성, 훈련하면서 좀 더 유능하고 신망 있는 인물을 맞이하여 주장(主將)으로 받들 것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가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원주 진위대에 출동을 명령하였으며, 원주 진위대의 김귀현(金貴鉉)은 의병대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는 것을 기화(奇貨)로 삼아서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을 시켜 의병진의 와해공작(瓦解工作)을 하고, 일부의 장병들이 흩어지는 기회를 이용하여 습격, 원용팔을 추적하여 횡성에서 체포하게 되니, 의병진은 애석하게도 해산되고 말았다.

체포된 다음에도 원용팔은 종전의 기개와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심문하는 왜장이나 관원들을 꾸짖고 타일렀으며, 일인들이 주는 음식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인 사령관 장곡천(長谷川)의 심문을 받았는데, 장곡천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만 하면 이 자리에서 놓아주겠다.'

고 하니, 그는 태연자약하게도

'동대문 밖에만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대답하였으며, 또,

'누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겠는가?'

고 물으니,

'호응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 사람들과 같이 하고, 집안 사람들도 호응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 하겠다.'

고 대답하여 대한 남아의 불굴의 의기를 보여 주었으며, 이듬해 1907년 3월에 옥중에서 병사 순국하고 말았다.

이때 원용팔·박정수 등이 거의하다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정운경(鄭雲慶)은 이규석(李奎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함께 단양으로 가 급히 군사를 모집하여 며칠 안에 삼사백 명을 소집할 수 있었으나 역시 체포되어 군부(軍部)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처럼 원용팔의 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감명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342, 372면
  • 황성신문 (1898. 3. 8)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33, 335, 337, 33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575, 577, 84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원용팔 초명 : 용석(容錫), 자 : 복여(復汝), 호 : 삼계(三戒) 충북 제천 -
본문
1862년 2월 17일 부친 원도상(元度常)과 모친 남원양씨(南原梁氏) 사이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강원도(江原道) 원주군(原州郡) 지내면(池內面) 가정리(稼亭里, 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가정리) 출신이다. 본관은 원주원씨(原州元氏)이고 초명은 용석(容錫)이며 자는 복여(復汝), 호는 삼계(三戒)이다. 1887년 무과에 급제하고, 1891년 선전관이 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학통은 화서학파로 지평(砥平)에 거주하는 이근원(李根元)으로부터 화서학파의 학문을 받아들였다. 이후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었다.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1896년 1월 여주(驪州)에서 봉기한 심상희(沈相禧) 의병부대의 후군장(後軍將)으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경기도의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 의병부대 등과 연합하여 남한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적의 이간책으로 연합의병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후 같은 해 3월에 이천(利川) 장호원(長湖院)의 병참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원주를 거쳐 청풍(淸風, 현 제천시 청풍면)으로 패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좌의병부대와 가흥(佳興)전투를 추진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여주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던 심상희 의병부대가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상황에서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선유문(宣諭文)을 받고 해산하자, 유인석의 호좌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호좌의병부대의 상황 변화 등에 의해 보름 남짓 활동하다가 여주로 돌아왔다.그 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유인석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의병봉기의 이유로 첫째, 일제가 고문관(顧問官)이라는 명목으로 국권을 빼앗아 대한제국 정부의 10부(部)를 무력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구래의 조선적 전통도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특히,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으로 작성된 116조항을 통해 대한제국의 재판권, 조세권 등이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게 될 위기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둘째, 일반 백성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산림천택(山林川澤)에 대해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통해 장악하고자 하였고, 호구 등록이나 군대 개혁 등도 자신들의 침략 정책에 맞게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에 1905년 8월 중순 을미의병을 함께 했던 박정수(朴貞洙) 등과 의병 봉기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각지의 의병과 연계하고자 호남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해서(海西), 관서(關西) 등지에 있는 화서학파 동문 등 전국 각지에 격고문(檄告文)을 보내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격고문에서 일제에 의해 시도되었던 황무지개척권 요구와 역둔토 정리 문제를 타개할 것, 대한제국의 내치행정을 장악한 고문정치를 타개할 것, 일제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해주고 있는 일진회를 타개할 것을 의병봉기의 목적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격고문을 각지에 돌려 의병봉기를 호소한 것은 의병운동방략의 차원에 이루어진 것으로, 의병이 서로 연계하여 전국을 의병운동으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고자 하였고, 몰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일본이 추진하던 각종 침략 정책을 늦출 수 있어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또한 다양한 세력, 다양한 지역과 연합하고자 하면서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도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는 무장투쟁의 새로운 모색이었다. 강원도, 충청도 일대를 이동하면서 포군을 모집하였지만 이들만으로 일본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병운동 초기부터 의병 소모와 의병 거점지역을 확보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정규군인 원주진위대를 무력 기반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대한제국 정규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게 되는 것으로 의병운동을 의병전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었다.원주진위대와 연합을 위해 의병부대가 평창에 주둔했을 때 원주로 들어가 10여 일 동안 비밀리에 협의를 하였다. 원주진위대 중대장이었던 김귀현(金貴鉉)은 “군대와 민간이 하나로 합친다면 의병을 일으켜 도모할 가망이 있다”라고 하여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헌병대의 개입·협박에 원주진위대는 방침을 바꿔 의병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한편, 연합의병을 추진하는 일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격문·서신 등을 통한 의병 지원 요청이었다. 당시 의병부대의 전력만으로는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었고, 일제에 실질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서구 열강의 지지와 지원을 받고자 하였다. 따라서 일본에 의해 왜곡된 침략의 상황과 의병 봉기의 원인, 목적, 필요성, 정당성 등을 기재한 서신을 각국 공사관에 보냈다. 일제가 국권을 독점하고 나라 전체를 전제하여 대한제국의 물산과 민용(民用)을 모두 강탈하여 우리 백성들은 의식할 것이 없고, 주거할 곳이 없어서 의지하여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이러한 현실 속에서 누구라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고 분연히 죽기를 각오하고 의(義)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굶어 죽으니 차라리 일제에 대항하여 의병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제의 노예가 되어 짓밟히는 것보다 의병으로 싸워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의병들은 성훈(聖訓)을 받들어 국가를 위하고 공의(公議)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하여 서구열강의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하였다.서구 열강의 도움을 받고자할 때 단순히 대한제국의 침략만을 문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침략성이 대한제국을 넘어 서구 열강에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논리는 대한제국을 침략한 일제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구 열강에 대한 침략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불법적인 침탈에 대해 경계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지지 성명뿐만 아니라 출병 등의 실질적인 무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서구 열강뿐만 아니라 청국 공사관에도 서신을 보내 의병봉기의 원인, 목적, 정당성 등을 밝히고 있었다. 이때 청국에는 서구 열강에 요청한 것과는 달리 대한제국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대한제국이 그동안 청국의 울타리가 되어 일제의 침략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무너지면 청국의 랴오둥(遼東), 선양(瀋陽)은 물론이거니와 수도인 베이징(北京)도 일제의 침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청국은 자국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대한제국을 도와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와 함께 고종과 정부에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고종이나 정부에 올린 상소문에서는 일제의 침탈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의병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정당성을 밝히면서 의병운동에 대한 황제와 정부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하였다.일본 공사관과 일진회에게도 서신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한 비판과 스스로 물러나기를 촉구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의병을 그만둘 수 없으니 서로 각자의 영토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진회에 보낸 효유문에서는 수일 내로 해산하여 옛 제도를 따르고 본업으로 돌아와, 일제를 원수로 여긴다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드러나는 대로 잡아서 죽일 것이니 의병이 일반 백성에게 재앙을 미친다고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의병 봉기는 원주 주천(酒泉, 현 영월군 주천면)에서 시작되었다. 주천 방면에는 원주지역 화서학파의 근거지로 화서학파 동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의병 봉기를 논의하고 세를 규합하기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지역경제의 중심지로서 의병운동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화서학파 동문들을 규합하여 의병 봉기를 준비하면서 의병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포군 등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데 노력하였다. 우선, 원주 주천의 금마둔(金馬屯)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에서 박 부자집으로 불리는 박수창(朴受昌)을 찾아가 의병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의병에 필요한 군자금을 비롯하여 화포, 나귀 등의 군수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또 포수 등의 인적 자원에 대한 지원도 약속받았다.의병봉기를 위한 준비 작업을 어느 정도 마쳤을 때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성공을 기원하였다. 드디어 1905년 8월 16일 원주 풍정(楓亭)에서 종제인 원용수(元容銖)·채순묵(蔡淳默)·김낙중(金洛中), 박수창이 보낸 포수 최병덕(崔炳德)·정재식(鄭在植) 등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중군에 김낙중, 좌총독장(左總督將)에 최병덕, 우총독장(右總督將)에 정재식을 각각 임명하고 의병부대를 출범시켰다. 풍정에서 출범한 후 주천, 신림 일대의 소모활동으로 포군 수십 명을 모집하고 바로 의병봉기의 뜻을 같이한 정운경(鄭雲慶)·이구영(李九永)·장익환(張益煥)·이규현(李奎顯)·지원영(池源永) 등과 연합하기 위해 단양, 영춘 방면으로 이동하였다.1905년 8월 19일 단양(丹陽), 영춘(永春, 현 단양군 영춘면) 지방으로 들어온 후 격문을 발표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의병봉기의 뜻을 같이한 정운경·이구영·장익환·이규현·지원영 등과 단양에서 회합하였다. 단양은 일찍이 향약을 설치하여 도적에 대비한 포군조직이 있었는데, 이를 의병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4일에는 단양에서 사방에 파수꾼을 세우고 각 동리의 포수(砲手)를 모집하였는데, 이에 응하지 않고 도망가는 이들이 나오자 병사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하고 위세를 크게 떨치게 하였다.단양에서 성공리에 소모 활동을 마친 이후 영춘으로 이동하였다. 영춘으로 이동한 의병부대는 계속적인 소모 활동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450여 명으로 크게 증가한 병력에 대한 정비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전군장(前軍將)에 영춘 사람 이정의(李正義)를 임명하고, 영춘을 다스릴 수성장(守城將)에는 정운경을 임명하는 등 부대 정비에 전념하였다. 이는 주천에서 봉기한 이후 처음으로 의병부대를 정비한 것으로 확대된 부대에 걸맞게 전군장 등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조직을 개편하였다. 또 해당 지역에서 의병에 가담한 인물 중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에게 수성장, 파수장 등의 직책을 임명하였다.영춘에서 의병부대 정비를 마친 후 부대를 영월로 이동시키고, 직할부대를 이끌고 1905년 8월 26일 영춘군 이청(吏廳)에 주둔하였다. 이어 포군 30여 명과 종사 수십 명을 이끌고 소모활동을 전개하여 외촌포군(外村砲軍) 10여 명을 의병에 합류시킬 수 있었다. 영춘에서 소모 활동을 마친 8월 27일에 1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강(東江) 건너편 덕포점(德浦店, 현 영월군 영월읍 덕포리)에 임시로 주둔하고 영월읍내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날 저녁 8시 임시주둔지를 출발하여 영월읍내로 진격해 격문을 발표하고 영월군수 김선규(金善圭)에게 협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동강 양안(兩岸)을 점거하고 주요 교통로를 통제하였다. 이후 영월에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중 200명은 소모 활동을 위해 청풍으로 이동하였다.영월에 주둔한 후 영춘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기존 조직에 추가로 영월수성장, 영월소모장, 영월파수장 등의 직(職)을 만들었다. 이어 마차(磨溠, 현 영월군 북면 마차리)로 이동하였다. 그 곳에서 의병에 가담한 윤덕배(尹德培), 김경로(金敬魯)를 영월파수장에, 신식 군인 출신의 김영두(金盈斗), 양한용(梁漢用)을 교련장에 임명하여 의병을 신식 군대에 맞게 교육·훈련시켰다.영월에서 재정비한 후 계속된 소모 활동과 배후지 확보를 위해 정선(旌善)으로 이동하였다. 정선에서도 소모된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영춘에서 참모종사로 참여한 엄기섭(嚴基燮)을 선봉장(先鋒將)으로, 김상호(金尙鎬)를 후군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소모총독, 수성장, 소모장, 파수장, 참모종사 등 의병부대의 재정비와 함께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정선수성장 전세하(全世河), 참모종사 고창학(高昌學) 등이 군자금 1,300여 원을 만들어 제공하였다.정선에서 소모 활동을 마친 후 평창(平昌)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단양의 이규현(李奎顯)·어성선(魚性善)·김재연(金在淵) 등이 따라 도착하였다. 평창에서는 을미의병 당시 좌익장을 맡았던 우필규(禹弼圭)를 수성장으로 임명하였다. 평창에서 의병부대를 재정비한 후 본대를 강릉 방면으로 이동시키고 원주진위대와 연합할 목적으로 원주로 이동하여 10여 일 동안 비밀리에 협상에 들어갔다.한편, 강릉(江陵)방면으로 이동한 본대는 봉평(蓬坪, 현 평창군 봉평면)에 도착하여 의병소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곳에서 추성구(秋性求)·천낙구(千洛龜)·배진환(裵縉煥) 등이 가담하였고, 이들은 모두 참모종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단양의 장익환(張益煥)을 좌군장에 임명하였고, 우군장에는 원주의 원세흠(元世欽)을 임명하였다. 이어 봉평을 떠나 1905년 9월 20일 밤 홍천군(洪川郡) 서석면(瑞石面) 검산리(儉山里)로 들어와 주둔하고 다음날 같은 군 서석면 풍암리(豊巖里)로 이동하였다. 홍천에 들어온 후 마찬가지로 소모 활동을 전개하였다.의병 소모 활동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관할지역 내 일제의 침략기구나 친일세력에 대한 공격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충주출장소 체신부 서백순(徐百順)이 한때 억류되었으며, 영월우체소 임시주사가 처형되었다.한편, 원용팔 의병부대와 연합을 도모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진압작전을 진행하던 원주진위대는 일본군 헌병대의 개입가능 소식에 진압태도를 변경하였다. 일본군 헌병대가 직접 진압에 나서면 의병 출몰 지역의 마을은 초토화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원주진위대는 의병장 체포라는 선에서 마무리할 계획으로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1905년 9월 24일 원주의 궁곡(弓谷, 현 원주시 지정면 판대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원주진위대 소속 병사 둘이 친지를 찾는다고 찾아와 묵으면서 의병부대 내부 사정을 정탐하였다. 다음날 새벽 원주진위대는 의병부대 후방을 공격해왔다. 이에 의병부대를 빠르게 이동시켰지만, 이동하지 않고 호위병 10여 명과 함께 원주진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주진위대 김귀현(金貴鉉)의 부대와 일진회원의 합동 작전으로 정수달(鄭秀達)에게 붙잡혔다.붙잡힌 이후, 원주 유생들을 중심으로 다방면에서 석방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법부(法部)에서는 보통재판소의 범인으로 취급하여 조사하였다. 투옥된 이후 옥중에서 신법(新法)이 더럽다 하여 조식(粗食)을 먹지 않아서 영양결핍에 이르기도 하였다. 결국 1906년 3월 7일 전염병에 감염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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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산재 경기도 여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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