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충북 괴산(槐山) 지역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부원(宣傳部員)과 의열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우민은 1919년 4월 경 충북 괴산군 오천(吾川)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괴산경찰서에서 태(笞) 90도를 받는 고초를 겪은 후, 1919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20년 5월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주로 선전부원(宣傳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중국 관내 지역의 호북성(湖北省)·호남성(湖南省)·광동성(廣東省)·광서성(廣西省) 등지에서 한국인들을 동지로 규합하거나 중국인을 상대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의 지지 기반을 확충하는데 힘을 쏟았다.
1921년에는 중국인과 연계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기 위해 장사(長沙)에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고 경제부 주임을 맡았다. 중한호조사 결성은 중국인에게 한국독립운동을 이해시키는 선전외교활동의 일환이었다.
1922년 9월 경 천진과 북경 일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한국인 독립운동가 조중구(趙重九)·장승조(張承祚)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육영학교(育英學校)의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23년 9월에는 당시 북경에 머물고 있던 다물단 단장 황해관(黃海觀)을 만나 다물단에 입단하였다.
무장투쟁을 행동강령으로 내세웠던 다물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그는 다물단에서 정보공작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천진의 일본인 주거지역에 거주하면서 일본 관헌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다물단 동지들간의 연락을 담당하고 무기 구입과 같은 지원활동도 벌였다.
그리고 1924년 7월 다물단의 동지인 김대지(金大池)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의열단 통신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의열단이 활동의 근거지를 중국 상해와 광동(廣東)지역으로 이동한 뒤에도 천진 일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6년 4월 동지 유세관(柳世觀) 등과 함께 천진의 조선인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교단(韓僑團)을 조직하였다. 한교단은 비밀유지를 위하여 겉으로는 친목단체를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다물단과 의열단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운동단체였다.
1926년 5월 경, 그는 나석주(羅錫疇) 의사가 투탄의거를 위해 국내에 들어 갈 때, 동지 박세훈(朴世勳) 등과 함께 거사 자금 및 의거에 필요한 권총과 폭탄 등을 지원하였다.
이렇듯 천진 일대에서 의열단의 의거를 지원하며 활동하던 중 1930년 7월 경 일경에 붙잡혀, 1931년 4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388面
-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157·158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63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474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30輯 53∼151面
- 南光(南鮮電氣株式會社, 1961) 창간호 76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