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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673
성명
한자 權在衡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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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18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장날에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거사(擧事)하기 위하여 (大)(小)태극기(太極旗)제작(製作)한 후 당일(當日)「장터」에 모인 3,000여명(餘名)시위 군중(示威群衆)선도(先導)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 연창(連唱)하면서 시장부근(市場附近)을 누비며 시위(示威)하다 영해 경찰주재소(寧海警察駐在所)로 몰려가서 일인 순사(日人巡査)한인 순사보(韓人巡査補) 등을 구타(毆打)하며 제복(制服) 제모(制帽)등을 탈취(奪取)하고 주재소(駐在所) 건물(建物) 집기(什器) 등을 파괴(破壞) 훼손(毁損)하는 한편 영해공립보통학교(寧海公立普通學校)교사(敎師) 학생(學生)들에게 시위동참(示威同參) 등을 권고(勸告)하며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4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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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창수면 창수동(蒼水面蒼水洞)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는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이현설(李鉉卨) 등과 함께 영해읍(寧海邑)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영해로 가던 도중 창수동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는데, 때마침 이곳은 도로공사로 인해 일제에게 전답을 수탈당한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위군중의 수는 곧 1백 5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여 오후 4시경에는 창수 경찰주재소에 이르렀는데, 군중은 4백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객사 및 주임순사 고목이삼랑(高木伊三郞)의 숙소와 소유물,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의 비품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탈취하여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식기까지도 완전 파기하고, 오후 7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이 시작될 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5 대구지방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3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재형 중보(重宝) 경상북도 영덕(盈德) 창수면 3.1운동
본문
1872년 9월 17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동(新里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중보(重宝)라고도 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신리동 동민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이현설(李鉉卨) 등과 함께 영해면(寧海面) 성내(城內)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참여하려고 영해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창수면 신기동(新基洞)에서 영양군(英陽郡)의 이종구(李鍾龜)가 규합한 창수면 오촌동(梧村洞)과 삼계동(三溪洞) 주민 10여 명과 만났다. 이들은 지금 영해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창수면 창수동으로 가서 만세 시위를 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먼저 신기동 마을로 들어가 군중을 모았다. 당시 신기동 주민들은 도로 공사로 전답을 수용당해 울분에 차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시위대에 가담하면서 숫자는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창수동으로 이동하는 동안 계속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약 400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선두에서 이들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창수면주재소(蒼水面駐在所)를 향해 갔다. 그러나 주재소 경찰들은 전날인 3월 18일 영해와 병곡 주재소 및 면사무소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만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시위대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주재소에 이르렀다. 이현우·이현설 등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사무실 건물·기기·공문 서류 등을 파손하고, 객실과 일본인 주임순사 숙소까지 들어가 닥치는 대로 집기를 부수고 총기 2정, 대검 3자루 등 무기류까지 파기하였다. 이에 놀란 경찰은 모두 황급히 도주하였다. 주재소를 장악한 뒤 오후 7시경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른 후 자진 해산하였다. 곧이어 시위를 진압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일본군 1개 분대 6명이 출동하였으나 시위 군중이 해산한 뒤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징역 4년 대구지방법원 1919-06-05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영덕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영해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경상북도 영덕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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