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창수면 창수동(蒼水面蒼水洞)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는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이현설(李鉉卨) 등과 함께 영해읍(寧海邑)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영해로 가던 도중 창수동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는데, 때마침 이곳은 도로공사로 인해 일제에게 전답을 수탈당한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위군중의 수는 곧 1백 5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여 오후 4시경에는 창수 경찰주재소에 이르렀는데, 군중은 4백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객사 및 주임순사 고목이삼랑(高木伊三郞)의 숙소와 소유물, 조선인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의 비품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장총 3정과 대검 2개를 탈취하여 파기한 후 일본인 순사의 가구·의류·식기까지도 완전 파기하고, 오후 7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이 시작될 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6. 5 대구지방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