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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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의성(義城) 사람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의성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려 의병장이 되었다. 거의한지 8일만에 구성산(九城山)전투에서 20여명, 청송(靑松)전투·감은(甘隱)전투에서 7명, 산운천변(山雲川邊)전투에서 5명의 왜적을 사살하였다. 한편 같은 의성 출신인 김하락(金河洛)이 조승학(趙承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는데, 관군에게 몰려서 제천·단양·안동 등지로 의진을 옮겨 투쟁을 하다가 의성에 이르렀다. 이때 김하락은 구연영과 더불어 의성 의진의 김상종을 찾아와 합진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김상종은 그들과 함께 적을 토벌할 계획을 협의하고 적과 접전을 꾀하였다. 그 즈음 의성 주변에서는 안동부 의병진의 김도화(金道和)·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진보(眞 )의 허 훈(許薰)·선성(宣城)의 이인화(李仁和) 그리고 김상종의 의진이 서로 호응하여 유기적인 전략을 전개할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자 영남지방에서 사림(士林)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운동을 재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에 중심인물은 전기 의병장들이 주축이 되었다. 특히 김상종과 김도현이 앞장서서 주선하고 선성(宣城)에 모여서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서울에 올라가 대궐 문 앞에 나가 울부짖으며 상소하여 결사투쟁하기로' 결의하고 길을 떠났다. 이 때 경상도의 의기 있는 유림들은 서울에서 상소항쟁함과 아울러 각 도에 격고문(檄告文)을 돌리고, 서양 각국에 포고하는 글을 발송하며, 역적들의 처단과 매국 조약의 무효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그 이후 김상종의 활약상에 대하여는 전해지는 바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60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284·3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