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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51
성명
한자 金相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1942년 대구시(大邱市) 대구공립상업학교(大邱公立商業學校)에서 이상호(李相虎), 서상교(徐相敎)등과 더불어 독립운동단체인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여 위선(爲先), 군사(軍事), 문화(文化), 경제면(經濟面)의 독립을 목표(目標)로 국민의 여론(輿論)을 일으키려 하다.

2. (團)최고간부(最高幹部)일인(一人)으로 관방국장(官房局長)이었으며 1943년 5월 25일 피검(被檢)되어 단기(短期) 5년, 장기(長期) 7년의 언도를 받고 인천형무소(仁川刑務所)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해방으로 출옥하다.

(대구시보(大邱時報) 1945. 12. 12 대구경고(大邱警高) 3291(號), 1943년 6월 15일, 대구지법검사국 공판청구서(大邱地法檢事局公判請求書) 1943년 (刑) 1312(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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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대구(大邱) 사람이다.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2년 5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서상교(徐尙敎)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태극단이란 명칭은 한말이래 사용되어온 태극기를 상징하여 정한 것이며, 동 결사의 약칭으로 t.k.d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무렵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가혹하게 했으나, 그와 동지들은 일본군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4월에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윤삼용(尹三龍) 등을 동지로 포섭하였으며 계속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을 포함하여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으며, 그와 간부들은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 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군사부(軍事部)·항공부(航空部) 등 10여부(部)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관방국장의 일을 맡아 태극단의 일반사무 및 활동을 관장하였다. 한편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도중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83·78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35·836·839·843·844·845·84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상길 호 : 민곡(旼谷) 경상북도 대구(大邱) -
본문
1926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남산정(南山町)에서 출생하였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2동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호는 민곡(旼谷)이다. 경북 문경·달성·경주 등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후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나온 후 대구공립상업학교(大邱公立商業學校)에 입학하여 5학년에 재학하던 1942년 5월, 동교생 이상호(李相虎)·서상교(徐尙敎) 등과 함께 항일 학생 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태극단이란 명칭은 태극기를 상징하여 정한 것이며, 약칭으로 T.K.D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민족의 이상적인 단결과 능률로서 당면 최대 목적인 한국 독립을 도모하여 투쟁할 것이며, 그 종국의 목적은 전 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자유·평등을 찾는 데 있다”라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우리 청소년들은 일본 군대에 입대하지 말고, 그들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독립투쟁에 참여하자”라는 문서를 돌리며 단원들을 규합하였다. 동지들과 일본군 입대 반대 등 침략 정책에 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는 한편, 뜻을 같이할 학생들을 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43년 4월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윤삼용(尹三龍) 등이 입단하였다. 이에 이들은 학교 단위로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1943년 5월 초까지 태극단의 뜻에 동조하는 학생이 20여 명에 이르자, 이들은 5월 9일 대구 앞산에서 태극단의 결성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단원들의 참석이 저조하여 정식 결성식은 무산되었으며, 6월 6일 다시 결성식을 갖기로 하고 태극단의 구체적 투쟁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단장에는 이상호가 추대되었다.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과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일반조직은 단원들의 정신과 체력 단련을 총괄하는 육성부(育成府)를 두고, 그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을 두었다. 그리고 3국 아래에는 군사부(軍事部)·항공부(航空部) 등 10여 개 부(部)를 두었다. 특수조직으로 건아대(健兒隊)를 두었는데, 건아대는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관방국장과 군사부장을 겸하였다. 관방국장은 태극단의 일반사무 및 활동을 관장하는 역할이었다. 단원들과 함께 조직을 정비한 뒤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려고 준비에 나섰다. 만약 국내에서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를 위해 용두산(龍頭山)·비슬산 등에서 학술연구토론회와 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단원들의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 더불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 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6월 결성 2주 만에 단원의 밀고로 26명 모두 붙잡혔다. 학교에서 수업 도중 붙잡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 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광복 후 해군에 입대하여 1963년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 1969년 해군사관학교 교장, 1971년 한국함대 사령관으로 재직하였다. 1972년 소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80년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018년 4월 22일 사망하였고, 유해는 대한민국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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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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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대구광역시 달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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