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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159
성명
한자 李鳳羲
이명 李相熙, 李相勳, 李啓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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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독립장
1911. 1월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정착(定着)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 건설(建設)주력(主力)하여 1914년에는 유하현(柳河縣)교육기관(敎育機關)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교장(校長)역임(歷任)하며 인재양성(人材養成)기여(寄與)했고, 1915년 재만(在滿) ‘광복단’(光復團)으로,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창설요원(創設要員)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1920년에는 ‘광복단’(光復團)서간도 지역(西間島地域) 외교관(外交官)으로 농토 개척 허가(農土開拓許可)를 얻어내고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유격 활동(遊擊活動)으로 항일 전쟁(抗日戰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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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5년 이상룡(李相龍)·박경종(朴慶鍾) 등과 함께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위한 기지건설을 도모하였으나 동지들의 순국으로 무위로 돌아갔다고 한다.

1908년 2월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결성하고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에 참여하여 구국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1911년 1월 중국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에 정착하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건설에 주력하였고 1914년 유하현에 소재한 구국교육기관인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다.

1915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농작지도 등을 통하여 간도(間島)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고 한다.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창설요원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인 1920년에는 광복단의 서간도지역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정부 등과 교섭하여 농토개척에 대한 허가를 얻어내었으며 화룡현(和龍縣)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247·248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75面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 警務局) 30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131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봉희 자 : 덕초(德初), 호 : 척서(尺西), 이명 : 상훈(相勳), 계동(啓東), 상희(相熙), 경식(京植), 기동(基東) 경북 안동 -
본문
1868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안동부(安東府) 동후면(東後面) 도곡동(道谷洞, 현 안동시 와룡면 도곡리)에서 아버지 이승목(李承穆)과 어머니 안동 권씨(權氏)사이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字)는 덕초(德初), 호는 척서(尺西), 이명은 상훈(相勳)·계동(啓東)·상희(相熙)·경식(京植)·기동(基東)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맏형은 서간도(西間島) 독립운동기지 개척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고, 아들 이광민(李光民)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정의부(正義府)·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등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9명의 건국훈장 수여자를 낸 독립운동계 명문 집안의 일원이다.1873년 만 5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맏형 이상룡을 부모처럼 믿고 의지하며 성장하였다. 이상룡은 종갓집의 장손이었지만 집안일에만 연연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집권 세력을 겁박하며 침투해 온 일제는 마침내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을 실시해 한국인의 혼(魂)을 뺏고자 하였다. 이어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강압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갔다.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이상룡은 가야산(伽倻山)에 의병 진지를 구축해 장기 항전에 돌입하고자 했다. 이 때 형의 지시를 받아 차성충(車晟忠) 등 동지들과 이 일을 추진하였다. 1905년 전후 시작된 이 사업은 190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진지가 구축된 이듬해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장정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사업이 어느 정도 추진된 시점에 밀고자가 생겨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자금을 낭비하고 희생자만 낸 채 진지구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907년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寅植) 등 안동지역 혁신유림들은 힘을 모아 신교육기관 설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침략자 일제와 겨룰 수 있는 합리적인 신지식을 2세들에게 교육시켜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형인 이상룡이 적극 찬동해 설립 자금을 지원하자 혁신유림들과 힘을 합해 실무적인 일에 뛰어 들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07년 안동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협동학교(協東學校)가 설립되었다.1909년 초에는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설립해 활동하였다. 이 사업 또한 형 이상룡이 서울 본회와 연결해 설립한 것이지만 실무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신분이나 연령·지위 등에 제한을 두지 않고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또 모든 회원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안동지회의 방침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유림과 양반 세력이 강했던 안동지역에서는 많은 반발을 가져왔다. 따라서 회원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따랐고, 그럴수록 실무적인 일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날이 갈수록 범위를 확대해 침략해 오는 일제에 맞서기 위해 이같이 노력했으나,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모든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망국을 맞아 이상룡 일가는 서간도 망명 계획을 세우고, 1911년 1월 5일 가산을 정리해 고향을 떠났다. 그 또한 16살, 8살 먹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서간도 류허현(柳河縣)으로 향하였다.신의주(新義州)에서 압록강을 넘어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에 당도해, 압록강변을 따라 콴뎬현(寬甸縣)·화이런현(懷仁縣)·지안현(輯安縣)을 거쳐 류허현 삼원보(三源浦)에 도착했다. 먼저 와있던 신민회(新民會)회원들인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일가 및 이동녕(李東寧) 등과 힘을 합해 국내에서 한인들을 이주시키는 것과 동시에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 해 4월 한인 사회가 어느 정도 형성되자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치하고 이상룡을 사장으로 추대하였다.이같이 시작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 작업은 단 1년 만에 큰 시련에 부딪쳤다. 혹독한 만주의 추위를 견디지 못해 동사자가 생겼고, 풍토병에 걸려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것이다.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고심 끝에 합니하(哈泥河)라는 큰 강이 흐르는 류허현 남쪽의 퉁화현(通化縣)으로 옮겼다. 이후 퉁화현과 류허현을 함께 독립운동기지로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독립운동기지 건설 초기 이 험난한 과정에서 형 이상룡을 도와 한인사회를 안정시키고, 가산을 정리해 가져온 돈으로 한인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할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4년 1월에는 베이징(北京)에 머무르고 있는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를 찾아가 대규모 한인농장 건설 문제를 상의했다. 북만주 밀산(密山)을 독립운동기지로 건설한 이승희는 그 시기 펑톈성(奉天省)에 또 하나의 대규모 한인촌 및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같은 해 (음)5월에는 하이룽현(海龍縣) 이상룡의 집에 동지들과 함께 모여 다수의 한인을 국내에서 이주시키고,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대토지를 구입할 자금확보를 논의하였다. 하이룽현은 류허현의 북쪽 방향에 접해 있는 지역으로 민족운동자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삼원보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시기 이상룡은 하이룽현에 거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이상룡을 비롯하여 권종철(權鍾喆)·정승철(鄭承喆)·김동삼·박경종(朴慶鍾, 이봉희 형제의 막내 매제)과 함께 참석하였다. 고성 이씨 대종가인 그의 문중 재산은 망명 당시 상당량을 팔았고, 그 이후에도 이상룡의 아들인 이준형(李濬衡)과 막내 매제 권종철(權鍾哲)이 안동을 오가며 팔아 독립운동기지 건설 자금으로 사용했음으로 이제 고향에 남아있는 것은 선산과 종가 저택인 임청각(臨淸閣) 정도였다.따라서 견고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금줄을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민중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정감록의 주인공 정해일(鄭海日)을 서간도로 데려오면,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주할 것이고, 자금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실제 정해일과는 오랜 지기였다. 이 목적을 위해 박경종과 집안의 당숙인 이승화(李承和)가 국내에 파견되어 정해일과 연락을 취하며 노력하였다. 이같은 계획에 정해일도 동조하였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웠다.견고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활동과 함께 기왕에 확보해 개발한 농지의 수확률을 높이기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밭농사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수전(水田)농사는 해본 경험이 없어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중국인들이 탐내지 않는 물길과 접한 습지는 토지가격이 아주 저렴하였다. 고국에서부터 수전농사를 지어온 한인들은 이런 저렴한 습지를 구입해 벼를 재배하였다. 그런데 한국과 기후와 일조량이 다른 만주에서의 쌀 수확률은 월등히 저조하였다. 그 해결 방법을 종자의 선택에서 찾은 이상룡은 홋카이도(北海道) 볍씨를 구해 파종하여 소출을 증대시켰다. 방법을 찾게 되자 홋카이도 볍씨를 각 한인 마을에 보급하고, 파종법을 지도하는데 앞장서 활동하였다.1914년 9월부터는 류허현에 개교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교장에 선임되어 민족교육을 이끌었다. 민족운동자들은 서간도 망명 초기부터 강습소를 설치해 2세들을 교육시켰다. 1911년 4월에 조직된 경학사와 연원을 같이하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민족교육기관의 명칭은 신민회의 ‘신’자와 독립운동을 부흥시킨다는 의미에서 ‘흥’자를 사용해 ‘신흥강습소’라 하였다. 그런데 류허현에서 시작된 독립운동기지가 1911년 동사(凍死)와 풍토병의 만연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며 퉁화현으로 이동할 때, 이 신흥강습소도 함께 옮겨 왔다. 그러다 약 2년이 넘는 기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류허현에도 다시 강습소를 개설하고 교장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개교 초, 류허현의 신흥강습소는 갑반 35명, 을반 190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독립전쟁 실천을 위한 기지건설을 위해 이 같이 노력하고 있을 때, 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시발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졌고, 해외의 한민족들도 소식이 닿는 대로 시위운동을 벌였다. 서간도에서도 3월 12일 약 200명의 한인들이 삼원보 서문 밖 교회에 모여 만세시위의 포문을 열었다. 이후 퉁화·지안·싱징(興京)·환런(桓仁)·창바이(長白)·푸쑹(撫松)·하이룽(海龍)·콴뎬현 내 한인사회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이러한 열기에 고조된 서간도 독립운동기지의 민족운동자들은 1919년 4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단체인 한족회(韓族會)를 설립했다. 한족회는 중앙과 지방조직을 편성해 서간도 이주 한인들을 관할하며, 따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해 무기를 구입하고 독립군단을 편성하기 위해 청장년을 모집했다. 이어 그 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해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고치고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이 되었다. 초기 서로군정서의 지휘부는 독판(督辦) 이상룡,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沰), 군정청장 양규열(梁圭烈), 참모장 김동삼, 교관 지청천(池靑天)·신팔균(申八均)·김경천(金擎天) 등이었다.형인 이상룡이 조직의 최고지휘관인 독판에 선임되고, 아들인 광민이 성장하여 백부를 충분히 보필하였으므로 특별한 직책은 맡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한족회와 서로군정서를 창설할 때는 10년 가까운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경험을 살려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도 군자금 확보, 독립군들의 국내 진입시 출정 루트 및 통신원을 연결해주는 역할 등 한인사회를 활용해 무장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수행하였다.한편 1910년대 국내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도 관여하였다. 1915년 7월 대구(大邱)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국내뿐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 등지까지 지부를 설치했는데, 이때 남북만주 총사령부의 선전부장(宣傳部長) 직을 맡았다.성립 후 서로군정서 독립군들은 만주와 국내에서 일제의 기관 및 침략자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무장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전개한 유격전은 서로군정서뿐 아니라 그 시기 서북간도에 성립된 다른 독립군단들도 마찬가지로 수행한 독립전투였다. 이에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서북간도의 독립군을 소멸시키지 않고는 식민지 한국 경영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다.따라서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만들어 그해 10월 약 2만 명에 달하는 한국 주둔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불법 월경시켰다. 서북간도의 독립군 기지와 한인 사회를 목표로 침략한 일본군들은 최신 무기로 중무장하고 한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해하고, 가옥과 한교·교회 등 한인과 관련 있는 모든 소유물들을 불태워 없앴다. 이듬해 4월까지 행해진 일본군들의 만행으로 3천 7백 명의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3천 3백 채가 넘는 한인소유의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 부른다.이 참변을 겪은 후,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진열을 정비해 1922년 8월 통합 독립군단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또 다시 여러 독립군단 및 단체들이 재조정 통합을 이루어, 1924년 초에는 압록강변의 지안·린장현(臨江縣) 등을 근거지로 한 참의부(參議府)가, 1924년 11월 24일에는 하얼빈(哈爾濱)·액목(額穆, 현 둔화시(敦化市) 부근)·북간도를 선으로 그어 그 이남 남만주를 관할 지역으로 한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되었다. 남만주와는 별도로 북만주에는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가 탄생하였다.이러한 과정이 이어지는 동안 한창 일할 나이가 된 아들 이광민은 정의부 중앙조직의 재무위원장에 선임되기도 하고, 1924년 8월 동지 김응섭(金應燮)과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을 조직해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아들의 이러한 활동을 뒤에서 지원하고, 또 젊은 독립군 후배들에게 효율적이고 올바른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며 만주지역의 항일무장활동을 이끌었다.그리고 1927년 2월부터는 북만주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탕위안현(湯源縣) 오동하서(梧桐河西)지역으로 옮겨 동포들과 함께 대농장을 가꾸는데 노력하였다. 이는 독립운동기지 건설 초부터 노력해 왔던 바로, 만주로 이주한 동포들의 삶과 독립군들이 활력 넘치는 생명력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같은 활동을 이어 가다 1937년 1월 28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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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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