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415
성명
한자 金九鉉
이명 金壽特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19. 3. 17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신상면(申相冕) 예안면장(禮安面長)이 주동하는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예안(禮安)장터에 운집한 2,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시위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음.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경북 예안(禮安) 장날에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예안읍의 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因山)에 참례했다가 돌아온 인사들이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예안읍 만세운동은 면장(面長)인 신상면(申相冕)의 주도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으로, 만세운동의 계획과 추진도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이루어졌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김구현은 3월 11일 신상면을 비롯하여 신응두(申應斗)·신동희(申東熙) 등 예안의 청년들과 함께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처음에는 다음날인 3월 12일 예안읍 장날에 거사하려 했으나 워낙 시일이 촉박했으므로 다음 장날인 3월 17일에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면사무소 등사판으로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3월 17일 오후 3시 30분에 이들은 면사무소 뒷산에 일인이 세워 놓았던 대전기념비(大典記念碑)를 무너뜨린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장터로 집결하였고, 이를 신호로 선명학교와 보통학교 등 각급 학교의 학생들과 군중들이 시위대에 합류함으로써 시위대의 규모는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 때 일경이 시위 선두에 섰던 2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더욱 불어난 시위군중은 거세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주재소를 점령하였다. 시위군중은 일군경 3명을 포로로 하여 무장을 해제시킨 뒤 이들을 앞세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그는 만세시위에 앞장 서 활약하다가 안동에서 출동한 일군수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5. 10 대구복심법원)
  • 판결문(1919. 6. 12 고등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395∼39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구현 자: 범주(範疇), 이명: 김수특(金壽特) 경상북도 안동(安東) 3.1운동
본문
1900년 5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서부리(西部里, 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범주(範疇), 이명은 김수특(金壽特)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안동 최초의 대규모 독립 만세 시위는 면장과 면서기들이 주도하여 예안면에서 일어났다. 예안면에 사는 김동택(金東澤)·신응한(申應漢)·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 등은 3월 3일에 거행된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가 서울의 만세시위를 목도하였다. 그들이 독립 만세 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예안면의 시위 준비가 시작되었다. 3월 11일 밤 예안면장이었던 신상면(申相冕)의 주도 아래 백남학(白南鶴)·신동희(申東熙)·신응두(申應斗)·이광호(李洸鎬)·이남호(李南鎬)·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호명(李鎬明) 등이 예안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만세 시위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신상면은 3월 12일이 장날이기는 하나, 바로 거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다음 장날인 3월 17일에 거사할 것을 제안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군중 동원을 준비하는 동시에 독립선언서는 면사무소 등사판을 가져다가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등사하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예안면의 유림 지도자인 조수인(趙修仁)도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는 김진휘(金鎭暉)·이원영(李源永)·조맹호(趙孟鎬)·조방인(趙邦仁) 등과 의논하여 3월 17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예안교회(禮安敎會)에서도 3월 17일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고종의 장례식에 다녀오면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온 신응한과 장로 민태규(閔泰圭)와 기독교면려청년회(基督敎勉勵靑年會) 간부 신세균(申世均) 등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7일 예안면의 시위는 오후 3시 30분 수십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일본인들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넘어뜨리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작되었다. 이 만세 소리와 함께 시장 주변의 세 곳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가 일제히 시장을 향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예안주재소를 몰려가자 경찰과 군인이 나서 시위에 앞장서던 15명을 체포하였다. 오후 6시경 시위대는 주재소 앞에서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1,500여 명이 넘는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둘러싸고 돌과 기왓장을 던졌다. 경찰과 군인의 진압 과정에서 25명이 다시 체포되었다. 이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19년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이 항소를 기각하자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5-1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6-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멸실 묘소가 재난 등에 의해 사라진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오미 광복운동 기념공원 경상북도 안동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안동 3·1운동 기념비 경상북도 안동시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구현(관리번호:5415)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