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공원을 출발하여 종로를 지나 남대문정거장 앞에 이르는 시위행진에 동참하였다. 이어 3월 5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남대문 앞의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년 5월에 신현구(申鉉九) 등에 의해 조직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겨난 것이었으나, 결성 초기부터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동단은 임시정부를 중심한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의 역할 등을 수행했다.
한편 그를 비롯한 동단의 본부 인사들은 이무렵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등의 단체와 교류를 통해 결속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조선독립대동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독립달성을 위해 조선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선언문' '진정서' '방략 및 기관'이란 제목의 항일문건과 중국의 신문에서 내용을 발췌한 '포고' 등의 문서를 제작 배포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어 '선언서' '경고문' '일본 국민에게 고함' 등의 항일문건을 제작하여 국내 각지는 물론 중국을 거쳐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김영철은 이러한 문건의 국내 배포를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출판법, 보안법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88·189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5輯 7·8·34·35·286·294·295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6輯 61∼63面
- 大同團實記(신복룡) 143∼207面
- 判決文(1920. 12. 7. 京城地方法院)
- 한국독립운동사연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第3輯 262·26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445面
- 豫審終結決定書(1920. 6. 28. 京城地方法院 豫審係)
- 한국독립운동사연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第1輯 18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