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영백은 전남 장성(長城) 북이면(北二面) 달성리(達城里) 사람이다.
정미조약(丁未條約)이 체결되고 이어서 군대마저 해산되어 일제의 식민지화 추진이 노골화 되어가자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7년 10월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동지 약 1천 명을 규합하여 부하를 삼고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 동지 중에는 박화옥(朴化玉)이 있었다.
선봉·중군·후군장·좌우익장·군량관 등의 부서를 두고 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총 2백정을 준비하였다.한편으로 자금·탄약·식량·피복 등을 군민들로부터 징발하여 군비를 갖추었다. 그 후 장성을 중심으로 하여 광주·고부·정읍·태인·부안·흥덕·고창 및 순창의 각 고을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1908년 음력 3월 4일 정읍 단곡리(丹谷里)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공격하였다.7월에는 흥덕군 소속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방장산(方丈山) 산록 백계동(白溪洞)에서 수비대의 기병과 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新基里)에서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동군 오현(鷔峴)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
1909년 1월 말경 동군 북이면 상곡리(上谷里)에서 수비대 기병과 그리고 2월 중순에는 동군 북일면(北一面 東山里), 2월말에는 흥덕군 세곡리(細谷里), 4월 11일에는 동군 일동면 구수교(一東面 九水橋),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江古里),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 유점리(一南面 鍮店里)에서 각각 일헌병과 전투하고 상호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2월 적에게 노출되어 하는 수 없이 일헌병대 고부 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 재판에서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몇 차례의 항소 끝에 마침내 교수형이 확정되어 1910년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할만 하였지만, 진중일기류(陣中日記類)를 남기지 못하여 일본측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음이 유감이다. 또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인지 양반 출신인 해산 전수용(海山 全垂鏞)과는 가까운 지역에서 활약하였으면서도 연합전선을 전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에 의하면 해산이 그를 다소 무시하려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항일민족전선의 약체화 내지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매천야록 4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485·486·4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15·816·8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