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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0481
성명
한자 金重漢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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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2010 훈격 애족장
1922년 12월 박열(朴烈), 홍진유(洪鎭裕)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표방하는 흑우회(黑友會)를 창립하였으며 1923년 4월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동년(同年) 9월 소위 일왕(日王)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본의 귀족을 비롯하여 내각총리대신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에 동참하였다가 평남(平南) 용강(龍岡)에서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았고 1927년 석방되었으며 1928년 평남(平南) 진남포(鎭南浦)에서 신간회(新幹會) 정치문화부 총무간사를 역임하다가 1929년 8월 일경(日警)에 체포되자 동년(同年) 9월 탈출(脫出)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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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김중한은 일본 유학 중, 1922년 말 박열(朴烈), 홍진유(洪鎭裕), 정태성(鄭泰成), 이필현(李弼鉉)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흑우회(黑友會)를 창립하였으며, 국내로 들어와 서울에 흑노회(黑勞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4월 일본 도쿄에서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동년 9월 소위 일왕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본의 귀족을 비롯하여 내각총리대신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에 동참하였다. 마침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9월 23일 용강경찰서에 체포되어 동월 25일 도쿄 경시청으로 압송되었다. 1926년 5월 6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고, 1926년 10월 26일 박열로부터 폭탄 수입의 의뢰를 받았던 혐의로 소위 치안경찰법위반, 폭탄물취체규칙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 구류 일수 2개년 통산)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여 1927년 2월 4일 동경공소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으나, 구류일수가 오히려 20일이나 지났기 때문에 이튿날 5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4년여의 예심을 거치는 동안 시곡(市谷) 형무소에서 병으로 고생하였고, 출옥 후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928년 평남 진남포에서 신간회(新幹會) 정치문화부 총무간사를 역임하다가 11월 9일 진남포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동월 18일 석방되기도 하였다. 1929년 8월 8일 평양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평양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평양으로 호송되었고, 동년 9월 탈출하였다. 이후 중국 장춘과 길림 등지에 머물며, 국민부(國民府)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豫審終結決定文(東京地方裁判所:1925. 7. 7)
  •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 경찰부, 1934) 222면
  •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2)
  • 東亞日報(1923. 9. 29, 1926. 5. 8, 5. 17, 6. 26, 10. 16, 10. 28, 1927. 2. 5, 2. 6, 2. 10, 1928. 11. 20, 1929. 8. 10, 9. 9)
  •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박경식, 1975) 1권 東京朝鮮人狀況 139면
  • 고등경찰관계연표(1922. 12, 1923. 1. 15)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1집 320~37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중한 - 평안남도 용강(龍岡) 박열사건
본문
1902년 11월 20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지운면(池雲面) 두근리(頭勤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로회(黑勞會)에 가입하였고, 박열(朴烈)과 함께 일본에서 활동하였다.서울에서 활동할 무렵 박열과 만나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3년 1월 이윤희(李允熙)·이강하(李康夏) 등과 함께 서울에서 아나키스트단체인 흑로회를 결성하였다. 흑로회는 선언문을 작성해 항일선전과 함께 회원을 규합하였다. 1923년 3월 24일 회원들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민중연예대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일본 경찰에 의해 중단되고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후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1923년 4월경 일본에 도착하자 박열이 조직한 불령사(不逞社)에 참여하는 한편, 불령사 월례 모임에 참여하여 국내에서 발생한 수평운동, 철도 파업을 후원하거나 일본 아나키스트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를 매도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한 동아일보사 기자를 응징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박열로부터 상하이(上海)에서 폭탄을 제공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 해 9월 일왕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본 귀족을 비롯하여 내각총리대신 등을 폭살시키려는 계획을 위해서였다. 이 계획을 수락하고 박열에게 거사 준비 비용으로 자금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열이 난색을 표하여 폭탄유입 계획은 보류되었다. 이에 박열과 크게 다툰 후 8월 31일 고향으로 돌아왔다.1923년 9월 23일 용강경찰서에 붙잡혀 도쿄(東京) 경시청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박열의 폭탄유입 경위에 대해 예심판사로부터 9번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1924년 2월 15일 박열로부터 폭탄 유입의뢰를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1926년 10월 26일 이른바 치안경찰법과 폭탄물취체규칙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자, 항소하여 1927년 2월 4일 동경공소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다음날 석방되었다. 구류일수가 20일이나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4년 여의 예심기간 동안 형무소에서 병으로 고생하였고, 출옥 후에는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이후 귀국하여 1928년 평남 진남포(鎭南浦)에서 신간회(新幹會) 정치문화부 총무간사로 활동하다가 11월 9일 진남포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같은 달 18일 석방되었다. 1929년 8월 8일 ‘평양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평양경찰서 형사에게 붙잡혀 평양으로 호송되었고, 동년 9월 탈출하였다. 이후 중국 창춘(長春)과 지린(吉林) 등지에 머물며 국민부(國民府)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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