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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789
성명
한자 尹履炳
이명 省齊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1.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피살되자 1895년 1903년에 걸쳐 수차 복수토역소(復讎討逆疏)를 올림.(성제유고(省齊遺稿))
2. 1895년 10월 정부내(政府內) 역도숙청공작(逆徒肅淸工作)을 꾀하였다가 실패하다.(매천야록(梅泉野錄) P 190. 292)
3. 고종(高宗)밀령(密令)으로 역당(逆黨)죄상(罪狀)정밀상주(偵密上奏)했다가 실패하다.(관보(官報) 459(건양(建陽) 1년) 3980(융희(隆熙) 2년)
4. 1903년 5월 청국동순주상표(淸國同順奏商票)일본은행권(日本銀行券)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다.(매천야록(梅泉野錄) P 190 292)
5. 1905년 11월 보호조약(保護條約)에 반대하여 격문을 전국에 산포하다.(성제유고(省齊遺稿))
6. 1906년 향리(鄕里)에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고 민중계몽에 힘쓰다.(성제유고(省齊遺稿))
7. 1907년 서울에서 동우회(同友會)를 설립하고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함.(성제유고(省齊遺稿))
8. 1907년 결사대(決死隊)를 조직, 해아(海牙) 밀사 사건(密使事件)으로 인한 일본의 강압에 항쟁타가 3년간 전남지도(全南智島)에 유배되다.(관보(官報) 459((建) 1년) 3980(융희(隆熙) 2년)
9. 1919년 3일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피체복역 중 1921년 7월 병보석 동 11월에 사망하다.(한성일보(漢城日報) 100호 191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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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피살(被殺) : 죽임을 당함.
  • 복역(服役) : 징역을 삶.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청남도 논산(論山)군 노성(魯城)면 병사(丙舍)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영선사주사(營繕司 主事)로 있을 때 일제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으며,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죄상을 조사 보고하려다가 실패했고, 정부내의 친일분자를 숙청하려다가 역시 실패했다.

1903년 5월에는 청국 동순태(同順泰)의 상표(商票)와 일본제일은행권(日本第一銀行卷)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1906년에는 향리에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1907년에는 서울에서 동우회(同友會)를 창립하여 제2대 회장이 되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였다.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인 차관통치를 시작하려 하자 동우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연합해서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을사5적 처단과 이완용가에 방화를 제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으로 3년간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당하였다.

일제가 1910년 8월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 9월에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입하였는데, 독립의군부는 의병무장투쟁을 계승하는 독립군 단체로서 중앙에는 중앙순무총장(中央巡撫總將), 각 도에는 도순무총장, 각 군에는 군수, 면에는 향장(鄕長)을 배치하고 일제식민지 통치를 거부하면서 비밀히 독립정치를 하고 한국인이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굴복하고 있지 않음을 세계에 알리어 국권회복의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하던 단체로서, 윤이병 등은 1914년 4월에 일제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3월 상순에 한남주(韓南珠) 등과 13도 대표의 국민대회(國民大會)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조선민국 수립)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선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끼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179면
  • 기려수필 23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2권 3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4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35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6 114 14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9 2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67 132 133 135 142 14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이병 자: 계성(繼星), 호: 성재(省齋) 충남 논산(論山) 을사늑약, 3.1운동
본문
1855년 11월 1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구자곡면(九子谷面) 왕암리(旺岩里)에서 부친 윤상구(尹相龜)와 모친 여주이씨(驪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계성(繼星), 호는 성재(省齋)이다.7세 때 논산군 노성면(魯城面) 병사리(丙舍里) 내촌(內村)으로 이사하였다. 어려서 큰형과 함께 이종화(李鍾和) 문하에서 한학을 익혔고, 33세 때인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895년 영선사 주사로 있을 때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자 여러 차례 국모복수의 상소를 올렸다. 1896년 시종원 시종에 임명되어 고종의 비밀 지시를 받고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하였다. 나아가 정부 내 친일분자를 숙청하려다 도리어 무고로 몰려 고군산도에 유배되었다. 1897년 3개월간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뒤 한성재판소 수반판사로 임명되었다.1903년에는 공제회(共濟會)에서 활동하였다. 공제회는 일본 제일은행권과 청국 어음의 국내 유통을 저지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철폐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 5적’ 처단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1907년 고종이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자 일제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앞세워 고종의 강제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앞장선 것이 동우회(同友會)였다. 동우회는 ‘황실존중’·’청년교육’·’동양평화’를 표방하였다. 동우회의 초대 부회장, 2대 회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를 바로 앞둔 7월 17일 동우회는 특별회를 소집하였다. 궁궐 안에서 고종이 일제의 핍박을 받고 있으며, 퇴위를 강요하려 일본 외무대신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이때 “황상폐하께서 일본에 행행(行幸)하심은 정부 각 대신이 폐하를 핍박하여 나온 것이므로 신민된 자는 이를 좌시할 수 없다. 이 시국에 대한 회원의 의견을 널리 듣고자 개회하였다”라고 특별회 개최 목적을 밝혔다. 회원들은 고종을 일본으로 보내려는 대신은 국적이라고 분개하면서, “국가가 위급할 때에 태연히 상업을 영위하는 것은 선량한 국민이 할 바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상인들도 이에 동조하여 철시하고 퇴위 반대운동에 합세하였다. 더 나아가 대궐문 앞으로 나아가 고종의 출입을 살피고 남대문역에서 기차에 깔려죽더라도 고종의 일본행을 만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동우회 회원들과 시위 군중들이 일제히 고종이 기거하던 경운궁(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몰려가 경찰대와 충돌을 일으켰다.그런데도 일제의 강압과 친일 대신의 협박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7월 19일 양위식이 거행되자 동우회 회원들을 이끌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연대하여 연일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되자 7월 28일 20여 명의 경찰대는 고종 퇴위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동우회 본부를 급습하여 회원 수십여 명을 체포해 갔다. 8월 5일 경찰에 동우회 회장이라는 이유로 붙잡혔으며, 동우회는 해산되었다. 20여 명의 동우회 회원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12월 29일 평리원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종신유배를 받고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1910년 경술국치 직후 3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풀려났다. 56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독립 의지는 노쇠하지 않았다. 향리인 논산에서 정양 후 곧 서울로 상경하여 창신동에 거주하며 국권회복을 모색하였다.1913년 겨울 군산(群山)에서 충청도·경기도·전라도 출신이 중심이 되어 대한교민광선회(大韓僑民光鮮會)를 결성하였다. 대한교민광선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만주와 미주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연대투쟁을 꾀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여 1913년 말 서울의 부호 김윤환(金閏煥)에게 경고문을 보내 미국행 여비로 3천 2백 원을 인천부두로 가져오게 하였다.1914년 5월 7일 윤길(尹洁)·유병심(柳秉心)·신규선(申奎善)을 서간도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이승규(李昇奎)·이규준(李圭俊)·김창환(金昌煥) 등 동지를 규합하여 광제회(光濟會)를 발족시켰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힘썼다. 여론전을 전개하여 일본과 독일의 전쟁을 유발하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군자금 수합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서간도의 독립군 지도자로 명망이 높은 여준(呂準)의 격문을 받아 미주 『신한민보』에 게재하여 여론을 환기하고, 서울의 부호 윤상오의 집으로 김창식 등이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김창식 등이 체포되고 이어 대한교민광선회 주요 성원들이 연달아 붙잡히고 말았다.1915년 3월 4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결정에 의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해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 적선동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한남수(韓南洙)·홍진(洪震)·이규갑(李奎甲) 등이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국민대회를 준비하자 여기에 동참하였다. 당초 국민대회의 절차를 밟아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은 3월 초부터 이규갑·홍진·한남수·김사국(金思國) 등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여기에는 신숙(申肅)·안상덕(安商悳) 등 천도교 인물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이교헌(李敎獻)·윤용주(尹龍周)·최전구(崔銓九)·이용규(李容珪)·김규(金奎) 등도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하였는데, 모두 유림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선포를 위해 국민대회 추진하기로 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1919년 3월 17일 홍면희의 동료인 현직 검사 한성오의 집에서 준비위원 회의를 개최하고, 13도 대표자회의를 4월 2일에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대내외에 공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자리에는 준비위원의 대다수가 참석하여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약법」 등을 작성하고, 임시정부 각원과 평정관,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할 국민대표의 명단을 확정했다.계획대로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는 성원에 미달됨으로써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모임으로 축소되었다. 13도 대표 전원이 참석하지 못하고 이규갑·홍면희·장붕(張鵬)·안상덕·한남수 등 10명 남짓한 인사들만 참여했던 것이다. 한성임시정부 선포를 위한 국민대회는 김사국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김사국은 3월 중순에 주익(朱翼)의 소개로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생 김유인(金裕寅)을 만나면서 장채극(張彩極)·김홍식(金弘植)·전옥결(全玉玦)·최상덕 등을 끌어들였다. 김사국을 비롯한 현석칠(玄錫七)·민강(閔橿) 등 국민대회 지도부는 4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다. 현석칠과 민강 등은 국민대회 취지서·결의문·약법·선포문 등을 제작하기 위해 서소문동 이민홍의 집에서 목판으로 6천 장을 인쇄하였다.국민대회 준비가 마무리되자 김사국은 4월 19일에 자신의 숙소에서 김유인·안상덕·민강·현석칠 등 지도부 회합을 가졌다. 여기서 안상덕은 신숙에게서 받은 천도교자금 500원을 출자하였고, 이 자금은 민강을 통해 김유인에게 전해져 국민대회 당일 동원할 행동대원들을 확보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의 계획에 따르면 4월 23일 정오를 기해 종로의 서린동 봉춘관에서 국내 13도 대표자가 모여 임시정부를 선포함과 동시에 군중을 동원하여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면서 문서를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대회 당일에 이들은 종로 일대에서 전단을 살포하고 ‘국민대회’와 ‘공화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이며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이날 현장에서 시위 운동자들이 체포되고 이어 5월 초에는 지도부를 포함하여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8월 30일 예심이 열리기 전까지 모두 28명이 검거되었다. 이 무렵 국민대회 주도자의 일원으로 붙잡혔다. 그리하여 예심결정을 거쳐 1919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옥고를 치른 여독으로 1922년 11월 16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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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유(流) 종신(終身) 평리원 1907-12-2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5-03-04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제3공소사실은 무죄 경성지방법원 1915-05-12 국가기록원
4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5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10월 , 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19-12-19 국가기록원
6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무죄(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경성복심법원 1920-03-05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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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논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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