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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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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尹三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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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 1943년 4월 상업학교(商業學校)에서 이상호(李相虎), 김상길(金相吉) 서상교(徐尙敎)등의 태극단(太極團) 조직에 찬성하여 가입 결단(加入結團)후 독립을 위하여 먼저 국민에게 군사, 문화, 경제의 독립을 위한 여론을 이르킬 공작(工作)하다.

2. (團)경기부장(競技部長)을 하다

3. 1943년 5월 25일 피검(被檢)되여 단기 2년 장기 3년의 (刑)언도를 받고 인천형무소(仁川刑務所)에서 복역 중 8.15 광복으로 출옥하다(대구시보(大邱時報) 1945. 12. 12, 대구경고(大邱警高) 3291호, 대구지방검사국 공판청구(大邱地方檢事局公判請求) 1944년형(年刑) 13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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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대구(大邱) 사람이다.

대구공업학교 재학중 1943년 4월에 대구상업학교 학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그와 단원들은 우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10여부(部)를 두어 조직을 체계화하였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체육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도 단원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출옥후 모교에 복교했으나 고문과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1946년 6월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85·788·7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36·842·844·845·847·84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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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삼룡 윤삼음(尹三音), 창씨명 : 이본삼길(伊本三吉) 경북 대구(大邱) -
본문
1925년 12월 5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남산동(南山洞, 현 대구광역시 남산동)에서 아버지 윤길수(尹吉秀)과 어머니 선이(先伊)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이명으로 윤삼음(尹三音)을 썼다. 일제의 강요로 이본삼길(伊本三吉)이라고 고쳤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었다. 1942년 5월 대구덕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대구공립직업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하였다.대구공립직업학교 기계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43년 4월 이상호(李相虎)의 권유를 받고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일명 T.K.D)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태극단은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생인 이상호·서상교(徐尙敎)·김상길(金相吉)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무력 항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 쟁취를 계획하였다. 원래 1942년 5월경 이상호 혼자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연구·구상한 조직이었는데, 6월경 최두환(崔斗煥)의 소개로 이상호를 알게 된 후 수 차례 회합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토의하였다.태극단은 1943년 4월 이후 서상교·김상길의 적극적인 동참과 지지를 얻으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우선 이상호가 작성한 태극단 대강(大綱)을 검토한 후 조직체계를 확정하였다. 단장·육성부(育成府)·간부회의로 구성하였고, 육성부 밑에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을 설치하였으며, 각 국 밑에는 군사부·씨름부·항공부 등을 두기로 하였다. 이들이 동지를 규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할 때 태극단의 취지에 공감하여 가입하였다. 같은 해 5월 이상호의 집에서 회합할 때 참여하여 간부로 추천, 경기부장(競技部長)으로 활동하면서 단원들과 함께 동지 규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1943년 5월 배신자의 밀고로 일제 경찰에게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탄로나 같은 해 5월 25일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 대구경찰부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대구경찰서로 끌려갔다. 대구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약 5개월 동안 조사를 받고, 같은 해 10월 11일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1944년 1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초순경 동지 김상길 등과 함께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출옥 후 모교에 복학하였으나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1946년 6월 30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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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대구광역시 달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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