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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693
성명
한자 石盛基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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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23 경북(慶北) 상주읍(尙州邑) 장터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 피체되어 징역10월을 받았으며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하여 11월5일간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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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경성국어보급학교생(京城國語普及學校生)으로 강용석(姜龍錫)·성필환(成必煥)·한암회(韓岩回)·조월연(趙月衍) 등 애국청년들과 전국 각지의 독립만세운동에 발맞추어 상주읍에서도 의거를 단행할 목적으로 결의를 거듭해 왔다.

이들은 3월 23일 상주읍 장날을 거사일로 약정하고 동지를 규합하면서 거사준비를 해왔다.

3월 23일 상주읍 장날 오후 5시경 주동 동지들 가운데서 한암회의 선창으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애국동지들과 함께 이날 장터에 모인 5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주동자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6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80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33·34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53·454面
  •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석성기 - 경북 상주 1919년 경북 상주군 만세운동
본문
1902년 6월 20일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상주면(尙州面) 성동리(城東里)에서 출생하였다. 18세였던 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읍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서울에서 경성국어보급학관(京城國語普及學館)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겪고,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때에 고향 상주로 내려왔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내려온 상주 출신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상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도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상주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이때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한암회(韓岩回)가 주축이 되어 경성보통학교 학생 조월연(趙月衍), 상주공립보통학교(尙州公立普通學校, 현 상주 초등학교) 졸업생 강용석(姜龍錫)·성필환(成必煥) 등과 함께 만남을 갖고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들은 3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국의 만세운동에 발맞추어 상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결심하고, 구체적인 만세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거사 날짜와 장소는 상주읍 장날이 열리는 3월 23일로 정하고, 시장 안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상주읍 장날은 상주 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장이 열리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다.거사 당일인 3월 23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성주읍 장터로 향하였다. 이들은 시장 곳곳에서 자리 잡고 만세시위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 30분경 한암회가 시장 중앙에서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한암회의 만세 소리에 시장에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들이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군중들 속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만세소리에 현장에 있던 헌병들이 즉시 달려와 한암회를 그 자리에서 체포하고,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시장에 있던 군중과 학생들은 잠시 동요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이어가며 헌병들과 대치하게 되었다.오후 6시 40분경 군중과 헌병들 사이에서 대치 상황이 벌어질 때 능암리(陵岩里)에 사는 마을 청년 성해식(成海植, 또는 성성인(成星仁))이 군중들 앞으로 나왔다. 성해식은 시장 입구에 있는 누문(樓門) 계단 위로 올라가 장터에 모인 500여 명의 군중들을 향하여 “조선이 독립된다는 소식에 만세를 부르려고 한다”고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3번 연달아 외쳤다. 성해식의 만세 소리에 동요하던 군중들도 힘을 얻게 되면서 크게 호응하였고,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또한 학생 100여 명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만세시위를 주도해 나갔다.만세운동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힘을 얻게 되자 일제 경찰은 총칼로 이들을 위협하고 강압적으로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다른 4명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군중들의 만세운동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해산하였다.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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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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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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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항일독립의거 기념탑 경상북도 상주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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