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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630
성명
한자 李康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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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28.5 동지를 규합 항일을 목적으로「ㄱ당」을 조직하고 실력배양을 위하여 농민을 만주(滿洲)로 이주시켜 농장을 경영하면서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임정(臨政)과 연락하여 군관학교에 한인청년을 입교시켜 무력 인재 양성(武力人材養成)기도하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2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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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企圖) : 어떤 일을 이루려고 꾀함. 또는 그런 계획이나 행동.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남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5월 당시 상해학생회(上海學生會) 및 청년단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 의원(경상도)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25년 12월 23일 유호(留 )학생회장으로서 재상해선인학생회(在上海鮮人學生會)를 개최하고 윤 해(尹海)·주요섭(朱耀燮)·박헌영(朴憲永) 등을 초빙, 강연케 하였다.

귀국후 그는 1928년 5월 20일 경북 대구에서 노차용(盧且用)·장택원(張澤遠)·정태봉(鄭太鳳)·유상묵(柳尙默)·문상직(文相直) 등과 함께 'ㄱ당'을 결성하였다.

ㄱ당은 뜻있는 청년들을 규합, 광동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에 유학시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만주방면 미간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을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재무부·조사부·연구부의 부서를 두었는데 그는 조사부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위의 목적하에 활동 중 그는 1928년 7월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되었다가 1929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그는 붙잡히기 전에도 신간회(新幹會) 부산지회(釜山支會) 총무간사, 부산노우회(釜山勞友會) 서무간사(庶務幹事), 부산협동조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29. 6. 6 대구복심법원)
  • 고등경찰요사 244∼246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42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49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9면
  • 판결문(1928. 12. 27 대구지방법원)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61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833·834·88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강희 - 경남 부산(釜山) -
본문
1898년 12월 17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초량동(草梁洞)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건너가 펑톈성(奉天省) 장백부(長白府)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중국 지역 한인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부산지역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1918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으며, 1919년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서 의원을 설립하고 간호원 양성을 목적으로 회원을 모집할 당시 십자대(十字隊) 대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1921년 12월 23일 당시 유호학생회(留滬學生會) 회장 자격으로 상하이 삼일예배당(三一禮拜堂)에서 윤해(尹海) 등을 초청하여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설회에서 “대한독립운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후의 1인까지 싸우자”는 주요섭(朱耀燮)의 연설이 끝난 뒤 “내외 청년들에게 중국 유학을 진흥 장려시킬 방책을 마련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내 동포 부형에게 선전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1921년 말 이동휘(李東輝)가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5월 새롭게 재구성된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大會籌備委員會) 국내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국민대표대회는 국내외 전체 독립운동단체들의 대표가 모여 독립운동 방법과 임시정부 문제를 논의 결정하기 위한 개최되었다. 같은 해 7월 25일 호강대학(滬江大學) 재학 중 상해학생축구단 선발대로 서울에 도착하여 국내특파원으로 국민대표대회 참가 대표를 협의하였다.1923년 4월 4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경상도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1923년 6월 부산 『시대일보』 지국기자, 잡지 『자력(自力)』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1927년 7월 개최된 신간회 부산지회 발기준비위원회에서 상무간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11월 6일 개최된 부산청년회(釜山靑年會) 정기총회에서 부산청년단체 합동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4일 부산청년회 등 4개 청년단체가 참가한 부산청년단체합동대회에서 부산청년동맹(釜山靑年同盟)이 창립될 때 교양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28년 2월 4~5일 경남기자동맹(慶南記者同盟)이 주최한 경남기자대회와 경남기자동맹 제1회 정기대회에서 부산본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8년 3월 3일 부산노우회(釜山勞友會) 위원회에 참석하여 경과보고를 하였으며, 다음날인 3월 4일 부산청년동맹 임시위원회에서 임시의장으로 노동자공동숙박소와 부산소비조합 등의 설립을 촉진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3월 24일 부산협동조합 창립대회에서 “조선 사람의 일용품을 공급 수용키 위한” 목적의 협동조합 준비 과정에 대한 경과 보고를 하였다. 4월 21일 부산청년동맹 제1회 정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지역 사회운동을 이끌었다.1928년 초부터 정태봉(鄭太鳳)·장태봉(張太鳳) 등과 신간회와 같은 합법 활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국 광동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에 청년들을 입교시키고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목적을 가지고 비밀결사 당(黨)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비밀결사의 내부조직 강화와 한국 정세의 연구,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1928년 6월 19일 이 일로 서울 계동(桂洞) 자력잡지사에서 붙잡혀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해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29년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으며, 1930년 12월 28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 원심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당심미결구류일수 중 100일 본형에 산입 대구복심법원 1929-06-06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 미결구류일수 60일 본형에 산입 대구지방법원형사부 1929-12-2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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