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과 교전 중 희생되었다.
한봉철은 중등학교 시절 기독청년회에 입회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갈산면(葛山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양평군청과 양평우편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았다.
또한 1920년 6월에는 기독교계의 장로인 한덕리(韓悳履)의 권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5년 4월에는 혁청단(革靑團) 선언 강령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속되어 수일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봉철은 만주지역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여 신활청년회(新活靑年會)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12월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서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 창립에 참여하였다. 남만청년총동맹은 1925년 11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로 일반대중의 문맹을 퇴치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및 신문강독회 등을 통해 청년 학생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신사상을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봉철은 1929년 목릉현(穆稜縣)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비서부(滿洲秘書部) 남만(南滿) 제1구역의 조직부장으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獨立師)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의 군수부장이 되었다.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한봉철은 1936년 연길현(延吉縣)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東亞日報(1921. 6. 9, 1925. 4. 24)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493~497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627~629면
- 한국공산주의운동사(金俊燁·金昌順, 1986) 4권 241면
- 한국공산주의운동사(金俊燁·金昌順, 1986) 5권 31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判決文(高等法院:1919. 10 23)
-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국사편찬위원회) 6 194~201면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국가보훈처) 2 194~201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7. 9)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