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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3290
성명
한자 金德根
이명 金元根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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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30년 3월 상해(上海)에서 화랑사(花郞社) 집행위원장(執行委員長)으로 피선되어 각지방을 순회하면서 선무공작(宣撫工作) 활동하며 임시정부(臨時政府)불국 영사관(佛國領事館)과의 비밀연락원 및 윤봉길 의사(尹奉吉義士)의 거사확인 차 밀파(密派)되었다 익일 체포되어 1932년 6월 안창호(安昌浩)와 같이 경성(京城)으로 압송 1932.8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 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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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고향에서 신광(新光)학교를 졸업하고 숙부인 임시정부 국무원 김 철(金徹)의 지시로 1929년 1월에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인소년동맹위원장(韓人少年同盟委員長)에 피선되었다. 1931년 7월에는 상해 교민단(僑民團)에서 설립한 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의 사교부장에 임명되어 독립투사의 전위적 임무와 연대적 책임을 실천하고 청년들을 훈련시켜 혁명 역량을 총집결할 목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원확보에 주력하였다.

1932년 1월에는 화랑사(花郞社)를 창립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화랑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교양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는 단장에 선출되어 단원들과 함께 임정요인의 연락업무 및 비서역할 등의 업무와 통신사무를 전담하였다. 그는 또한 선무반원으로서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무 초모공작 활동을 전개하고 또한 임시정부와 불란서 영사관과의 연락책 및 통역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기념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이 때 독립투사인 윤봉길(尹奉吉)이 김 구(金九)의 지령으로 폭탄을 식장 안으로 던진 일대 의거를 단행하였다. 이 의거로 상해 일본파견군 사령관 백천대장과 거류민단장 겸 행정위원장 하단(河端貞次) 등이 죽고 수많은 일인들이 부상을 당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계의 요인과 그 외의 한국인은 일제의 발악적 보복 검색으로 피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거사일인 4월 29일에 김 구(金九)는 교민단 사무소의 중국인 사환을 보내어 염탐케 하였는데 정오 경 그가 돌아와 거사에 성공하고 윤봉길(尹奉吉)은 체포되었음을 보고하였다. 한국인들의 검문, 검색이 강화될 것을 예견한 엄항섭(嚴恒燮)의 지령에 따라 그는 이규홍(李奎洪)과 함께 프랑스조계 거주의 한국인들에게 피난할 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음날 장현근(張鉉瑾)과 함께 상해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20대의 젊은 학생이기 때문에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으나, 전남 함평군(咸平郡) 신광면(新光面) 함정리(咸井里)로 거주지를 제한 받고 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8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27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495 53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6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13 726 729 730 763 792 83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덕근 - 전라남도 함평(咸平) 윤봉길의거
본문
1912년 9월 14일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新光面) 함정리(咸井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산(永山)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철(金澈)의 조카이다. 이명은 김원근(金元根)이다. 고향의 신광공립보통학교(新光公立普通學校)에서 5년 동안 수학한 후 1929년 1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숙부인 김철의 집에서 지내며 진단(震旦)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30년 김철의 권유로 상하이한인소년동맹(上海韓人少年同盟)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한인소년동맹은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한국 소년운동의 집중화와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1920년대 부침을 거듭하던 임시정부는 그동안 추진해왔던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하고 재정적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겨우 간판만 유지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김구와 안창호, 조소앙 등은 이를 극복하고자 1930년 1월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임시정부 재무장 김구는 국무위원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비밀리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준비하였다. 임시정부는 의열 투쟁을 통해서 일제의 만주 침략과 뒤이은 상하이 침략 이후 높아진 중국의 항일운동과 결합, 한중 항일 연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 역시 강화할 계획이었다.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조직된 한국독립당 역시 상하이한인청년당(上海韓人靑年黨), 화랑사(花郞社), 상하이한인여자동맹(上海韓人女子同盟) 등 여러 부문 단체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항일 투쟁을 강화하였다. 상하이사변이 있기 직전인 1932년 1월 25일 이덕주(李德柱), 서재현(徐載賢), 유상근(柳相根), 김석(金晳) 등과 더불어 1931년 7월 창립되었으나 유명무실화 된 상하이한인독립운동자청년동맹(上海韓人獨立運動者靑年同盟)을 해소하고 새로운 결사를 조직하기로 협의하였다. 이어 신당조직준비회를 개최하고 신당의 명칭을 상하이한인청년당으로 정하였다. 마침내 1월 30일 상하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 사무실에서 “청년들은 대동단결하여 일본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며 상하이한인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상하이한인청년당은 한국독립당의 소속 단체로서 “국토와 주권을 혁명수단으로 완전히 광복하기 위하여 그 전위적 임무를 수행하고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주지로 하는 신민주국 건설의 기초를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상하이한인청년당의 결성을 주도하면서 한인청년당원의 일원이 되었고, 1932년 4월 열린 임시총회에서 사교부장에 임명되어 한국 청년의 단체 훈련과 혁명 역량의 총집중을 위해 활동하는 한편, 당원 모집에도 노력하였다. 한인청년당은 3월 이덕주·유진식(兪鎭軾)을 조선총독 암살을 위하여 국내에 파견하였으나 4월 10일경에 사전에 체포되었고, 이후 재차 금긍호(琴兢鎬)를 바닷길로 만주 안둥(安東)에 파견했다가 5월에 붙잡히는 등 의열 투쟁도 함께 이어갔다. 1932년 2월 24일 열린 화랑사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선정되었다. 1929년 2월 상하이에서 조소앙 지도 아래 창립된 화랑사는 고대 화랑제도를 모방하여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독립 투쟁에 동참하도록 하는 한편 독립운동 단체의 간부들과의 통신 연락 및 그들의 송영(送迎)·응접과 임시정부 요인과의 접촉을 꾀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상하이 외곽 지역의 동포를 포섭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와 지원의 분위기를 고조하는 활동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대한교민단 의경대(義警隊) 간사인 엄항섭(嚴恒燮)으로부터 홍커우공원의 의거 상황을 파악하여 즉시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전 9시 황푸강(黃浦江) 옆 황푸공원에 가서 1시간 정도 기다렸으나 홍커우공원에서 폭음이 들리지 않자 엄항섭 집으로 돌아와 대기하였다. 정오 무렵 윤봉길의 의거가 성공하였고 윤봉길이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엄항섭의 지시를 받아 이규홍(李圭洪)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서 프랑스조계에 있는 임시정부 요인과 동포들에게 피난할 것을 알렸다. 다음 날 새벽 윤봉길 의거에 놀란 일제는 프랑스 총영사관의 협력을 얻어 44명의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과 일본군 헌병 22명 등 66명을 동원하여 상하이 시내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피난 지시를 신속하게 전달한 활약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미 종적을 감췄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한 후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김철의 집에 숨어있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날 안창호 및 청년 혐의자 10명과 함께 붙잡혔다. 29일간 구류 처분을 받은 이들 12명 가운데 박제건(朴濟建), 김덕목(金德穆) 등 9명은 윤봉길 의거에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5월 14일과 25일 두 차례 걸쳐서 풀려났다. 그러나 안창호, 장현근(張鉉瑾)과 함께 치안유지법위반혐의자가 되어 6월 5일 우편선 게이안마루(慶安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6월 7일 인천을 통해 국내로 호송되었다. 1932년 7월 25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사상 단체의 사무원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한 혐의가 있으나 국외 운동에만 그치고 한국 내의 운동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라는 이유로 장현근과 함께 기소유예되어 이날 오후 7시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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