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고향에서 신광(新光)학교를 졸업하고 숙부인 임시정부 국무원 김 철(金徹)의 지시로 1929년 1월에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인소년동맹위원장(韓人少年同盟委員長)에 피선되었다. 1931년 7월에는 상해 교민단(僑民團)에서 설립한 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의 사교부장에 임명되어 독립투사의 전위적 임무와 연대적 책임을 실천하고 청년들을 훈련시켜 혁명 역량을 총집결할 목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원확보에 주력하였다.
1932년 1월에는 화랑사(花郞社)를 창립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화랑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교양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는 단장에 선출되어 단원들과 함께 임정요인의 연락업무 및 비서역할 등의 업무와 통신사무를 전담하였다. 그는 또한 선무반원으로서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무 초모공작 활동을 전개하고 또한 임시정부와 불란서 영사관과의 연락책 및 통역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기념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이 때 독립투사인 윤봉길(尹奉吉)이 김 구(金九)의 지령으로 폭탄을 식장 안으로 던진 일대 의거를 단행하였다. 이 의거로 상해 일본파견군 사령관 백천대장과 거류민단장 겸 행정위원장 하단(河端貞次) 등이 죽고 수많은 일인들이 부상을 당했다.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계의 요인과 그 외의 한국인은 일제의 발악적 보복 검색으로 피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거사일인 4월 29일에 김 구(金九)는 교민단 사무소의 중국인 사환을 보내어 염탐케 하였는데 정오 경 그가 돌아와 거사에 성공하고 윤봉길(尹奉吉)은 체포되었음을 보고하였다. 한국인들의 검문, 검색이 강화될 것을 예견한 엄항섭(嚴恒燮)의 지령에 따라 그는 이규홍(李奎洪)과 함께 프랑스조계 거주의 한국인들에게 피난할 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음날 장현근(張鉉瑾)과 함께 상해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20대의 젊은 학생이기 때문에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으나, 전남 함평군(咸平郡) 신광면(新光面) 함정리(咸井里)로 거주지를 제한 받고 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8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27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495 53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6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713 726 729 730 763 792 8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