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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49
성명
한자 金善琪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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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31년부터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전편찬원(辭典編纂員)으로 함흥경찰서(咸興警察署)에 검속될때까지 “한글사전편찬”, 한글맞춤법 “통일안제정”, “표준말시정”, “외래어표기법사정” 등에 진력하다 왜경에게 피체되어 6년여의 옥고를 치르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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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1931년 1월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전편찬위원으로 사전편찬사업에 참가하는 한편,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여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발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그는 조선어학회의 〈표준말 사정〉과 〈외래어 표기법 사정〉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으로 조선어학회의 전국순회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국민들에게 국어를 교육하였고, 1935년 7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음성학협회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어의 조직을 과학적으로 소개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462·997·99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483·76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선기 호 : 무돌 전라북도 옥구(沃溝) 조선어학회 사건
본문
1907년 2월 18일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임피면(臨陂面) 읍내리(邑內里)에서 아버지 김철중(1883~1962)과 어머니 고대준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호는 무돌이다. 아버지는 『동아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한 애국지사다. 1930년 배화여고 1회 졸업생 김은성과 결혼하여 아내가 1947년 별세할 때까지 4남 3녀를 두었고, 1953년에는 재일조선인 2세이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을 졸업한 이운경과 재혼하여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조선어학회 핵심 실무자로서 활동하였고, 조선어강습회 강사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유럽에 유학해서도 한국어에 관한 우수 논문을 발표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는 등 일제에 맞서 국내외로 우리말 수호에 헌신한 어문민족운동가로 평가될 수 있다. 1913년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914년 임피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군산보통학교(群山普通學校)로 전학해 1919년 졸업하였고, 같은 해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진학하였다. 1924년 종교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중국 베이징(北京) 소재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전·입학하였다. 1928년 연희전문을 휴학하고, 4월에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의 센다이중학(川內中學)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9년 연희전문에 복학해서 1930년 3월 졸업하였다. 같은 해 9월 함북 경성(境城) 동명의숙에 취직하였으나 학교 재정난으로 인해 12월에 돌아왔다. 1931년 1월부터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전편찬원이 되어 편찬 사업을 도왔다. 같은 해 8월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조선어강습회 강사로서 경기 안성, 충남 대전, 전북 이리에서 바른 철자법을 강연하였다. 1932년 8월에는 평북 신의주, 운향, 황해 신천, 평북 정주에서 강연하였다. 1932년 12월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으로 임명되어 한글맞춤법통일안 작업에 동참하였고, 1933년 11월 8일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완성한 뒤 제정위원 위로연에 참석하였다. 1934년 6월 7일 언어학을 연구하고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대학 부속 음성학연구소(L’Institute Phonetique)에서 푸셰(Pierre Fouché)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유럽행 여정기인 「유구도중기(遊歐途中記)」를 『동아일보』에 1934년 8월 2일부터 11월 9일까지 25회 연재하였는데, 일제 경찰은 제국주의 비판을 문제 삼아 연재를 중단시켰다. 1935년 7월 22일부터 27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개최한 국제음성학회IPA 제2차 국제대회에 조선어학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가을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UCL) 대학원에 입학하여, 대니얼 존스(Daniel Johns) 교수로부터 1937년 7월에 「Phonetics of Korean(한국어 음성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7년 10월 1일 귀국하였고, 1938년 3월부터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로 취임, 1939년 3월 조교수, 1940년 4월 교수로 승진하였다. 1942년 10월 20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다음 날 함남 홍원경찰서로 이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1943년 9월 12일 함흥형무소 미결수로 복역하던 중 9월 19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때 유죄 판결을 받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1943년 10월 함남 단천(端川)으로 피신해 광산 노무 주임으로 일하다가 1944년 3월 강제 징용되어 함북 웅기군(雄基郡) 감투봉에서 노역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서울로 귀향하였다. 1946년 3월 연희전문학교 영어영문학과에 복직되었고,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영문과 과장으로 재임하였다. 1948년부터 1970년까지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다. 1950년 1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언어학과 주임교수로 취임하였다. 1956년 10월 한국언어학회 초대 회장, 1958년 문교부 차관, 1965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명지대학 초대 대학원장을 역임하고서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5년 2월에는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국어정화론」(『조선일보』, 1931), 「피히테의 언어관」(『한글』1·2, 1932), 「한글학의 선구 주시경 선생」(『동광35』, 1932), 「유구도중기(遊歐途中記)」(1934) 등 기고와 기행문, 그리고 『한국어음성학(Phonetics of Korean)』(1937) 등 저서가 있으며, 광복 후 음성학, 향가해독, 한국어계통론에 관한 다수 논문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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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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