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8년 4월 10일
3. 1908년 4월 16일
4. 1908년 6월 2일
5. 1908년 9월 20일
6. 1908년 11월 24일
7. 체포되었을때의 언동 “조금도 굴하는 기색없이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의거의 당연함을 설파하였다. (
8. 1909.10.16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남 곡성(谷城) 출신이다.
1908년 3월 30일 전남 의병장 조서화(趙書華) 의진에 입진(入陣)하여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 10일 전남 구례군 계사면(求禮郡 季肆面)에서 일본 관헌의 토벌대와 교전하였는데 당시 병력은 20명이었고 이 전투에서 2명이 전사하였다.
4월 16일 구례 죽곡면 동미리(竹谷面 桐渼里)에서 동지 20명과 함께 일본 기병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6월 2일 죽곡면 마륜산(馬輪山) 중에서 일본 기병대 2명을 기습하여 사살하였다.
9월 20일 곡성군 목사동(木寺洞)에서 일본 수비대 10여 명과 교전하였다.
당시 의병의 병력은 130명이었는데 이 전투에서 대장인 조서하 이하 2명이 전사하였다.
여태까지 의지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던 의병장이 전사한 후 신정백은 독립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통솔, 구례·곡성·낙안·남원 등에서 활동하였다.
11월 24일 곡성군 목사동 평리(坪里)에서 일본 토벌대와 40분간 교전 끝에 부하 5명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의병의 수는 40명이었으나, 이 싸움 뒤에 모두 흩어졌고, 신정백은 동미동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에도 그의 언동은 적에게 조금도 굴함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의거의 당연함을 적에게 설파하기까지 하였다.
1909년 10월 16일 구례·광주(光州)·목포·대구 등지로 이감되었다가 마침내 1909년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50면
- 신남강기적비 연의안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700면
- 폭도편책 전남경비수 414호 융희2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