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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30
성명
한자 申正栢
이명 申正宇, 申隅, 申正雨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1. 1908년 3월 30일 전남의병장(全南義兵將) 조서화 부대(趙書華部隊)에 입대 지휘관(指揮官)으로 활약하다. (폭도편책(暴徒編冊) 전남경비수(全南警秘收) 414호 융희(隆熙) 2년 12월 1일)

2. 1908년 4월 10일 전남(全南) 구례군(求禮郡) 계사면(季肆面)에서 일 토벌대(日討伐隊)교전하다 병력 20 전사 2 .(폭도편책(暴徒編冊) 동상(同上))

3. 1908년 4월 16일 동죽곡면(同竹谷面) 동미리(桐渼里)에서 일 기병 경찰대(日騎兵警察隊)교전 병력 20. (폭도편책(暴徒編冊) 동상(同上))

4. 1908년 6월 2일 동상(同上) 죽곡면(竹谷面) 마륜산중(馬輪山中)에서 일 기병대(日騎兵隊) 2명을 기습 이를 사살하다. (폭도편책(暴徒編冊) 동상(同上))

5. 1908년 9월 20일 곡성군(谷城郡) 목사동(木寺洞)에서 일 수비대(日守備隊) 10여명과 교전 병력 130명 조서화(趙書華)이하 2명 전사 (폭도편책(暴徒編冊) 동상(同上)) 이후 독립하여 활약하다.

6. 1908년 11월 24일 곡성군(谷城郡) 목사동(木寺洞) 평리(坪里)에서 일 토벌대(日討伐隊)와 40분간 교전끝에 부하 5명이 전사 병력 40명 신정백(申正栢)동미동(桐渼洞)으로 피신하였으나 피체되었다.

7. 체포되었을때의 언동 “조금도 굴하는 기색없이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의거의 당연함을 설파하였다. (폭도편책(暴徒編冊) 동상(同上))

8. 1909.10.16 구례(求禮), 광주(光州), 목포(木浦), 대구(大邱)로 이감되다가 대구(大邱)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받고 순국(殉國)하다 .(신남기적비연의안(申南紀蹟碑捐義案) 사본(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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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남 곡성(谷城) 출신이다.

1908년 3월 30일 전남 의병장 조서화(趙書華) 의진에 입진(入陣)하여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 10일 전남 구례군 계사면(求禮郡 季肆面)에서 일본 관헌의 토벌대와 교전하였는데 당시 병력은 20명이었고 이 전투에서 2명이 전사하였다.

4월 16일 구례 죽곡면 동미리(竹谷面 桐渼里)에서 동지 20명과 함께 일본 기병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6월 2일 죽곡면 마륜산(馬輪山) 중에서 일본 기병대 2명을 기습하여 사살하였다.

9월 20일 곡성군 목사동(木寺洞)에서 일본 수비대 10여 명과 교전하였다.

당시 의병의 병력은 130명이었는데 이 전투에서 대장인 조서하 이하 2명이 전사하였다.

여태까지 의지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던 의병장이 전사한 후 신정백은 독립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통솔, 구례·곡성·낙안·남원 등에서 활동하였다.

11월 24일 곡성군 목사동 평리(坪里)에서 일본 토벌대와 40분간 교전 끝에 부하 5명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의병의 수는 40명이었으나, 이 싸움 뒤에 모두 흩어졌고, 신정백은 동미동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에도 그의 언동은 적에게 조금도 굴함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의거의 당연함을 적에게 설파하기까지 하였다.

1909년 10월 16일 구례·광주(光州)·목포·대구 등지로 이감되었다가 마침내 1909년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50면
  • 신남강기적비 연의안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700면
  • 폭도편책 전남경비수 414호 융희2년 12월 1일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신정백 자 : 정우(正宇), 호 : 남강(南崗), 이명 : 정우(正雨·正友) 전남 곡성(谷城) -
본문
1877년 1월 3일 전라남도 곡성군(谷城郡) 죽곡면(竹谷面) 남양리(南陽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정우(正宇), 호(號)는 남강(南崗)이다. 일제 측 기록에서는 정우(正雨) 혹은 정우(正友)로도 나타난다. 농업에 종사하던 중, 노인선(盧仁先) 의병부대와 조서화(趙書華)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노인선 의병장은 1907년 11월 김동신(金東臣) 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김동신이 신병으로 의병부대의 활동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자, 1908년 4월 3일 의병 일부를 거느리고 독자적인 부대를 지휘하는 의병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인선의 부대에 가담하여 구례(求禮)·곡성(谷城) 일대에서 일제 군경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이며 활동하였다.1908년 4월 10일 노인선 의병부대 소속으로 2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구례군(求禮郡) 계사면(季肆面) 영사리(影肆里)에서 일본군 9명과 교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2명의 의병이 사망하였다. 4월 16일 노인선이 인솔한 28명의 의병과 연합하여 곡성군 죽곡면 동계리(桐溪里)에서 일제 기병대 및 경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6월 2일 죽곡면 마륜산(馬輪山) 중에 매복하여 기습공격으로 일본군 2명을 처단하였다.1908년 7월부터 15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활동하던 조서화(趙書華)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그 해 9월 곡성군 목사동(木寺洞)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조서화 의병장이 사망하였으나, 생존한 의병들을 이끌고 항전하였다.이후 20명 내외의 부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0월 20일 부하 이초립(李草笠) 외 1명과 함께 죽곡리 태안사(泰安寺)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1월 24일 노인선과 함께 40여 명의 부대원과 함께 곡성군 목사동(木寺洞) 평리(坪里) 부근에 주둔하였다. 일제 경찰의 기습을 맞아 항전하였으나 부대가 와해되어 피신하였다.이후 동계동(桐溪洞)에서 일본군에 붙잡혔다. 1909년 1월 27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4월 16일 대심원에서 기각되었다. 1909년 5월 21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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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원판결 격소 교(絞) 대구공소원 1909-03-27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상고 기각 대심원형사부 1909-04-1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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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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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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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2 독립유공자 위령탑 전라남도 곡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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