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517
성명
한자 尹柱舜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4. 4 남해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피체되어 1919. 9. 23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남해(南海)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윤주순은 4월 4일 아침 일찍 그는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우체국·학교·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고현면(古縣面) 면장 김치관은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泗川)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 사실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伊於里)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9. 23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73·275면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주순 - 경남 남해(南海) 1919년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
본문
1896년 9월 11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설천면(雪川面) 문의리(文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 남해군 남해면(南海面)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남해군의 만세운동은 인근 하동군(河東郡)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4월 초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3월 20일 남해군 최초로 전개된 남해면 읍내 시장 만세시위는 3월 18일 하동군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이 남해로 건너와서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4월 4일 일어난 남해면 읍내 만세시위는 규모나 격렬함에서 있어서 대표적인 만세운동이었다. 그 계기는 설천면 문의리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하동군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온 것이었다. 유찬숙(柳贊淑)·정순조(鄭順祚)·정학순(鄭學淳)·정몽호(鄭夢虎)·정용교(鄭鎔交)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고,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하동군에서 제작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구한 이예모는 평소 뜻을 같이하던 남해군의 민족주의 인사들에게 선언서를 보여주며 거사를 제안하였다. 이후 이예모의 집에서 이루어진 회합에 참석하고 만세시위 계획에 적극 동의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형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에 참여하였고, 효율적인 군중 동원을 목적으로 마을별 연락도 분담하였다.4월 3일 오후 3시 경부터 설천면 남양리(南陽里)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먼저 장대에 높이 단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이예모가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고, 대열을 지어 남해면 읍내로 나아갈 때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시위대가 고현면(古縣面)에 이르렀을 때, 이곳 면장인 김치관(金致寬)이 읍내 경찰주재소에 밀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순조·정학순 등 시위대의 주도 인물들과 논의하여, 장날인 4월 4일 남해 읍내 시장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4월 4일 오후 2시경부터 다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어제처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를 소리 높이 부르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시위대는 시장을 중심으로 읍내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고, 남해경찰관주재소·남해군청·금융조합 사무실·남해우편국·남해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일부는 안으로 들어가 집기와 기물을 파손하고 유리창을 깨는 등 의분을 표현하였으며, 직원들에게도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였고, 특히 주재소에 들어가서는 만세시위 중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일제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였다.만세시위가 격렬한 양상을 보이자 진압을 위해 사천(泗川)경찰서에서 증원된 병력은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일제 경찰들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20명이 넘는 인사들이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때 정순조·정용교·정학순 등과 함께 붙잡혀 혹독한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1919년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공소 기각 대구복심법원 1919-09-2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남해 3.1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남해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남해 3.1독립운동 발상 기념비 경상남도 남해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윤주순(관리번호:2517)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