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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20일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운수면(雲水面) 법동(法洞)에서 아버지 김정환(金正煥)과 어머니 은진 송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이명은 김광두(金光斗), 자는 무경(武卿), 호는 백농(栢儂)이다.일찍이 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배워 칠서(七書)를 통달하였고, 한주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문인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1856~1918)의 문하에서 수석(叟石) 남형우(南亨佑, 1875~1943)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903년 서울에 올라가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법률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남형우의 주선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약 반년 간 수학하고 귀향하였다. 그 뒤 다시 서울에 올라가 경신공업야학교(儆新工業夜學校)에 입학하여 2년간 염직과(染織科)에서 수학하다가 학교가 폐교되자 귀향하였다.대구를 중심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1908년 10월 대한협회(大韓協會) 대구지회(大邱支會) 회원, 1913년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서상일(徐相日, 1896~1962)을 중심으로 한 달성친목회 회원들이 1915년 (음)1월 15일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7월 15일 박상진(朴尙鎭, 1884~1921) 등이 풍기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할 때, 정운일(鄭雲馹, 1884~1956)·이시영(李始榮, 1869~1953)·홍주일(洪宙一, 1875~1927)·최준(崔浚, 1884~1970)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에 참여하여 만주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하고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1915년 4월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조선국권회복단의 1차 군자금 모집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4월 최준명(崔俊明)으로 하여금 대구 부호 서창규(徐昌圭)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토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월경에도 최병규(崔丙圭, 1881~1931)·정운일 등과 함께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가진 돈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거절당하였다.1916년 9월 대한광복회의 이른바 ‘대구권총사건(大邱拳銃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1915년 11월 무렵 대구의 부호 정재학(鄭在學)·이장우(李章雨)·서우순(徐祐淳) 등에게 각각 5만 원, 2만 원, 3만 원을 독립자금으로 내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구의 부호들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마침 김진만(金鎭萬, 1876~1934)이 장인 서우순이 첩의 집에 현금을 숨겨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916년 8월 최병규·최준명·김진만·김진우(金鎭禹, 1881~?) 등과 함께 서우순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16년 (음)3월경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구입하여 귀국 후 최준명에게 맡겨두었던 권총 3정을 제공하는 등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같은 해 9월 4일 서우순의 아들 서상준(徐相俊)의 안내로 서우순의 금고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침투에 놀란 서우순의 비명 소리에 집사 우도길이 달려오자 김진만 등 5명은 총을 쏘면서 달아났다. 이들은 곧 체포되었으며, 자신도 그도 사건 연루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외 김진만은 징역 10년, 김진우는 징역 12년, 정운일 10년, 권국필(權國弼)·최준명 2년, 박상진 6월, 홍주일 5월, 이시영(李始榮) 4월의 징역을 각각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17년 11월 10일 ‘장승원암살사건(張承遠暗殺事件)’과 1918년 1월 24일 ‘박용하암살사건(朴容夏暗殺事件)’으로 대한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났다. 그는 김한종(金漢鍾)·채기중(蔡基中, 1873~1921) 등에게 권총을 제공한 혐의로 1918년 2월 천안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4개월 만에 풀려났다.1918년 11월경부터 청도 출신의 부호 김유경(金裕經)과 함께 부산에서 미곡상, 대구에서 누룩제조회사 설립을 협의하는 등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시 만주를 다녀오는 등 국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주로 국내에서 청년·노동 등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1921년 5월 23일 합천청년연합회(陜川靑年聯合會) 주최 대강연회(大講演會)에서 ‘현대(現代)와 청년(靑年)의 사상(思想)’, 1922년 4월 29일 대구노동공제회 전 회장 김광제(金光濟, 1866~1920)의 추도회를 기해 개최한 노동대회강연회(勞動大會講演會)에서 ‘대평화(大平和)를 건설(建設)하려면’ 등의 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외 1924년 4월 1일 대구학교평의원(大邱學校評議員), 같은 해 8월 1일 대구지역 수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시민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50년 3월 29일 향년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으며, 이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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