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에서 독립군 지원단체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활동을 폈다. 대구를 중심으로 중산층 이상의 인사가 주류가 되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은 무장적(武裝的)인 성격보다는 재력(財力)을 기반으로 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후 조선국권회복단의 동지 박상진(朴尙鎭)·정운일(鄭雲馹)·김재열(金在烈) 등이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통합하여 동년 7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자 이에 참가하여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혁명의 구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자금조달을 위해 식민권력에 안주하던 친일부호 처단을 단행하였는데, 이때 최병규는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1916년 음력 6월에 그는 동회 총사령 박상진의 지시에 의해 정운일·김진우(金鎭瑀)·최준명(崔俊明) 등과 함께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의 처단을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고 이러한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7. 6. 18 대구복심법원)
- 형집행사건부
- 고등경찰요사 18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