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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980
성명
한자 閔泳玖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1942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 요원(大韓民國臨時政府獨立運動要員)으로 피임(被任).
주석의 밀명으로 항일선전(宣傳).

2. 1943. 독립운동자가족을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안주(安住)시킴.
중경(重慶)에 가서 광복군 조직(光復軍組織)에 참가, 활동

3. 1945. 임정 재무부(臨政財務部) 경리국장(經理局長), 광복군총사령부 상교참모(光復軍總司令部上校參謀) 겸직

4. 1940. 광복군 주계 피임(光復軍主計被任)(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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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고 망명하는 부친 민제호(閔濟鎬)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 인성학교를 거쳐 만국항해학교를 졸업하고 선장으로 근무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지달수(池達洙)·나태섭(羅泰燮)·김태산(金泰山) 등과 함께 주계장(主計長)에 임명되었다.

1941년 11월 광복군이 서안(西安)으로 이전됨에 따라 광복군의 경리(經理)를 맡아 광복군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

1942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직원에 임명되어 회계업무를 담당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자 가족을 사천성(四川省) 기강( 江)에 안주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동년 3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계과장(主計課長)에 임명되어 1944년 6월까지 계속 늘어나는 광복군 대원의 보급지원 등 조달업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4년 6월에는 다시 임시정부 내무부의 경무과원(警務課員)에 임명되어 1945년 1월까지 임시정부 요인의 경호업무를 맡았으며, 1945년 6월에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제2과에 소속되어 조국광복시까지 복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0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314·472·515·694·85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31·93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86·60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6·357·372·37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1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57·85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민영구 - 서울 -
본문
1909년 7월 21일 서울 종로구 인의동(仁義洞)에서 독립운동가 민제호(閔濟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교섭 활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민필호(閔弼鎬)가 작은 아버지이다.1919년 만세운동 이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원동중학교(遠東中學校)를 거쳐, 1930년대 초반 만국항해전문학교(萬國航海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박수송회사인 상해화풍수선회사(上海和豊輸船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강(長江)을 이용한 중국 군대와 군수품 수송 작업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939년 2월 류저우(柳州)에서 김동수·박영준·김인·지달수 등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결성에 참여하였다. 벽보 부착이나 합창과 연극 공연 등을 통한 선전활동을 하며,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항전의식 고취와 한·중 연대의 필요성을 홍보하였다.1940년에 들어 한국광복군 창건이 본격화되면서, 정식 출범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8월 4일 광복군총사령부가 구성되었다. 총사령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 부관장은 황학수, 주계장(主計長)은 조경한이 맡았다. 이때 지달수·나태섭·김의한 등과 같이 주계(主計)에 임명되었다.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성립식을 거행한 광복군사령부는 당시 중국군의 전략요충지인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있는 군사특파단과 임무를 교대하고, 향후 광복군의 활동을 지휘할 전방지휘부의 성격을 띤 ‘서안판사처(西安辦事處)’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11월 14일 충칭을 출발한 황학수 총사령대리 이하 광복군총사령부 지휘부는 11월 29일 시안에 도착하여 총사령부 서안판사처를 설치하고, 군사특파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이때 지달수와 경제조 조원에 임명되어 경리 업무를 맡았다. 당시 계급은 광복군 부령(副領)이었다.1942년 9월 김구 등 충칭 거주 한국독립당 당원들 명의로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워싱턴의 미국인 변호사 존 스태거(John Stagger)에게 보내는 감사편지에 이름을 올렸다. 이해 12월 24일 임시정부 재무부 부원으로 발령되었으며, 1943년 3월 30일 재무부 주계과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3월 15일 김구·이시영 등 한국독립당 지도부 인물들이 속한 제1구 당원이었다.1943년 8월에는 광복군총사령부 군수처 조달과 과원에 임명되었다. 중국 측의 지원이 절실하고 중요했던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과 군수처장이 중국인이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조달 업무를 맡게 된 것은 역량에 대한 평가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4년 6월 1일 임시정부 생계과장, 12일 주계과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시기 강창제·김의한·안원생·박시창 등과 재중경한인생활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1944년 10월 ‘총사령부 잠행(暫行, 임시) 조직조례’ 제정으로 광복군 조직이 개편되자, 참모처 제2과 과원으로 배치되었다. 1945년 2월 임시정부 재무부 경리국장, 광복군총사령부 상교참모(上校參謀)에 임명되었다.광복군총사령부에서 중국문(中國文)으로 발행하는 선전기관지인 『광복(光復)』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과 전망에 관한 글을 실었다. 먼저 「싱가포르 군항의 해부(新嘉坡軍港的解剖)」에서, “싱가포르는 동방에서 가장 설비가 잘 갖추어진 난공불락의 군항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이 남진을 기도한 이후 영국은 싱가포르에 대한 방위를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미국도 싱가포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싱가포르 방어는 이전보다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만일 일본이 야심을 실행에 옮기고자 남침을 감행한다면 일본 해군은 반드시 싱가포르 부근의 깊은 바다에 수장되어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또 「적정(敵情) 연구 : 일본 해군은 어디로 진공하는가?(日本海軍向何處進攻)」에서는 “일본 국내의 경제는 이미 파산의 국면에 접어들었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물자 부족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영국과 전쟁을 벌일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또한 일본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미국의 태도이다. 이외에도 일본인이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영국이 대서양과 카리브해 일대 자국 근거지를 미국에 양여하는 경우이다. 가령 미국 해군이 자유롭게 버뮤다와 자메이카 등지의 군항을 이용할 수 있게 되거나, 세계 굴지의 싱가포르 군항의 도크와 병기창을 이용하고, 호주 시드니 군항의 장비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 미국 함대는 일본 함대에 비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니, 일본은 이 점을 깊이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민주 정치체제와 극권 정치체제(民主政體與極權政體)」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와 극권주의(전체주의) 양대 진영의 대립으로 전개되고 있는 바, 한쪽은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저항과 분투를 진행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흉폭한 수단으로 인민들을 노예 다루듯 통치하고 있다. 극권주의 통치자들은 완고하고 흉폭한 자들로 그들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인민의 언론·사상·종교의 자유를 빼앗고, 자신들의 통치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에 대한 압제를 계속하고 있다. 독일은 전세계를 폭력으로 지배하고 모든 자유를 그들의 십자가에 구속시키려고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는 “전쟁의 결과, 만일 히틀러식의 신질서가 승리하게 되면 수많은 비극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민주정체가 승리하게 되면 전후의 상황은 1939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 다음 “이번 전쟁은 이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달리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극권정체 하의 통치자들은 인민생활에 필수적인 식량을 제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복마저 제한하고 있다. 장래에는 아마 인종에 대한 제한도 출현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우려하여 공포와 재난의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계속 앞을 향해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과 외국어 능력을 사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일제 패망 후 광복군과 한인 교민의 안전·보호와 귀국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이 조직되면서, 1945년 10월 31일 총무처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3월 31일 한국독립당 난징구당부(南京區黨部) 위원장 대리직을 맡고 있었다. 이후 한인 교포들의 생활과 귀국 문제 등에 대한 지원 활동을 벌이다가, 1947년 6월 한인 교포 1,000여 명과 함께 귀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전부터 조선해안경비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해군 인천만기지사령관, 해군본부 항무관, 후방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59년 3월 10일 해군사관학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7월 3일 해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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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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