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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637
성명
한자 梁在興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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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서천(舒川), 한산(漢山), 마산(馬山) 독립만세 사건 시(獨立萬歲事件時) 주동 인물(主動人物)의 한사람으로 활약(活躍)하고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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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충청남도 부여(扶餘) 사람이다.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지휘아래 신장리 장터에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며 시위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유성렬(劉性烈) 등 6명이 경찰출장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고시상(高時相)·김인두(金印斗)·박재엽(朴在燁)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를 깨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171·117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2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양재흥 - 충남 부여(扶餘) 마산면 만세시위
본문
1884년 5월 2일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충화면(忠化面) 가북리(可化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일어난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순사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마산면에서는 송기면(宋箕勉)을 중심으로 이근호(李根浩)·임학규(林學圭)·송여직(宋汝直)·유성열(劉性烈)·이동홍(李東洪) 등 기독교계 인물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한 송기면은 1919년 3월 중순경 주변 기독교인들과 협의하여 마산면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마산면 신장리 장터의 장날인 3월 29일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각자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구체적인 만세시위 준비를 마치고 예정된 3월 29일 오전 11시경 장터로 나아갔다. 송기면과 유성열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것을 신호로 송여직은 주민들에게 “우리 조선이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을 연설하였다. 그 사이 이근호·임학규·이동홍 등은 주변 주민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비록 신장리 주민은 아니었으나, 신장리는 부여군 충화면과 인접하여 큰 장이 서는 곳이어서 장날에 나왔다가 이들의 호소를 듣게 되었다. 이에 크게 공감하여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송기면·이근호 등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 대열을 형성하고 장터의 곳곳을 활보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이한규(李翰圭) 등 일제 경찰들에게 송기면·유성열·송여직 등 시위 주도자들이 현장에서 연행되자, 이근호와 나상준(羅相俊)의 지휘에 따라 순사주재소로 달려가서 송기면 등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이 이근호와 나상준도 붙잡으면서 만세시위의 즉시 해산을 명령함에 더욱 저항심이 커졌다. 계속되는 일제 경찰의 시위 주도자 체포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규모는 더욱 불어나서 2,000여 명이 넘게 되었다. 이들과 함께 더욱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체포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일제 경찰은 끝내 송기면 등 시위대 참여자들을 석방하지 않았다.이에 크게 분노하여 고시상(高時相)·박재엽(朴在曄) 등과 “체포 구금된 인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주재소를 공격하자”고 외치면서 만세시위대를 종용하였다. 고시상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순사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창문과 유리창을 파괴하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하였다. 체포된 주도자들의 석방을 거부하는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는 과정에서 당황한 일제 경찰이 발포한 권총의 총탄을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주재소 습격의 결과 구금된 송기면·유성열·송여직·이근호·나상준 등 체포된 주도자 전원을 구출할 수 있었다.이날의 시위 후 일제 경찰의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색출 과정에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만세시위 참여와 주재소 습격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동일한 판결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3년간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징역 3년 공주지방법원 1919-05-1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징역 3년(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9-07-2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10-0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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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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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새장터3·1운동기념비 충청남도 서천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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