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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486
성명
한자 元鍾潗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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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7 정평 독립만세 시위(定平獨立萬歲示威)의 주모자로서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취지연설(趣旨演說)을 하였으며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1919. 5. 17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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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함경남도 정평(定平)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7일 정평읍 장날을 이용하여 장예학(張禮學)·윤화락(尹和洛)·노문표(盧文彪)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5일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구해 읽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날 그는 그의 집에서 이대관(李大關)을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말하고, 태극기 1백여매를 제작하였다.

그는 배홍청(裵弘靑)·노용빈(盧龍斌)·주호택(朱鎬澤)에게도 만세시위계획을 의논하여 찬성을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또 6일에는 장예학·노문표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이종하(李宗夏)에게 대형 태극기 2개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3월 7일 약속대로 부내면 풍남리(府內面豊南里)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68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997·99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원종집 - 함남 정평(定平) 정평군 부내면 만세운동
본문
1888년 8월 13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풍양리(豊陽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7일 정평군 부내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 소식을 듣자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사를 그만둔 뒤 고향으로 돌아가서 대서업(代書業)을 개시하였다.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1914년 국권회복을 염원하는 한인들이 거주하는 만주 용정촌(龍井村)을 거쳐서 1915년 두도구(頭道溝)로 이주하였다. 그 곳에서 대서업을 경영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친일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자 일본 영사관에 의해서 압송된 후 1916년 1월부터 향후 3년 동안 중국에 재류하는 것을 금지함과 동시에 신변을 회령(會寧) 헌병분대로 인도되었다가 고향인 부내면 풍양리로 돌아갔다.한편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대표 및 학생대표들은 만세시위와 독립선언서 낭독을 주도하고,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함으로써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함경남도에서는 3월 초순부터 천도교 인사들과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서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3월 2일 밤에 함경남도 정평군 부내면(府內面)내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그런데 누가 어떠한 경로로 정평 읍내까지 독립선언서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정평 헌벙분견소의 일본 헌병은 독립선언서 16장을 압수하고 정평군 일대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향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3월 7일 부내면에서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1919년 3월 1일 이후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을 비롯해서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3월 5일에는 독립선언서를 확보하였다. 독립선언서를 읽은 후, 3월 7일 읍내 풍양리에서 열리는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대관(李大關)과 함께 자택에서 태극기 100여 기를 제작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울러 배홍청(裵弘靑)·노용빈(盧龍斌)·주호택(朱鎬澤)에게 참여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3월 6일에는 이종하(李宗夏)에게 크고 작은 태극기 2기의 제작을 부탁하였다. 한편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장예학(張禮學)·노문표(盧文彪)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3월 7일 장예학은 태극기를 휴대하고 부내면 풍서리(豊西里)에 거주하는 윤화락(尹和洛) 문표·노용빈 등과 함께 풍남리에서 마을 주민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3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집결하였다. 윤화락은 시위대가 모인 자리에서 만세시위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주로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경하할 경사다”, “독립선언서를 읽은 기쁨으로 모두 만세를 부르자” 라고 역설하였다. 장예학은 시위대에게 태극기를 배포하였으며,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노용빈은 약 60명의 마을 주민들을 인솔해서 남산리(南山里) 도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구한국 국기를 흔들었다.같은 날 부내면 읍내에서도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부내면 남산리에 거주하는 잡화상 김순연(金順淵)을 비롯해서 풍서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노용빈과 함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오후 4시에는 기독교인 13명이 읍내 시장에서 기독교도 13명이 시장 군중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면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참여한 13명을 연행하였다. 헌병대의 해산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 날 오후 8시 무렵 한경만(韓慶萬)과 김순연은 주민 200여 명을 이끌고 정평헌병분견소와 정평군청 앞으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부내면에서의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3월 8일 부내면 읍내에서는 학생 8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정평헌병분견소 헌병들은 무력을 동원해서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같은 달 12일 부내면 읍내에서는 천도교도와 개신교도을 주축으로 80여 명의 시위대가 모인 가운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출동한 헌병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3명을 연행하였다.일제 군경에 의해서 정평군 부내면 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중 일부를 취소하고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일본이 한국을 낮게 보는 조치, 군사통치, 언론과 출판의 자유 박탈 등을 비판하면서 상고하였으나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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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 6월(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9-05-17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6-1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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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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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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