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1917년 원주보통학교(原州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동년 3월 서울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학교를 중퇴, 고향인 횡성으로 내려가서 동지를 규합한 다음 천도교(天道敎)인들과 합세하여 3월 11일 횡성읍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농림주식회사(農林株式會社)의 주식 모집원으로 가장하여 전남(全南) 각지에서 많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계속해서 신덕영·노기준(盧基準)과 같이 전남 담양군(潭陽郡)과 곡성군(谷城郡)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에 나서며 1920년 11월 5일 노기준과 함께 광주(光州)로 가던 중 일경에게 붙잡혀 1921년 5월 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한 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중국 산서성 태원부(中國 山西省 太原府)에서 안창남(安昌男)·신덕영(申德永)·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였다. 또한 1927년에는 단원들과 더불어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북만주(北滿洲)에 비행학교(飛行學校) 설립을 계획하고 필요한 자금의 모집과 공명단지부(共鳴團支部)를 서울에 설치하기 위해 김정련·이선구(李善九) 등과 함께 1929년 4월 서울에 잠입하였다.
동년 4월 20일 동지들과 서울 망우리(忘憂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서울에서 춘천(春川)으로 가는 일본 우편물 수송차를 권총으로 엄습하여 자금을 마련한 뒤 강원도 방면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일행의 행적은 곧 일경에게 알려져 경기(京畿)·황해(黃海)·충북(忠北)·강원(江原) 등 5도의 경찰과 일본군 제19사단을 상대로 그와 동지들은 양주 천마산(楊州 天麻山) 일대에서 용감한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거사로 1929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06·80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74∼68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2권 3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62∼635면
- 고등경찰요사 17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0·23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6면
- 고경보고서(1920. 12. 8 고경제378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