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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장덕준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위원 겸 논설위원

미국 의원단 중국방문 시 중국 북경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취재 및 한국 독립 호소

간도(경신) 참변 당시 일본군의 한국인 학살 진상 취재

일본군사령부를 방문하여 학살 진상 추궁 후 행방불명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장덕준

장덕준 , 1892 ~(1920) , 독립장 (1963)

동포로서는 차마 보지 못할 비극을 목도하게 되어 피 많은 그로서는 혈조에 뛰노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밤이면 그들과 목에 피가 마르도록 언쟁을 하였던... 어느 날 안개가 잦은 이른 아침에 낯모를 일본 사람 두세 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는 영영 소식이 잦아지고 말았었답니다.

- 동아일보 (1925. 8. 30.) -

출생과 성장

장덕준은 1892년 6월 25일에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 벌판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장붕도(張鵬道), 어머니는 김현묘(金賢妙)이다. 아버지는 10여 세 때에 돌아가시고 편모 김현묘의 슬하에서 자랐다. 동생 장덕수는 동아일보 창간 당시 주필이고 후에 정치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장덕준은 어려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1907년에 재령읍 기독교소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에 졸업하였고, 이어서 명신중학교(明信新中學校)에 진학하여 1911년에 학업을 마쳤다. 졸업 후에는 모교의 교사로 임명되어 2년간 봉직했다. 장덕준은 졸업 후 한때 농사일을 하면서 일본의 중학교 강의록과 와세다대학 강의록으로 공부하였다 한다.2)

1914년에는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하여 조선문 신문부 주간이 되었다. 일본인 경영 신문이었지만 기자로 활동하면서 평양의 명사들인 조만식(曹晩植), 김동완(金東完), 이덕환(李德煥) 등과 교류하였다. 이들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지식인들이고 평양사회의 중심인물들로 사회적 스승이었기 때문에 장덕준의 애국정신도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일본어 신문에서 언론인으로 첫발을 디뎠으나 1년 후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학 진학 예비과정인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 재동경조선인유학생 학우회가 발행한 『학지광(學之光)』 제6호(1915년 7월)에 ‘추송(秋松)’이라는 필명으로 「오인(吾人)의 이상」이라는 글을 실었다. 1917년 9월 30일에 열린 유학생 학우회 총회에서 10명의 평의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학우회 회장 김명식은 3년 후에 창간되는 동아일보 논설기자로 장덕준과 함께 근무하게 된다.

1917년에는 동경 조선기독청년회 부간사(副幹事)에 임명되어 1년간 재임했다.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17년 1월 23일에 창립된 노동동지회의 회장을 맡았다.3) 노동자와 고학생의 친목도모가 목적인 이 단체는 1920년 1월 25일 조선고학생동우회로 개편되었다.

1918년 3월 폐결핵으로 가나가와현 차가사키 남호원(南湖院)에 입원하였다가 같은 해 8월경 퇴원하였다.4) 신병으로 인해 1919년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는 관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귀국한 일시는 확인되지 않지만 1919년 11월 8일 서울에서 “경제를 연구하고 농상공의 장려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경제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5)

육영회 설립 추진과 동아일보 창간

장덕준 사진
장덕준 사진

장덕준은 김성수와 함께 「육영회(育英會)」 설립을 추진했다. 육영회 발기에 관해서는 1920년 3월 8일자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에서 작성한 보고에 의하면 중앙학교장 김성수와 황해도 재령 출신 장덕준 외 5명이 조선의 문화를 촉진하려면 인재 양성이 가장 긴급하기 때문에 조선 학생 중 품행이 단정하고 학력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외국에 유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육영회를 결성한다는 것이다. 육영회 입회원서는 경성 계동 130번지 김성수에게 보내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성수가 육영회 결성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6)

고등경찰이 주목했던 육영회 결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선사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높은 이상을 담은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은 많았겠지만, 매년 100원 이상을 납부해야 한다는 부담금 때문에 선뜻 입회를 신청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육영회는 고등경찰이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각 대신에게 보고했을 정도였던 것을 보면 방해와 탄압도 막중했을 것이다.

육영회 결성은 무산되었으나 바로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기자로 재직하게 되므로 조선경제회와 육영회 설립을 추진하던 그때부터 장덕준은 김성수와 뜻을 같이하면서 긴밀하게 협조하다가 동아일보를 창간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1914년 7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에 귀국했고, 장덕준은 1915년에 일본을 갔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일본에서 만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장덕준의 동생 장덕수가 김성수의 와세다대학 후배였고, 김성수의 학비 도움을 받았던 인연으로 김성수와 장덕준이 서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김성수는 서울 전동여관에 머물던 장덕준을 찾아갔다가 바로 그날 저녁 자신의 집에 모여 신문 발간 논의를 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통보’받기도 했다.7)

1919년 7월 무렵부터 유근, 김성수, 장두현, 장덕준, 이상협을 중심으로 민간신문 설립이 추진되고 10월초에는 제호를 『동아일보』로 정하고 총독부에 신문발행허가를 신청했다.8) 동아일보는 창간 2주년인 1922년 4월 1일자 신문에서 창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장덕준 씨 등이 “유력한 민간신문을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동지와 상의하매 사방 유지로부터 열렬한 찬동이 답지하였다고 회고했다.

장덕준은 창간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직접 고향인 황해도로 주금(株金) 모집에 나섰다. 창간 당시의 편집진은 편집국장 이상협, 논설주간은 장덕준의 동생인 장덕수였고, 장덕준은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다. 논설반에는 장덕준 외에도 편집국장 이상협, 정경부장 진학문과 김명식, 박일병이 있었다.

장덕준은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필명은 그의 호 ‘추송’)이라는 논설을 10회에 걸쳐 썼다. 이 논설에서 교토제국대학 법대교수 스에히로 시게오(末廣重雄)와 오가와 코우타로우(小川鄕太郞) 등이 제기한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一視同仁論), 3·1독립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여론을 비판했다.

1920년 5월 8일과 9일 2회에 걸쳐 한글학자 「환민(桓民) 한별」 권덕규(權悳奎)가 쓴 「가명인두상(假明人頭上)의 일봉(一棒)」이라는 글에 의하면 “장덕준은 원래 폐병이 깊은데다가 흥분하여 간부회를 하는 자리에서 책상을 치면서 분개하여 피를 토한 일이 있었다.”9)고 할 정도로 폐결핵이 악화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10)

창간기자 유광렬은 장덕준에 대해 “성질이 감격하기 쉽고 인정이 많았다.”고 했고, 같은 논설반원이었던 김명식은 “사내에서 어떠한 문제로 사장과의 간에 의견이 조화되지 못한 때 장덕준은 책상을 치면서 사장에게 말 전하는 사람을 나무라고 또 어느 선배에 대한 간곡한 정서를 솔직하게 토하는 것을 보고 모두 미칠 듯한 사랑을 주었다.”고 말했다. 논설반원들끼리 논쟁이 고조되면 장덕준은 “걸상을 때려 부셨을 때도 있었다”고 이서구는 회고했다. 또 “그따위 소리를 하고도 나라를 위한다는 놈이라 할 수 있느냐”고 험한 말을 내뱉으며 책상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5일자부터 6월 16일자까지 5차례에 걸쳐 황해도 재령·해주, 평안도 평양·진남포·강서·선천·의주·신의주 등지를 순회한 르포를 ‘삼민생(三民生)’ 취재로 싣는다. 기자가 이 서선(西鮮)지방을 돌아보니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조선인을 차별하고 학대하고 멸시하며 일본인 위주의 행정으로 일관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사부장 장덕준이 6월 4일부터 5일간 해주에 머문다는 기사11)로 미루어 ‘삼민생’이 장덕준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원단 취재 중국 특파원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외신으로 들어온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 방문을 주시하고 있었다.12) 1920년 여름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를 위해 장덕준을 중국으로 특파했다.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 일행 1백 명(하원 44명, 상원 6명 및 그 가족들)으로 구성된 미국의원단은 이해 7월 초에 미국을 떠나 8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해서 철도편으로 중국대륙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들 일행을 통해 독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형성할 기회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미국의원시찰단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안창호(1878 ~ 1938)가 주비위원장을 맡아 6월 28일에는 환영 및 외교 예산 1만 1천 4백 원을 계상했다.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기독교와 천도교 주도로 「독립원조청원서」를 제출하고 시위운동 등을 일으킬 여러 가지 비밀계획이 세워졌다.

장덕준 사진
장덕준 사진

장덕준은 7월말 베이징으로 떠났다. 공식적인 출장목적은 중국의 정세 취재였다.13) 동아일보는 1920년 8월 8일부터 8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장덕준이 보낸 「동란의 북경에서」라는 기사를 통해 중국 상황을 보도했다.

7월 28일 만주에 있는 펑톈(奉天, 오늘날 심양) 총영사관을 방문하여 북경 가는 사유를 말하고 “장쭤린(張作霖)의 독군서를 방문하겠으니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14) 8월 9일자에는 “직예파 총수 우페이푸(吳佩孚)를 방문해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8월 7일발’로 짧게 전하고 있다. 장덕준은 예고 없이 6일 우페이푸를 찾아갔으나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다음날 오전 7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페이푸와의 인터뷰 내용은 한참이 지난 8월 19일자에 첫 회가 나가고, 나머지는 또다시 일주일이 지난 26일자와 27일자에 실렸다. 19일자 기사에서 ‘8월 7일 씀’, 27일자 기사에서 ‘8월 7일 정오 풍대에서’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미뤄 장덕준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기사를 작성했지만 신문에는 뒤늦게 게재된 것으로 보인다.

우페이푸와 맞서고 있는 봉천파 장쭤린(張作霖)과의 인터뷰는 8월 13일 오후 3시부터 진행되었다. 8월 20일자와 21일자에 따르면 장덕준은 12일 인터뷰를 위해 장쭤린의 숙소로 찾아갔으나 거절당하고 오사카마이니치 기자의 주선으로 다음날 일본 신문기자단 15명과 공동 인터뷰를 했다. 20일자는 ‘8월 13일 석양에’, 21일자는 ‘8월 13일 밤에’ 기사를 작성했음에도 신문에는 뒤늦게 인터뷰 내용이 게재된 것이다.

미국의원단 일행 150명 중 50명이 베이징에 도착한 날은 8월 14일이었다. 미의원단은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여 해산하고, 이 가운데 50명이 10일 베이징으로 향한 것이다. 8월 11일자 신문은 미의원단이 10일 베이징에 도착했다고 보도했으나 8월 12일자는 ‘상해특파원 10일 발’ 뉴스로 “미의원단이 북경을 향해 아침에 출발했다”고 전하고 있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들에게 한국문제에 대한 진정서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으나 상하이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안창호와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면담

장덕준은 베이징에서 미의원단을 취재할 때 상하이에서 온 안창호의 도움을 받았다. 장덕준이 베이징에 온 사실을 안창호에게 알려준 사람은 상하이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의 나다니엘 페퍼(Nathaniel Peffer, 1890 ~ 1964) 기자였다. 안창호는 8월 16일 여운형, 황진남, 장덕준과 함께 미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만나러 갔다.15)

포터는 ‘자신의 방문이 공식이 아니고 사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국 일에 극히 찬조할 것이나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답’이라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헌법과 일본인의 불법행위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면서 한국 상황에 관심을 표명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이와 관련하여 “국내와 상해를 연락하던 사람 중에 당시 동아일보사의 장덕준이 있었는데 그는 통신원을 가장하고 북경에 머무르면서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였고 또 북경에서 여운형·황진남과 함께 시찰단을 방문하여 영문으로 만든 ① 한국 헌법, ② 한·일관계, ③ 일본인의 여러 불법 행위라는 책자를 제공하며 일본의 한국 통치 실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덕준은 8월 18일 낮 12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미 의원단장 스몰을 인터뷰하고 ‘서울에 도착하게 되면 한국 사람의 환영회에도 출석하여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8월 24일자 3면에 크게 보도했다. 1면에는 논설주간 장덕수의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노라」는 논설을 싣고, 이 논설을 영문으로도 나란히 게재했다.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스몰은 장덕준에게 “이번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부러 우리 일행을 만나기 위하여 이곳 베이징까지 온 안창호 씨도 우리는 매우 반가히 만나보았습니다.”라고 전했다. 미국 의원단 일행이 베이징을 떠나 만주를 경유하여 서울로 오는 중간 기착지인 펑톈(奉天)부터의 취재는 김동성(金東成) 특파원이 맡았다.

의원단 일행은 서울로 오는 길목인 평양에서는 8월 3일, 평안남도 제3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8월 10일에는 신의주 철도호텔에도 폭탄이 터졌다. 의원단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는 8월 24일 밤 서울에 도착했다. 숙소로 정한 조선호텔로 가는 연도의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군중이 운집해 있다가 만세를 부르는 소동이 일어나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경찰과 일대 충돌이 벌어졌다. 경찰은 권총을 발사하고 100여 명을 검속했다.

전년도에 3.1운동이 일어났던 직후였기에 총독부는 사태가 확대될 것을 우려했고, 치안상태는 극도로 긴장되었다. 기마 순사를 비롯하여 경찰은 8월 25일 아침까지 특별경계를 하면서 군중의 해산을 명령하여 군중은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때마침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괴질(怪疾)이 창궐하여 인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마치 제2의 독립만세사건이라도 터질 듯한 흥분과 긴장에 싸여 있었다.

총독부의 조선일보 두 차례 정간

동아일보는 미국 의원단의 조선 방문을 맞아 논설반의 장덕준을 베이징으로 특파하여 취재케 하였고, 펑텐부터 서울까지는 김동성을 파견하여 취재하도록 하였으나, 일본 철도당국은 김동성이 의원단과 같은 열차에 타지 못하게 하고 매일신보의 백대진(白大鎭)만 같은 차를 타도록 허용하였다. 백대진은 취재보다는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허황하다는 역선전에 열중하였다. 한편 동아일보 편집감독 양기탁(梁起鐸) 등은 의원단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 하다가 구인(拘引)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8월 27일 조선일보는 문제의 사설 「자연의 화(化)」를 게재하였다. 논설의 요지는 이렇다. 미국 의원단을 맞은 조선인들의 심정은 가뭄 끝의 비와, 목마름 끝의 물을 얻은 것과도 같다. 많은 주민이 흥분하여 세차고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심리와 행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누구의 명령, 지도에 의한 것도 아니다.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애써 1푼의 이익이라도 얻으려고 뛰어다녀야 하는 사람들까지도, 쾌연(快然)히 점포의 문을 닫고 분연히 활동하고 있다. 이 어찌 자연스러운 소위(所爲)가 아닐까보냐.

그런데도 이를 억압으로 막기 위해 수만 명의 경관이 활동하고 위력을 행하여 철시(撤市)한 점포의 문을 열라고 강요하고 혹은 구타하고 또는 행인을 몰아내고 통행을 단절할 뿐 아니라 심한 자는 칼을 뽑아들고 총을 쏘면서 기마로 충돌한다고 비판했다.

“우열한 당국의 소위(所爲)여. 자연의 화(化)는 즉 천운(天運)의 순(循)이다. 절세의 영웅, 이론(異論)의 성현도 여하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경찰대의 활동과 총검의 위세도 자연의 화(化)에는 어찌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의원단은 미국으로 돌아가면 자신들이 보고 들은 조선 민중의 행동을 무심히 넘길 수 없을 것이며 적지 않은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총독부는 이 사설의 발매 반포 금지 및 압수처분을 내리는 동시에 신문지법 21조를 적용하여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일주일간 유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인의 신문발행을 허가한 이후 최초의 정간이었다.

조선일보의 1차 정간은 1주일 후에 해제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2차 정간의 빌미가 되는 논설을 실었다. 9월 5일, 지령 제116호에 실린 「우열한 조선총독부 당국자는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 / 천하의 동정이 오사(吾社)에 폭주함」이라는 사설이 또다시 총독부를 크게 자극했다.

정간이 해제된 후 3일째에 실린 이 사설은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세우고 있는 총독부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공박했다. 조선일보는 3월 5일 창간이래 113호를 발행하는 동안 총독부는 지면압수 23회, 발행자에 대한 계책(戒責) 10여 차례 등 날로 압박에 압박을 가하였다고 지적하고, 일제에 아부하여 무문곡필(舞文曲筆)을 휘두르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면 “3천리 강토를 점거하고 2천만 민중의 생살을 임의로 행하는 조선총독은 일거에 우리 사의 발행권을 취소하고 기계, 재산을 압탈(押奪)하고 종업원을 주륙(誅戮)할 것이지” 어째서 겨우 1주일 정도의 정간에 그쳤느냐고 총독부를 비난했다.

경무국은 이 사설을 문제 삼아 같은 날짜로 즉시(9월 5일) 무기한 발행정지(무기정간) 처분으로 대응했다. 다음 날인 6일 오전에는 고등경찰과장 야마구치(山口安憲)가 서울의 각 신문기자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① 허위보도 ② 사실을 과장하거나 인심을 선동하는 보도 ③ 범죄수사에 방해가 되는 보도 등은 더욱 엄중히 단속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의 정간처분을 내린지 81일 만인 11월 24일에 이를 해제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잇따른 탄압에 따른 후유증과 경영난으로 즉시 속간하지 못하고 정간 89일 만인 12월 2일에야 속간호를 내놓았다. 속간을 준비하는 동안인 12월 1일, 발행 겸 편집인이었던 최강(崔岡)이 물러나고 권병하(權丙夏)가 뒤를 이었다.

동아일보 무기정간

조선일보가 2차 정간으로 발행이 중단된 상태에 있던 9월 25일 이번에는 동아일보마저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 이유는 9월 24일과 25일자 연속 사설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였다. 사설의 요지는 조선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는 행위가 미신이냐, 우상숭배냐를 논하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우상숭배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숭상하는 ‘신기(神器)’라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라고 지적했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인들이 신념의 중추로 삼는 거울, 구슬, 칼 등 이른바 3종의 신기를 모독[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 기사로 규정했다. 이 논설만이 아니라 8월 30일부터 연재해 온 「대영(大英)과 인도(印度)」(9월 25일까지 14회 연재)도 문제였다. 이 글은 20세기 인도에서 영국이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암암리에 이를 조선과 대비하였다는 사실도 동아일보를 정간시킨 이유의 하나였다.

총독부는 이렇게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후 여러 차례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총독부가 여러 차례 주의를 환기했고, 8월에는 발행인을 소환하여 최후의 경고를 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로마의 흥망을 논하면서 조선의 부흥을 말하며 이집트의 독립,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보도하면서 조선의 인심을 자극하고 영국에 대한 반역자를 찬양하면서 일본에 대한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으로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독정치를 부정하여 일반의 오해를 심절(深切)케 함에 노력했다.”고 정간 이유를 열거했다.

이리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같은 때에 함께 정간처분(발행정지)을 받아 신문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조선일보는 9월 5일부터 두 번째 정간 처분을 받아 신문을 내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동아일보마저 정간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11월 5일에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12월 24일에야 속간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동시에 발행되지 않은 기간은 약 2개월이다. 동아일보가 정간 당하던 날인 9월 25일, 장덕준은 부산의 예수교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강연을 하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된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의 정간은 해를 넘겨 1921년 1월 10일에 해제되었으나 즉시 속간하지 못하고 40일 후인 2월 21일부터 다시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정간 중에 장덕준은 일본군에 피살되어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었다.

신문은 정간되었으나 목숨 건 취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동시에 정간 중이던 이 무렵, 만주의 훈춘(琿瑃)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사건이었다. 장덕준은 이 소식을 듣고 현지로 달려갔다. 취재를 한다 해도 정간 중인 동아일보에 보도할 지면도 없었으며, 자신은 폐병에 걸려 혈담(血痰)까지 토하는 건강상태였다. 그러나 열정적 성격이었던 그는 단신 죽음의 땅으로 뛰어들었다. 장덕준이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 때는 10월 중순이었다. 그는 두만강에 접한 함경북도 회령을 거쳐 간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장덕준씨 조난기사동아일보, 1921. 10. 28.
장덕준씨 조난기사 동아일보, 1921. 10. 28.

동아일보는 1930년 4월 3일자 추도기사로 그의 최후와 관련한 글을 실었다. “10월 16일에는 함경북도 지방을 시찰하다가 회령에 이르러 일본이 간도에 출병함을 당면하였다. 본사에 통지하고 회령수비대장과 교섭해 종군기자가 돼 간도로 향하였는데 11월 6일에 무사히 간도에 도착했다는 전보가 있었고 10일에 「장덕준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와타나베(渡邊) 회령수비대장의 전보가 도착했다.”고 밝혔다.

장덕준은 간도의 현장에 도착하여 “빨간 피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16) 그는 국자가(局子街)에서 얼마 더 들어간 곳에 여관을 정하고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당하고 있는 광경 등 일군의 만행을 취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일인 두세 명에 불리어 나간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는 우리 언론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되었다.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동아일보는 정간 중이었으므로 취재를 해도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장덕준은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나섰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장덕준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나남헌병대장 스즈키 타케오미(鈴木武臣)가 조선헌병대사령관 마에다 노보루(前田昇)에게 보고한 기록이 있다.

“장암동 지방에 있는 일본군 토벌상황을 시찰하기로 하고, 11월 1일 용정촌에 도착해 조선인이 운영하는 삼성여관에 투숙하면서 각지를 둘러보고, 조선인 거류민회에 여러 차례 나가 강연 등을 했다. 11월 6일 장덕준은 용정촌 파견 헌병대장 와타나베 대위를 방문해 토벌상황의 시찰과 훈춘방면에 이르기까지 보호편의의 제공을 부탁하여 와타나베 헌병대장이 이를 승낙했다. 이날 헌병 일행의 마차를 타고 6일 오후 6시 용정촌을 출발해 밤 10시경 국자가에 도착했다…8일 밤 국자가 우시장 여인숙 관동여관에 투숙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장덕준으로 사료되는 조선인이 1명 나갔다는데 과연 장덕준인지 여부를 판정할 자료가 불충분하다.”17)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로 일본군이 장덕준은 암살하였음이 확실하다고 보도했다.

“…장덕준이 이에 대하여 참아 견디지 못하고 적의 군대에 들어가 적의 상관을 보고 그러한 불인도(不人道)한 행위를 힐책(詰責)하자 적측(일본군)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면 한번 함께 가서 보자하고 약속하기에 무심히 여관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는데, 밤중이 되어 일본군이 와서 말하기를 상관이 부르니 같이 가자고 하기에 장덕준은 의심이 들어 밤중이니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하여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하여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18)

의에 대한 용기, 봉공의 정신

「추송 장덕준형을 사(思)하노라」동아일보, 1921. 2. 22.
「추송 장덕준형을 사(思)하노라」 동아일보, 1921. 2. 22.

동아일보는 장덕준의 용기와 불굴의 기자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추모했다.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장덕준을 정간이 해제되어 속간한 이튿날인 1921년 2월 22일자 1면에 「추송 장덕준 형을 사(思)하노라」는 논설을 실었다. 논설반원이자 장덕준의 친구였던 김명식이 집필한 글의 마지막에 “추송 장덕준 형은 본사의 특파원으로 작년 10월경에 간도 방면의 험악한 형세를 조사키 위하여 출장하였다가 행방이 불명하여 탐지할 도(道)가 두절되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1925년 8월에도 2회에 걸쳐 독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장덕준의 순직을 다루었다.19)

億萬年生死不明 秋松張德俊氏 (二) 日人과 同伴 出家, 其後는 月星風血雨 (讀者와 記者欄)
億萬年生死不明 秋松張德俊氏 (二) 日人과 同伴 出家, 其後는 月星風血雨 (讀者와 記者欄)

“본사 특파로 간 장덕준씨는 국자가(局子街)에서도 얼마를 더 들어가서 있던 곳에 여관을 정하고 낮에는 종군기자로 군인들의 뒤를 따라 무고한 동포들이 피신하여 있는 벽촌 혹은 심산궁곡에서 동포들을 만나게 되였더랍니다. 그때 뉘의 말을 들으면 그는 이르는 곳마다 사람으로서는! 아니 동포로서는 차마 보지 못할 비극을 목도하게 되어 피 많은 그로서는 혈조에 뛰노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밤이면 그들과 목에 피가 마르도록 언쟁을 하였더랍니다. 그렇게 밤잠을 자지 못하여 가며 의분을 참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그는 어느 날 안개가 잦은 이른 아침에 낯모를 일본 사람 두세 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는 영영 소식이 잦아지고 말았었답니다.”

“그의 형 장덕주씨가 다시 관북만리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아우의 비껴간 길을 밟아 백설이 만건곤한 간도에 이르렀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 밑으로 잦았는지 모름의 세계에서 배회하는 아우의 생사존몰을 알 길이 없었더랍니다. 잔인한 창끝에 원혼이 누리에 차고 포연이 채 사라지지 않은 쓸쓸한 벌판을 헤매이며 찾다 못하여 눈물이 앞을 가리는 길을 돌이켜 돌아왔을 뿐이었답니다.”

“형 장덕주가 간도에서 탐문한 바에 따르면 회령에서 떠날 때 그곳 수비대장이 끝까지 거절하는 것을 기어이 떠났다 하며 간도에 들어와서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본 뒤 모 여관에 묵고 있다가 군대가 토벌지대로 떠나는 날에 역시 군대마차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故 장덕준 선생의 추도회 광경동아일보, 1930. 4. 3.
故 장덕준 선생의 추도회 광경 동아일보, 1930. 4. 3.

장덕준이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殉職者)로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20)

이 추도식에 참석했던 김동진(金東進)은 장덕준이 일본군의 종군기자 허가를 얻어가지고 취재를 떠났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고 말하면서 “의에 대한 용기, 봉공(奉公)의 정신, 이 두 가지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데 대해서 나는 씨를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별달리 사모코저 하는 것이다”라고 추모했다.21)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에 ‘기자협회 기장(記章)’을 제정하였는데, 메달의 뒷면에는 장덕준 기자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장덕준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기리고 본받자는 취지였다. 기자협회 기장은 사실보도 그 자체보다는 기자로서의 용기와 사명감을 더 높이 평가하기로 했다.22) 대한민국정부는 1963년 장덕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각주

1) 유광렬, 「만주 벌판서 취재 중 순직」, 『기자 반세기』, 서문당, 1969, pp.272 ~ 276. 한편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에 실린 장덕준의 약력에는 원적이 황해도 재녕군 하호면 고산리(黃海道 載寧郡 下湖面 孤山里)로 되어 있다.

2) 유광렬, 「만주벌판서 취재 중 순직」

3) 최상원·한혜경, 「일제강점기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개국에 걸친 기자 장덕준의 언론활동에 관한 연구」, 『동북아문화연구』 30호, 1912, pp.145 ~ 164.

4) 『학지광』 제17호

5) 매일신보 1919.11.11, 11.12

6)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소장, 高秘 第6409號. 密 第102号 其753 大正9年 3月8日 高警第6409号,「秘 育英会組織ノ件」.

7) A기자, 「김성수 씨의 반생(半生)과 분투생활기」, 『신인문학』, 1935년 8월호, pp.20 ~ 24. 최상원·한혜경, 위의 글에서 재인용.

8) 「분투 2년, 동아일보 과거」, 동아일보, 1922. 4. 1.

9) 유광렬, 앞의 글, pp.227 ~ 231.

10) 유광렬, 「동대문 정거장의 장덕준 군」, 『삼천리』, 1931, pp.14 ~ 15.

11) 동아일보, 1920. 6. 9.

12) 동아일보, 1920. 4. 8.

13) 동아일보, 1930. 4. 3.

14) 동아일보, 1920. 8. 9.

15) 「안창호 일기」, 『안도산전서』 중, 범양사, 1990, p.388

16) 동아일보, 1925. 8. 29.

17) 최상원 한혜경, 위의 글.

18) 「장덕준씨 조난상보, 적의 만행을 힐책한 일로 야간에 유출(誘出)하야 암살함」, 독립신문, 1921.10.28.

19) 「동포의 원혼을 차저 단신으로 북국만리, 억만년 생사불명, 추송 장덕준씨」, 동아일보, 1925. 8.29.

「일인과 동반출가, 그 후는 성풍혈우(腥風血雨), 억만년 생사불명, 추송 장덕준씨」, 동아일보,1925. 8.30.

20) 「불귀 원혼에 비장한 추억, 고 장덕준씨 추도식, 「동아일보」1930.4.3.

21) 김동진, 「추송의 사업과 기개」, 삼천리, 1930, 초하호, pp.59 ~ 60.

22) 『기자협회보』, 1971.6.25, 1면,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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