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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오기호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주요공적

을사오적 처단 의거 계획

대종교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전개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대전현충원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오기호 / 이기 / 홍필주

오기호 , 1865 ~1916 , 독립장 (1962) 이기 , (1848) ~(1909) , 독립장 (1968) 홍필주 , 1857 ~1917 , 애국장 (1990)

1. 을사오적 처단 계획의 배경과 전개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군은 대한제국 전역에서 자유롭게 주둔할 권한을 확보하였다. 이후 일본은 고문정치를 실시하고, 황무지개척권 요구와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경제까지 장악하였다. 국권은 외교·군사·재정 전반에서 빠르게 잠식되어 갔다.

이에 맞서 보안회가 조직되어 국민적 저항을 주도했고, 유생들은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인들은 상무사를 중심으로 연설회를 열어 일본을 규탄하였다. 계층과 지역을 넘어선 범국민적 저항 앞에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덕수궁 중명전에서 대신들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다.

원로대신과 유생들은 조약 무효화와 매국 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며 연일 상소를 올렸다. 안병찬은 도끼를 메고 덕수궁 대안문(大安門) 앞에서 “오적을 참수할 것”을 외치다 체포되었다. 이후 저항의 뜻을 천명한 자결 순국이 잇따랐다.

11월 27일 홍만식이 음독 자결하였고, 11월 30일 민영환이 자결하며 “살기를 요구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게 될 것”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이튿날 조병세가, 이어 김봉학과 이상철이 목숨을 끊었고, 이듬해 송병선도 자결하였다.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고, 전라도 장성의 기산도를 비롯한 결사자(結社者)들은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이보다 앞서 호남 출신의 전직 관료들인 나철·오기호·이기 등은 외교적 수단을 통해 국권 회복을 모색하였다.

오기호, 이기 등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장서한 전문을 소개한 기사(대한매일신보 1905.11.12.)ⓒ국립중앙도서관
오기호, 이기 등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장서한 전문을 소개한 기사(대한매일신보 1905.11.12.)ⓒ국립중앙도서관

그들은 1905년 7월부터 도쿄로 건너가 일왕과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들은 직접 행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07년 1월 나철·오기호·이기 등은 을사오적 처단을 목표로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전직 관료, 개신유학자, 의병 출신 인물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자금을 확보하고 동지를 모집했다. 여러 차례 거사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4월 3일 이들은 의거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 평리원(平理院)에 자진 출두하였다. 이는 외교적 호소에서 의열투쟁으로 전환된 당시 항일운동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오기호, 외교항쟁에서 의열투쟁으로

오기호(吳基鎬, 1865~1916)는 전라남도 강진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경숙(敬叔), 호는 손암(巽菴)·소남(小南)이며, 대종교 교인이 된 후 혁(赫)으로 개명하였다. 1901년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종전이 임박하자 오기호는 나철·이기·홍필주와 함께 대한제국 대표단의 강화회담 참여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7월 일본으로 건너가 정계 인사들에게 장서를 보내 대한제국 주권 보전과 일본의 침탈 중단을 요구하였다. 그는 한·청·일 삼국동맹 체결, 일본인의 한국 내 불법 행위 금지 등 6개 항목을 제시하며 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이 장서는 1905년 8월 30일부터 9월 2일까지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게재되었다.

爾髮則薙 爾服則洋 薙髮洋服 爾心則傷

萬里東來 其意何居 果以天下 爲任已歟

머리는 깎았고, 양복을 입었구나.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되 마음은 슬프구나.

만리 먼 동쪽에서 왔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과연 천하를 구할 임무로 삼았는가?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오기호는 11월 3일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목이 잘려도 협약에 날인할 수 없다”는 급전을 보냈고, 같은 날 이토 히로부미와 일왕에게 상소하여 병탄 야욕을 규탄하였다. 1906년에도 일본 정계 인사들과 접촉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외교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을사오적에게 직접 책임을 묻기로 결심하였다.

이기와 자신회 동지들ⓒ독립기념관
이기와 자신회 동지들ⓒ독립기념관

1907년 1월 오기호는 나철·이기 등과 함께 자신회를 조직하고 을사오적 처단 계획을 주도하였다. 자금 확보와 권총 구입, 결사대 모집 등 실무를 직접 관장하였다. 「참간장(斬奸狀)」을 작성해 의거의 명분을 밝혔다. 거사일은 여러 차례 조정 끝에 3월 25일(음력 2월 12일)로 정해졌다.

오기호는 박제순 암살조를 지휘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함께 평리원에 자진 출두하여 모든 문서를 제출하며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통감부는 이를 ‘내란 예비·음모’로 규정해 유배 5년형을 선고하였다.

1908년 3월 특사로 석방된 오기호는 호남학회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측량학교 설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실업교육을 통한 민족 실력양성에 힘썼다. 1909년에는 대종교 중광에 참여하였다. 그는 1916년 서거할 때까지 외교·의열·계몽·종교 등 여러 방면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이기, 유학자에서 의열투쟁의 주창자로

이기(李沂, 1848~1909)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효산자(曉山子) 등이다. 1880년대 임오군란 등 국가적 위기를 목격하면서 개혁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0년 대한제국의 양지아문(量地衙門) 양무위원(量務委員)으로 활동하면서 구국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분할 통치 기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902년에는 일본 이민법 개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의 막바지에는 나철, 오기호, 홍필주와 대한제국 대표단의 러일강화회담 참여를 촉구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같은 해 9월 홍필주와 함께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정계 인사들에게 항의서를 보내며 을사늑약 저지를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외교적 노력은 한계에 부딪혔다. 이기는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의열투쟁을 모색하였다. 1907년 1월 그는 을사오적 처단을 계획하며 자신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소재)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소재)

이기는 「자신회취지서」를 작성하여 의거의 이념을 정립하였다. “오백 년 정치는 모두 이미 부패하였고 이천만 인구는 이미 노예가 되었다”며 현실을 비판하고, “뇌수를 깨끗이 씻어 새로운 사상을 일으키고, 인권을 되찾아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천명하였다. 자신회 조직과 오적 처단이 민족 해방을 위한 정치적 행위임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거사가 실패하자 이기는 「자현장(自現狀)」을 작성하여 동지들과 함께 평리원에 자진 출두하였다. 법정에서 을사오적 처단의 정당성을 밝히고, 이것이 국권 회복을 위한 의거임을 주장하였다. 이기는 유배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3월 25일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이기는 호남학회에서 교육부장과 편집부장을 맡아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을 발표하며, 체육·덕육·지육의 삼육을 통한 신학문 교육과 학교 설립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909년 2월 5일(음력 1월 15일) 대종교 중광에 참여하여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고, 단군을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한성에서 급서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홍필주, 자신회의 일원에서 강제합병반대운동의 중심으로

홍필주(洪弼周, 1857~1917)는 충청남도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사량(士良), 호는 자은(紫隱)이다. 1901년 2월 중추원의관에 제수되었으나 관료사회의 부패에 환멸을 느껴 한 달 만에 사직하고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04년 4월 한일의정서 체결과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강요에 맞서 홍필주는 이기·이상설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고 여섯 차례에 걸쳐 규탄 상소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수 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爾髮之薙 爾服之罽

一身兩世

其色蒼 其氣幽

與爾不相離者 天下之憂

머리를 깎고 털옷(양복)을 걸치니

내 한몸이 두 세상을 사는 것 같구나.

얼굴빛은 창백하고 마음은 우울하기만 하니

나를 항상 떠나지 않는 것은 천하의 근심이로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 홍필주는 고종에게 일진회에 맞설 민중 세력 조직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대한자강회월보』에 「민공죽가(閔公竹歌)」·「공화기멸(空華起滅)」·「신학육예설(新學六藝說)」 등 다수의 글을 기고하며 부패한 권력을 비판하고 교육·산업 진흥을 역설하였다.

홍필주는 1904년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래 나철·오기호·이기 등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처단을 계획할 때 참여하며 굳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협회를 창립하여 근대교육 보급에 나섰다.

도일(渡日) 직후 단발을 한 홍필주의 모습
도일(渡日) 직후 단발을 한 홍필주의 모습

1909년 안중근 의거 이후 일진회가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하자, 홍필주는 합병반대운동의 중심에 섰다. 10월 5일 서대문 원각사에서 열린 국민대연설회에 참여하였고, 이 자리에서 조직된 국민연설단회에서 대한협회 총무로서 합병반대운동을 실무적으로 이끌었다. 12월 9일 국민연설단회 회의에서 그는 송병준의 중추원 고문직 파면과 일진회 소속 관리 전원 파면을 요구하는 발의안을 제출하였으며, 한일합방 반대 상주문 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12월 10일 통감부에 건의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통감부가 연설회를 금지하고 조직 내부에 타협론이 확산되는 동안에도, 홍필주는 끝까지 반대운동의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통감부에서는 그를 합병반대운동의 ‘완강한 중심인물’로 평가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의 위기가 임박하자 그는 다시 도쿄로 건너가 전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등을 만나 일본의 한국 침략을 논박하며 마지막까지 외교적 설득을 시도하였다.

강제병합 이후 그는 기호흥학원(현 중앙고등학교) 초대 학무부장으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17년 12월 12일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 을사오적 처단 계획의 역사적 의의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으로써, 상소와 외교를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근본적으로 봉쇄하였다. 이에 따라 구국운동의 무게중심은 제도적 저항에서 벗어나 보다 직접적인 책임 추궁과 실천의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자신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을사오적 처단 계획은 이러한 전환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거사는 성패를 떠나, 국권 상실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역사 앞에 분명히 제기하고자 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을사오적 처단 계획에 참여한 오기호·이기·홍필주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이 흐름을 형성하였다. 오기호는 구국외교의 한계를 인식한 뒤 의열투쟁의 실행에 나섰고, 이후 계몽과 실업 진흥으로 활동 방향을 확장하였다. 이기는 의열투쟁의 이념과 논리를 정립하며 동지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며, 홍필주는 을사늑약의 책임을 묻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대한협회 창립과 합병반대운동을 주도하며 항일운동의 전선을 유지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상황에 따라 구국운동의 방략이 갱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다음 단계가 대종교 중광이다. 외교와 의열, 계몽운동이 모두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오기호·이기는 나철 등과 함께 민족의 뿌리를 확립하고 정신적 기반을 재건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1909년 2월 5일(음력 1월 15일)의 대종교 중광은 단군을 민족의 시원으로 재확인하고, 상실된 주권을 정신적 차원에서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을사늑약 이후의 좌절이 단지 종교·사상운동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 그간의 구국운동에서 축적된 저항 방식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을사오적 처단 계획의 역사적 의의는 ‘실패한 의거’에 있지 않다. 외교에서 의열로, 다시 정신운동으로 이어진 일련의 선택은 대한제국 말기 구국운동이 상황에 따라 스스로 방략을 조정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오기호·이기·홍필주의 활동은 국권 상실의 시대, 지식인이 나아간 책임의 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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