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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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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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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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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해
고인덕
, 1887 ~1926
, 독립장
(1963)
이세영
, 1870 ~1941
, 독립장
(1963)
한흥근
, 1890 ~1944
, 독립장
(1963)
정시해
, 1874 ~1906
, 애국장
(199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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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무장독립투쟁
의병부대원들의 모습(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무장독립투쟁은 의병에서 시작되어 쉼없이 계속되었다. 국운이 흔들릴 때마다 일어난 의병과 비밀결사 단체들은 전국 곳곳에서 조직하고 연대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하고,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무장독립투쟁가들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져나갔다. 국내에서 시작되어 간도와 연해주, 중국 관내로 넓혀져 간 독립운동의 지형은 수많은 의열단체와 군사투쟁의 기반을 이루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의열단에 지속적으로 밑거름을 제공한 고인덕. 대한제국 무관에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대한통의부의 군사위원장 등으로 거듭난 이세영. 연해주와 함경도, 서울을 이으며 강우규 의거를 돕고 항일유격대 활동을 전개한 한흥근. 을사늑약에 분개하며 최익현 의병에 합류하고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정시해. 이들의 투쟁은 끝내 무력을 통해 광복을 이루고 말겠다는 한국 독립운동의 끝없는 전진을 상징한다.
밀양에서 활동한 의열단의 숨은 후견인, 고인덕
고인덕은 1887년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의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밀양에서 이름난 재산가이자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기독청년회 등에서 활동하던 그는 청년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1918년 만주와 상하이(上海), 지린(吉林) 등지를 오가던 그는 1919년 3·1운동 후 국내로 귀국하여 밀양청년구락부(密陽靑年俱樂部)를 조직하며 청년운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봄 밀입국하여 활동하던 의열단원 이종암(李鐘岩)과 김상윤(金相潤)의 요청을 받아 이들에게 폭탄 제조기 및 폭약을 제공하였다. 이 무기들은 그가 상하이에서 큰 뜻을 품고 반입하여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이들이 합심하여 만든 폭탄은 1920년 12월 27일 일어난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에서 사용되었다.
옛 밀양경찰서 터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지)ⓒ독립기념관
1921년 이후에도 밀양을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계몽운동을 이어간 그는 줄곧 독립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기여’를 사람들에게 촉구하였다. 1921년 2월 10일에는 밀양읍 교회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안락의 근본은 고초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는데, 그 내용은 “한국 민족은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은 이민족의 방해가 있기 때문이니, 이천만 민족이 일치 협력하여 그를 배제함에 노력하고 그 필요를 위해 사재(私財)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150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이뤄진 연설은 청중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정작 고인덕은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별세한 아버지의 유산 중 일부를 매각하여 중국으로 보내 의열단 자금으로 쓰이도록 했는데, 무려 3,000원에 달했다.
의열단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인덕의 지원은 이후에도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그러나 1925년 만주에서 밀입국한 이종암이 경상도 일원에서 활동하던 중 체포되면서 관련 인사가 대대적으로 붙잡히게 되었다. 10여 명의 독립운동가 및 후원자들이 경북 경찰부에 압송되어 취조를 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1920년 고인덕의 폭탄 제공 등이 사실로 드러났다. 결국 또다시 일제 재판부에 회부되어 공판을 거듭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법원 신문 후 정신 착란을 일으키며 자해하게 되었다는 소식 등이 이어지는 중 끝내 1926년 12월 21일 밤 심장마비를 일으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덕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무장독립투쟁의 징표, 이세영
이세영은 1869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12대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좌현(佐顯), 호는 고광(古狂), 이명으로는 천민(天民)·유흠(維欽) 등이 있다. 어려서 한학을 배운 그는 1889년 근대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섭렵하였다. 육영공원 출신 학원(學員)들이 관료, 외교관, 교육자로 활동한 데 비해, 이세영은 홍주의병으로 활동하다가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군관이 되었다. 대한제국 군대에서 정위(正尉)까지 지내던 그는 1904년 낙향하여 본격적으로 의병전쟁에 합류하였다.
1906년 홍주 의병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의병들을 규합하고 훈련을 담당하며 의병의 전투력을 배가시켰다. 그리고 공주, 청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 체포되어 황해도 황주에서 유배 생활을 겪었다. 1908년 유배에서 풀려난 이세영은 충남 청양 등지에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부여 등지에서 대한협회(大韓協會)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국권이 강탈당하자 결국 국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홍주의병의 전투지인 홍주성 조양문ⓒ독립기념관
만주로의 망명을 모색하던 이세영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단체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가 결성되자 이에 합류하였다. 독립의군부는 1912년 서울에서 조직된 복벽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로 홍주의병과 태인의병 출신 인사들이 결성하여 조직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의군부 핵심 인사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자, 이세영은 결국 1913년 6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1916년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하였고, 교관 및 교장이 되어 독립군 인재 양성에 매진하였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대표 39명에 이름이 오르고, 한성 임시정부의 참모총장 등에 추대되는 등 이세영은 국내외에서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였다. 서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족회와 군정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2년에는 활동 반경을 넓혀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 조직에도 참여하여 군사부장(軍事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10월 대한통군부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되자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과 참모부장(參謀部長)으로 활동하였다.
신흥학교 학생들이 농사짓는 광경ⓒ국사편찬위원회
1930년대 들어 이세영은 중국 관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베이징(北京)에서 무장투쟁가 조성환(曺成煥)·손일민(孫逸民) 등과 함께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고, 강우범(姜禹範) 등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6월에는 조성환·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중국의 항일 지도자들과 연대하여 중한항일의용군(中韓抗日義勇軍)을 조직하였다. 한인 청년들을 난징(南京)으로 보내 군인으로 양성하는 등 지속적 무장투쟁에 여념이 없던 그는 1933년 충칭으로 무대를 옮겨 활동하다가 청두(成都)에서 숨을 거뒀다. 청년 의병에서 노년의 무장투쟁가가 되기까지 그의 무장독립투쟁은 반세기 동안 멈춤이 없었다.
정부는 이세영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의열투쟁을 이어간 한흥근
한흥근 지사는 1890년 2월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신촌동(新村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호는 백암(白巖)이다. 원산의 보명학교(普明學校)와 측량학교(測量學校)를 졸업한 그는 20세 되던 해 원산의 홍도학교(弘道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민족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1910년 이동휘(李東輝)의 권유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연해주로 건너가 블라디보스토크에 터를 잡았다. 신한촌(新韓村) 한인거류민 단장 채성하(蔡成夏)와 함께 독립운동 동지 규합에 나선 그는 상인으로 가장하여 원산으로 잠입한 뒤 함경·강원·평안·황해 등지를 돌며 조병철(趙炳喆)·최자남(崔子男)·문무술(文武術)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1919년 7월경 한흥근은 신임 총독을 처단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폭탄을 가지고 원산으로 잠입해 있던 강우규(姜宇奎)를 최자남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의 거사 계획을 접한 후 폭탄 지원을 약속하며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후 최자남, 허형(許炯), 한흥근 등은 강우규의 남대문역 투탄의거를 직간접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드디어 9월 2일 남대문역 투탄의거가 결행되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강우규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제에 체포되었다. 의거가 준비되고 실행에 옮겨지는 동안 한흥근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내에서 빠져나와 블라디보스토크로 은신하였다.
한흥근의 출옥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6년 11월 8일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이후 만주·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항일유격대를 조직한 한흥근은 일본 헌병대와 주재소 등을 습격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이어가면서 원산에 있던 그의 가족들은 연해주로 피신하였는데, 한흥근은 1921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을 만나려다 일제에 붙잡혔다. 원산으로 압송되어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옥고를 치르고 1926년 11월 6일이 되서야 풀려났다.
정부는 한흥근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림 의병에서 대한국의사(大韓國義士)로 순국한 정시해
정시해는 1874년 5월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서 정종택(鄭鍾澤)과 거창신씨(居昌愼氏)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낙언(樂彦), 호는 일광(一狂)인데, 그의 호는 스스로 ‘나라를 잃은 미친 백성’이란 뜻의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 칭하며 지은 것이다. 호남 유림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정시해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의병 투쟁에 나섰다. 그는 1906년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없어진 국파군망(國破君亡)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뜻을 조상에게 고하였다고 한다. 뒤이어 같은 해 4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의병 거의의 기치를 올렸다는 의보(義報)를 받고, 이에 호응할 것을 두루 호소하며 최익현 의진에 합류하였다. 최익현 의병부대에서 의병을 모으는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병력을 모으는데 진력하였다.
정시해 충효비(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소재)
임병찬, 강종회 등과 의병진을 이룬 정시해는 이후 정읍(井邑)으로 진군하여 각종의 무기를 접수한 후 내장사에서 의진을 꾸렸다가 순창, 곡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의병부대의 규모는 800여 명에 달하였다. 같은 해 6월 11일, 순창에서 최익현 의진과 일본군 및 전주·남원 진위대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중군장이었던 그는 주둔지를 향해 빗발치는 탄환으로부터 최익현을 보호하던 중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시해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나는 죽어서 마땅히 사나운 귀신이 되어 추악한 무리들을 없애버릴 것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국권 회복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의 항일의지를 추모하기 위하여 최익현은 정시해의 명정(銘旌)을 '대한국의사정시해지구(大韓國義士鄭時海之柩)'라 쓰게 하고 후하게 장사지냈다.
정부는 정시해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광복을 향한 멈춤 없는 전진, 무장독립투쟁
무장독립투쟁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숱한 역경과 희생을 대변한다. 이들은 국내외의 열악한 여건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무기를 놓지 않았으며, 세대와 지역을 넘어 독립전쟁의 불씨를 이어 갔다. 그들의 헌신은 마침내 광복을 이루는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광복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다가오는 8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기 4인의 독립운동가가 걸어온 길을 다시금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들이 지켜 낸 독립의 정신과 숭고한 희생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함께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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