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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2026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경태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광복회에 참여, 군자금 모집 및 친일부호 처단 활동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대전현충원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김경태 / 임봉주 / 장두환 / 박제선

김경태 , 1879 ~1921 , 독립장 (1963) 임봉주 , 1880 ~1921 , 독립장 (1963) 장두환 , 1894 ~1921 , 독립장 (1963) 박제선 , 1878 ~1938 , 애국장 (1990)

광복회, 1910년대 독립전쟁을 추진하다

일제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식민지배를 시작했다. 일제는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제국주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광복회는 이러한 무단통치 속에서 일제에 맞서 국내에서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일제강점기 대구 달성공원의 모습ⓒ서울역사아카이브
일제강점기 대구 달성공원의 모습ⓒ서울역사아카이브

광복회는 1915년 7월 15일(양력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되었다. 광복회는 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의 한계를 극복한 단체였다. 강제병탄이 된 상황에서는 계몽운동을 통한 실력양성이나 의병전쟁의 무력투쟁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이라는 절대 명제 아래 이념과 노선이 달랐던 두 계열이 연합한 것이다.

광복회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전개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무력준비·무관양성·군인양성·무기구입·행형부(行刑部) 설치·무력전(武力戰)’이라는 투쟁 강령을 수립하고 군대식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 본부에서는 박상진(사령관), 우재룡·권영만(이상 지휘장), 최준(재무부장) 등이 임원을 맡았으며, 전국 8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국외에도 독립군 양성을 위한 만주지부와 안동여관·삼달양행 등의 거점을 설치했다.

충청도지부를 조직하다

광복회는 창립 이후 전국에 지부를 설치했다. 창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회원의 확보와 활동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광복회는 해당 지역에 연고가 있는 유력 인물을 가입시켜 지부 조직의 책임을 맡겼다. 특히 충청도지부는 한말 홍주의병에 참여했거나 그 영향을 받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충남 예산 출신의 김한종도 그 일원으로서 참여하였다.

김한종은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916년 조선총독이 부여 지역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김경태 등과 조선총독 및 고관의 암살을 모의했다. 그러나 계획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피신하던 중, 1917년 박상진을 만났다. 김한종은 박상진·채기중·우재룡 등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한 후 충청도 지부장을 맡았다.

김한종은 충청도 지부 조직에 착수한 후 가장 먼저 친분이 있던 충남 천안 출신의 장두환을 만났다. 김한종은 장두환에게 광복회의 창립 목적을 설명한 뒤, 광복회에 참여하여 회원과 자금의 모집 등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장두환은 이를 승낙하고 광복회 활동을 시작했다.

장두환 지사의 모습ⓒ독립기념관
장두환 지사의 모습ⓒ독립기념관

장두환은 광복회에 참여한 후 김한종과 함께 박상진을 만났다. 박상진은 장두환에게 만주지역에서 활동해 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장두환은 부모님을 모시는 관계로 만주행을 사양하고 충청도 지부의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장두환은 충청도 각 지역을 방문해 동지들을 규합해 지부원을 모집했다. 장두환의 노력으로 충청도 지부는 충남의 아산·예산·천안·청양·홍성 등을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해 조직을 확대할 수 있었다.

김경태 역시 충청도 지부의 활동을 이끈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충남 청양 출신으로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며, 1907년 8월 군영을 이탈한 후 의병에 가담할 준비를 하던 중 체포되어 1907년 12월 평리원에서 유형(流刑) 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2월 10일 석방되었다. 김경태는 고향인 청양의 정산으로 돌아와 공주와 청양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16년 조선총독 및 고관 처단을 추진한 후 충청도 지부에 참여했다.

대동상점을 설립하다

광복회는 경기도 광주·대구·삼척·연기·영주·예산·인천 등 전국에 지부를 설치했다. 각 지부는 활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잡화점이나 미곡상 등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거점들은 광복회원들의 모임장소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금 모집이나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박제선은 광복회의 대표적인 활동 거점인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경북 풍기 출신으로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성사범학교 부속 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제병합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광복회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던 대동상점 터(경상북도 영주시 소재)ⓒ독립기념관
광복회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던 대동상점 터(경상북도 영주시 소재)ⓒ독립기념관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자금 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1915년 8월 경북 영주 출신의 권영목과 함께 영주시장에 대동상점을 설립했다. 박제선은 대동상점을 설립한 후 권영목과 함께 유명수·이교덕·정응봉 등을 참여시켰다.

대동상점은 광복회의 창립목적인 자금모집과 독립군 양성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박제선은 1917년 8월 만주 봉천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나아가 1917년 12월에는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 양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1918년 3월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제선은 출옥 후에도 중국 베이징·장쑤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의 항일 의지는 두 아들 박진양과 박태양에게 계승되었으며, 이들은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교하여 중국·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자금을 모집하다

광복회는 창립 후 자금모집에 주력했다. 광복회의 자금 모집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광복회원 자신들의 재산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일본인 소유의 광산과 세금마차를 공격하거나 중국지폐를 위조해 실제화폐로 바꾸어 사용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장두환도 광복회 자금으로 자신의 재산을 헌납했으며, 무기 구입비로 약 4백 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복회는 의연금 모집을 추진했다. 전국의 부호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의연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광복회는 전국의 부호를 조사하고, 조사된 부호에게 광복회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 받아오는 방법을 추진했다.

상덕태상회(광복회 본부) 청구서ⓒ국가유산청
상덕태상회(광복회 본부) 청구서ⓒ국가유산청

광복회 통고문 발송은 본부와 지부에서 실행되었다. 본부에서는 전국의 대부호에게 「포고문(布告文)」을 발송했고, 경상도 지부에서는 「경고문(警告文)」, 충청도 지부에서는 「고시문(告示文)」 등을 발송해 별도로 자금을 모집했다. 장두환은 충청도 지역 대부호를 조사한 후 20여 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는 작성된 명단을 박상진에게 전달했고, 박상진은 우재룡에게 전달했다. 우재룡은 1917년 12월과 1918년 1월 사이에 중국 단둥과 봉천에서 충청도 지역의 부호에게 「포고문」을 발송했다.

장두환은 충청도 지부의 「고시문」 발송 책임도 맡았다. 장두환은 충청도 지부에서 설치한 인천의 활동 거점에서 충청도의 부호들에게 ‘주의사항’을 첨부한 후 「고시문」을 발송했다.

한편 임봉주는 경상도 지부의 자금 모집에 참여했다. 경상도 지부는 대구에서 조직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와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경북 문경에서 조직된 민단조합(民團組合)과 대동상점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임봉주는 경북 영주 출신으로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의 권유를 받고 광복회에 참여했다. 임봉주는 1917년 음력 12월 채기중의 의뢰를 받고 경북 안동의 유승호에게 직접 「경고문」을 전달하고 자금을 모집했다.

임봉주는 충청도 지부의 「고시문」 발송에도 참여했다. 임봉주는 1917년 음력 11월 신채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고시문」을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에게 전달했고, 김한종은 「고시문」 200여 장을 등사해 장두환에게 발송하게 했다. 광복회의 자금 모집은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임봉주가 두 지역의 자금모집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의열투쟁을 전개하다

광복회는 자금모집과 동시에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열투쟁도 전개했다. 전라도지부에서는 서도현, 경상도지부에서는 장승원, 충청도지부에서는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했다. 광복회는 행형부를 두고 ‘일인고관(日人高官) 및 한인 민족반역자를 처단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고 있었다. 광복회가 이러한 강령을 채택한 것은 의열투쟁이 소수의 인원으로 일제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 방략이었기 때문이다.

광복회가 의열투쟁을 전개한 것은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광복회는 의연금 모집에 큰 기대를 걸었다. 독립자금에 사용될 자금이라면 부호들이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낼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음에도 의연금 모집은 부호들에게 외면받았고, 일제에 광복회의 활동을 밀고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임봉주는 경상도 지부에서 결행한 장승원 처단에 참여했다. 장승원은 조선왕실의 재산을 편취 하는 등 경북지역의 대표적인 친일인물이었다. 임봉주는 1917년 11월 8일 강순필 등과 함께 경북 칠곡의 장승원의 집 인근 주막에 머물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그는 장승원이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채기중에게 전달했고, 채기중은 과객(過客)으로 위장해 하룻밤을 머물며 집안의 사정을 파악했다. 그리고 임봉주는 11월 10일 강순필, 유창순, 채기중과 함께 장승원을 처단했다.

임봉주는 충청도 지부원과 함께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에도 참여했다. 박용하는 광복회가 보낸 통고문을 일제에 밀고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친일 면장이었다. 장두환은 1917년 음력 10월 5일 서울에서 우재룡을 만나 권총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김한종·김경태 등과 박용하 처단을 준비했다. 장두환은 김한종과 함께 1918년 1월 24일 김경태와 임봉주에게 권총을 전달하고 결행을 지시했고, 김경태와 임봉주는 1월 25일 박용하를 처단했다.

광복회는 장승원과 박용하를 처단한 후 ‘나라를 광복하려 함은 하늘과 사람의 뜻이니 큰 죄를 꾸짖어 우리 동포에게 경계하노라(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경계하는 이 광복회원(聲戒人 光復會員)’이라는 문구가 적힌 사형선고문을 붙이고 돌아왔다. 선고문은 광복회의 의열투쟁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친일파를 처단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기 위한 글이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다

광복회원은 1918년 1월부터 체포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17년 10월경부터 광복회의 존재를 파악했다. 광복회에서 발송한 통고문이 발견되었고, 광복회의 의열투쟁이 활발히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복회원 체포에 집중했다. 특히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광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가 국내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상황은 일제에게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일제는 광복회 통고문이 가장 많이 발견된 충청도 지역을 주목하였으며, 김한종·김경태·임봉주·장두환 등 충청도지부의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김경태 등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문ⓒ국가기록원
김경태 등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문ⓒ국가기록원

김경태·장두환·임봉주는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경태와 임봉주는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장두환은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순국하였다.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단체로는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만주와 국내에 활동 거점을 설치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 무단통치 상황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추진함으로써 민족의 역량이 3.1운동과 1920년대 독립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김경태·장두환·임봉주는 광복회의 자금 모집을 주도하며 국내 항일투쟁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식민지배에 협력하거나 이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고, 국내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박제선은 대동상점을 거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출옥 후에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의 독립을 향한 뜻은 두 아들 박진양과 박태양에게도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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