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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근주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1년

주요공적

1895년 을미사변에 분개, 김복한 등과 홍주에서 의병 봉기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탄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근주

이근주 , 1860 ~1910 , 애국장 (1991)

삼천리 강토가 원수 오랑캐의 땅이 되고 500년 예의의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며 한나라의 임금이 갑자기 이적의 신민이 되었으니, 절조있는 선비로써 어찌 편안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겠습니까. 이는 개와 돼지와 같은 것이고, 또한 매국한 무리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삶을 훔치겠습니까

- 이근주 선생의 유언 -

머리말

19세기말, 20세기 초에 한국민은 일제의 무력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여러 방면에서 전개하였다. 특히 유교지식인은 충의정신에 기반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의병에 참여하지 못한 유학자들은 은거하거나 자결의 방법으로 일제에 항전하였다.

1910년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전국에 정규군과 헌병경찰이 배치되었다.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은 이전보다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애국지사들은 국외 망명을 통해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망명하지 못한 인사들은 국내에서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자결의 방법으로 저항한 민족지사들도 많았다. 홍범식, 황현, 오강표, 김석진 등 많은 유학자들이 국망의 소식을 듣고 즉각적으로 자결하였다. 그 중 충남의 내포지역 출신으로 자결 순국한 이로는 홍성 출신의 이근주가 유일하다.1)

출생과 성장

이근주(李根周, 1860 ~ 1910)는 철종 11년(1860) 부친 현복(玄福)과 파평 윤씨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淸狂)이며, 본관은 전의니 고려 개국공신 태사(太師) 도(棹)가 시조가 된다. 조선시대의 선조 중에는 한성부윤을 지낸 사관(士寬)이 있다. 그리고 이사관의 아들 양간공(襄簡公) 서장(恕長)은 대사헌을 지냈고, 증손 문성(文誠)은 절도사를 지냈다.

이문성의 아들 제신(濟臣)은 함경도 절도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중 명준(命俊, 1572 ~ 1630, 호: 潛窩)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충청도 관찰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는데, 이근주의 9대조가 된다. 이와 같이 명문사족이었던 이근주의 집안이 홍성지역으로 내려온 것은 그의 6대조인 만각(萬珏) 때이다.

이근주의 모친은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5세손인 윤휘진(尹徽鎭)의 딸이다. 홍주의 홍천(洪天)이 그의 세거지이다. 그의 부모는 1860년 계룡산 아래 공주의 비룡동으로 이사하여 그해 10월 초하루에 이근주를 낳았고 그가 6살 때 다시 홍주의 작현리로 이사하였다.

이근주는 25세 때인 1884년 부친상을 당했다. 묘지 옆에 묘사(墓舍)를 지으려 했으나, 모친이 저지함에 중지하였다. 그는 말수는 적었으며 부지런했다. 그리고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비록 병이 있었으나, 시사 문제를 근심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풍양 조씨 병삼(秉參)의 딸과 혼인하여 동로(東魯), 봉로(鳳魯)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어려서 부친한테 한문을 수학한 뒤 주로 산사에 들어가 혼자 학문을 깨치고자 하였다. 22세 때인 1881년에 공주의 마곡사 위에 있는 부용암(芙蓉菴)에서, 다음 해는 덕산사(德山寺)에서 공부했다. 1884년에는 결성의 고산사(高山寺)에 들어가 독학하였다. 특히 맹자의 ‘웅어장(熊魚章)’을 좋아했다. 웅어장은 『맹자』의 「고자 상」에 있는 장으로

‘맹자 가라사대,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하여 맹자가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을 강조한 장이다. 그는 말하기를 “뜻을 세우고 몸소 행함에 마땅히 웅어편으로 기준으로 삼고 구차함을 보여서는 안된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평소에 의리를 얼마나 숭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근주의 민족운동

1) 홍주의병 활동

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으로 고종의 머리가 깎인 사태에 통분하여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홍주의병은 김복한(金福漢) 등 관료유생들과 안병찬 등 지역의 유생들이 연합하여 추진되었다. 안병찬은 11월 28일(음) 부친 안창식과 채광묵 등과 향회를 실시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다음 날 이들은 의병을 인솔하고 홍주성에 들어갔다. 김복한 등과 함께 홍주부 영장(營將) 홍건을 만나 의병 일으킬 것을 협의하였으며,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에게 거병을 권하였다. 이때 이근주도 장서를 작성하여 관찰사에게 전달하고 의병에 합류하였다. 안병찬의 의병 기록인 『규당일기』에 의하면.

“11월 30일, 본읍의 사인(士人) 이근주(李根周)도 또한 관찰사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사연이 매우 강개하고 통박하였다.”

라고 이근주의 장서 내용이 매우 강개하고 통렬하였음을 알려준다. 홍주성 내에 창의소가 설치되었으며, 김복한이 총수에 추대되었다.

경술국치 통곡하는 국민들(1910. 8. 29.)
경술국치 통곡하는 국민들(1910. 8. 29.)

의병장 김복한은 의병 초모와 산성 수리를 위하여 송병직과 채광묵, 이창서 등을 소모관에 임명하고 의병 초모를 지시했다. 박창로, 정제기 등에게는 임존산성 수리를 맡겼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895년 12월 4일(음)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김복한 등 주도자 23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근주가 면천에 있는 백형의 집에 모친을 뵈러 간 사이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

“의리는 의거(義擧)에 있는바, 이 대사는 하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둘은 단발의 수치를 갚는 것입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홀로 도피할 수 없으니 자수를 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며 홍주성에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노모와 형이 “네가 의(義)로서 더불어 나가 죽는 것은 마땅하나 다른 날 다시 도모함만 못하다”라고 다음 기회를 보라면서 붙잡아 들어가지 못했다. 김복한은 그를 위한 만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알려준다.

“문약(文若)이 을미년 겨울에 소매 속의 글을 홍주관찰사 이승우에게 보이고 눈물을 뿌리며 거의(擧義)하여 도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듣지 않고 급기야 우리들을 구속하였다. 스스로 자수하여 구속되고자 했으나 백형과 중형이 편모께서 집에 계시니 가볍게 사지에 나갈 수 없다고 만류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문약이 마침내 마음대로 못하였으니, 매양 뜻과 같이 못함을 탄식했다.”

다음 해인 1896년 1월초(음) 전 수사 조의현(趙儀顯) 등이 청양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돌아와서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이 생겼다.

2) 항일사적 편찬

이근주가 작성한 항일 사적으로 알려진 것은 「을미록(乙未錄)」, 「절의가(節義歌)」, 「화심주가(和心舟歌」, 「신년탄사(新年歎辭)」, 「태일자문답약초(泰一子問答略抄)」, 「사자구(四字句」 그리고 민영환과 이설에 대한 애도시 등이 있다.

「을미록(乙未錄)」은 그가 을미의병 이후 1895년 홍주의병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홍주부의 사민들이 ‘8월의 변고(을미사변, 필자)’에 통분함이 사무쳐 살아갈 마음이 없어졌으며, 단발령인 ‘체령(剃令)’에 군중의 마음이 격화되어 김복한과 이설 등이 홍주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찰사 이승우가 중간에 변심하여 일이 무너졌다.”라고 하여 홍주의병이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한 일을 적고 있다.

이어서 청양군수 정인희가 의병에 참여하여 정산에서 공주의 관병과 싸워 패한 일, 그리고 청양에서 전 수사(水使) 조의현(趙儀顯)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치(紐峙)에서 경병(京兵)과 싸운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의현(1835 ~ ?, 본: 평양)은 무과 출신으로 호군(護軍) 조희원(趙羲元)의 아들이다. 1882년 황해도 수군절제사에 임명되고 태안부사를 역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의현은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나 경병의 공격을 받고 패산하였다. 이에 대하여 「을미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각 군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다시 청양의 유치(杻峙)에 모여서 전 수사 조의현(趙儀顯)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 의현은 조희현(趙羲顯)의 가까운 친척인데, 항상 충분(忠憤)함을 품었고, 더욱이 가문에서 역신이 나온 것을 한으로 여겨서 순국하려고 기약하였다. 무리가 100여명이 모인 것을 보고 각기 앞으로 거사를 하려 할 때 경병(京兵) 반개 소대가 마침 이곳을 지나면서 급히 포격을 하여 해가 뜰 무렵에 패퇴하였다. 조의현의 군사 열중에 아홉은 도망가서 숨었다. 중상한 자는 죽었으며, 나머지 당의 사상자도 몇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정월 10일에서 20일 사이의 일이었다.”

이근주는 김복한 등이 체포되자 조의현을 찾아가 의병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의현이 체포되어 뜻을 펴지 못하였다. 그동안 홍주의병에서의 조의현의 활동에 대한 언급은 있었으나, 그가 의병에 참여한 과정에 대하여는 알 수 없었다. 홍주의병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인 임한주의 「홍양기사」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근주의 위 기록에서 그가 충성스럽고 분한 ‘충분(忠憤)’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같은 집안에서 조희현(趙羲顯) 같은 역신이 나온 것을 원망스럽게 여겨 순국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희현(1856 ~ 1915)은 무과 출신으로, 1894년 7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략할 때 일본군의 작전을 도왔으며, 이후 군국기무처 의원 겸 군무아문 대신서리로 활약한 친일적 개화파 관료였다.

「절의가」에서는 삼강오륜을 지키고 인수(人獸)와 화이(華夷)를 구별하는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백이(伯夷)와 노중연(魯仲連) 같은 충의지사의 절의를 칭송하였다. 「화심주가」는 중국으로 망명함을 거부하고 고국에 남아 있는 자신의 심정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고자 하나 수천만 년 성현의 가르침이 이어져온 조선 땅을 하루아침에 저버릴 수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천지를 창조했다는 전설의 신인 반고(盤古)의 배를 타고 삼강오륜의 돛을 달고 인의예지의 노를 저어 함께 문명세계로 나아가지 않겠느냐고 하고 있다.

1910년 지은 「신년탄사」는 그가 50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것으로 보이며,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어 이전의 잘못한 행위를 반성하고 장부의 재목인 자신이 나라를 위함을 알지 못하고 단지 수심만을 하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태일자문답약초」는 그가 ‘태일자(泰一子)’란 가상의 벗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국망에 처하여 취할 길에 대하여 자문자답한 글이다. 글의 첫 머리에서 “오늘날 세상의 도가 끝났고 국사(國事)도 망극하여 근자에 소위 합방(合邦)이라는 하나의 문서가 있으니 그대는 들어서 아는가?”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1910년 8월 국망의 소식을 듣고 자결을 결심하기 직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태일자는 “(합방의 소식을 듣고서) 어찌 마음이 편안한가?”라고 묻고 있다. 이에 이근주는 포의(布衣)로서 의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병마에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취한 것이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이 원통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태일자는 “어찌 스스로 그 목숨을 상하게 할 이치가 있어서 남의 말을 혐의하는가! 가령 세상이 꺼리는 말을 좋아한다 해도 남의 義를 말하는 것이 또한 어찌 그대가 홀로 그 마음먹은 바를 행하는 데에 방해가 되겠는가! 또한 그대의 평일에 배운 학문이 위기(爲己)의 학문인가! 위인(爲人)의 학문인가! 이는 어찌 평일에 바라던 바가 그대의 말과 같겠는가!”라고 세인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평일에 배운 대로 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결국 이근주는 며칠 후 다시 찾아온 태일자에게 자신이 살 수 없는 이유를 다음의 다섯 가지로 들면서 자결의 뜻을 분명히 표하였다.

“나의 마음에 정한 살아가지 못할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인의 도가 막히고 없어진 것이고, 둘은 국운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셋째는 슬프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고, 넷째는 창피하고 부끄러움이 스스로 간절한 것이고, 다섯째는 귀와 눈이 모두 싫어하는 것뿐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마음에 하나만 있어도 족히 구차하게 살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것을 모두 겸한 것이겠습니까! 내가 지난 날에 말했기 때문에 깊이 대하면서 그대의 경계를 듣고자 한 것입니다. 그대의 말은 곧 나의 뜻입니다. 생사고락이 어찌 감히 그대와 더물어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그대의 깊은 경계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는 나라가 망함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1)성인의 도가 막혔으며, 2)국운을 만회할 수 없으며, 3)슬프고 분하며, 4)창피하고 부끄럽고, 5)듣기도 보기도 싫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다섯 중에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없는데, 그것들이 모두 겸해 있으니 구차하게 삶을 이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시 대한문 앞 일본군
을사조약 체결시 대한문 앞 일본군

그가 남긴 글로는 이 외에도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방에서 혈죽(血竹)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만사가 있다. 그는 여기에서 “나라가 없는데 공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면서 그의 죽음을 기렸다. 그리고 “삭풍 부는 10월에 잎을 가지라고 말하네”라며 강제로 국권을 박탈한 일제의 기만적인 행태를 비판하였다.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 풀려난 직후인 1906년 순절한 이설에 대하여도 만사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설은 민종식의 홍주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리고 있던 1906년 5월 일제를 축출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3) 자결 순국투쟁

1910년 국치의 비보를 접하고 그는 “나의 의(義)는 적도(賊徒)와는 함께 살 수 없다”라 하고, 대궐에 나아가 적신의 죄를 성토하려 했으나, 병이 심하여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자결로 항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기로 결심한 것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의 평이 걱정이었다.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은 포의(布衣)로 자결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은 병마에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처의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처의관을 분명히 밝혔다. 성인의 도가 끊어지고, 국운이 다하였으니 살아갈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싫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백형의 환갑이 있어 차마 그 전에 죽지 못하였다. 1910년 9월에 백형 이근하(李根夏)의 환갑 잔치가 끝난 뒤 중형(仲兄)에게

“삼천리 강토가 원수 오랑캐의 땅이 되고 5백년 예의의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며, 한 나라의 임금이 갑자기 이적의 신민이 되었습니다. 절조가 있는 선비로서 어찌 편안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겠습니까. 이는 개와 돼지와 같은 것이고, 또한 매국한 무리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삶을 훔치겠습니까.”

라고 자결의 뜻을 전했다. 중형이 일개 포의로서 죽는다면 누가 알아주겠는가라고 하자,

“옛적 노중연(魯仲連)은 곧 제(齊)나라 동쪽에 사는 하나의 포의(布衣)인데, 진(秦)이 예의를 버리고 염치의 나라를 버린다면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부끄럽다. ‘만약 중련을 진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동해에 나가 죽을 뿐이다.’고 하였으니, 내가 비록 포의이나 대대로 녹을 받은 집안과 시(詩)와 예(禮)를 아는 가문에서 태어나서 추운 절에서 다년간 괴로움을 겪으면서 공부를 하여 약간의 춘추(春秋)의 의리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뜻으로 앞으로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나가서는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군부(君父)의 치욕을 설치(雪恥)하지 못하였고, 물러나서는 집에서 수신(修身)하지 못하고 입신(立身)하여 뜻을 이룰 곳이 없으니, 이는 바로 뜻이 있는 선비가 인(仁)을 이루는 때입니다. 자고로 절개를 세우는 자는 그 죽어야 하는 의리를 잡으면 나가서 죽을 뿐입니다. 어찌 이름을 당시에 구하고 내세에 복을 구한 뒤에 죽겠습니까!.

라고 제나라 노중연의 고사를 들면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임금의 치욕을 갚지 못함에 죽음으로써 의리를 잡을 뿐이라면서 자결의 뜻을 고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성묘하러 간다고 말하고 주과(酒果)를 준비하여 부모 묘에 제사를 지내고 자결, 순국하였다.

대한문 앞 명성황후 국장행렬(1897. 11. 12.)
대한문 앞 명성황후 국장행렬(1897. 11. 12.)

그는 죽기 전 나무에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라는 8자를 써 놓았다. 품속에는 가족과 사우들에게 쓴 유서가 있었는데 왜경이 압수해갔다. 그의 형 이근상이 경찰서장에게 압수해 간 유서를 돌려받기를 신청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유서에서 매장을 하지 말고 화장할 것을 당부하면서, 매장함은 비린내 나는 땅으로 나를 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족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선산에 장례를 모시는 날 ‘대풍(大風)’과 ‘뇌우(雷雨)’가 쏟아져 괴이하게 여겼다 한다.

홍주의병장 김복한(1860 ~ 1924)은 그를 위한 만사(輓辭)를 지었는데, 여기에서 을미년 홍주의병 때 장서를 소매에 넣고 와 이승우에게 보인 사실과 모친 때문에 자수를 못한 일을 탄식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사람들 중에 이근주의 의리를 지키는 마음을 알지 못하고 “병들어 있었을 뿐이기 때문에 자결하여 이름을 얻으려 하였다.”라는 이가 있으나 “구순의 원로대신이었던 심순택이 죽으려 하였으나 죽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라면서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였다. 또한 이근주가 백형의 환갑을 지내고 자결함은 임금께 충성함은 물론 형께도 공경함을 표한 것이라면서 청광자 이근주의 처의관(處義觀)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자결한 후 김복한을 비롯하여 안병찬(安炳瓚), 임승주(林承周), 임한주(林翰周) 등이 영전에 제문을 바쳤다. 김복한은 의로움을 취했으며 인을 이루었다(‘取義成仁’)고 그의 공적을 기렸다. 김복한은 1911년 그의 기일인 대상(大祥)에 후손에게 서한을 보내 “존형(尊兄)의 순의(殉義)가 탁절(卓節)함이 옥사(屋社)의 날에 빛이 되었다”고 하여 그의 순절이 멸망한 조선에 빛이 되었다고 다시 한번 그의 순절을 높이 평가하였다.

의병 항일 사적비(추양사)
의병 항일 사적비(추양사)

안병찬(1854 ~ 1929) 역시 열혈의 마음으로 자결하여 우리의 ‘백미(白眉)’가 되었다고 그의 죽음을 기렸다. 또한 통정대부로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낸 정인표(鄭寅杓, 1855 ~ 1935, 자: 衡伯, 호: 學山)는 ‘행장(行狀)’을 써 그를 기렸다.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처사이군묘지명(處士李君墓誌銘)’에서 “죽은 그대 자지 않거든 우리나라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힘써줄 것을 빌었다.

1920년에 표우현(表右鉉)은 이근주 ‘순절기’에서 나라가 망함에 죽음으로써 의를 취한 ‘사생취의(捨生取義)’를 실천했다고 했다. 서산 출신 유학자 직암(直菴) 이철승(李喆承, 1879 ~ 1951)은 1949년 그의 ‘약전(略傳)’을 쓰면서 “정충(貞忠)과 독학(篤學)으로 천리마의 기량을 펴지 못했으나,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선왕께 충성을 다하였다”고 평하였다. 이 외에도 족질인 이원로(李元魯)는 그의 유서인 ‘존화양이 부정척사(尊華攘夷 扶正斥邪)’에 대한 ‘서문(敍文)’을 썼다.

한편 임한주가 쓴 ‘이근주전(李根周傳)’과 대한의사청광이공근주묘갈명(大韓義士淸狂李公根周墓碣銘)이 있다. 임한주는 ‘묘갈명’에서 이근주에 대하여

굳고 굳음은 쇠와 돌 같은 마음이고,

밝고 밝음은 해와 별 같은 절개로다.

오직 그 판단이 명철한지라.

이 때문에 행실 또한 그렇게 열렬했도다.

대저 그 생명을 버리고 순국한 일은,

다만 나라가 망한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중화문물의 이어짐을 위해

하루아침에 놈들과 끊은 것이로다.

천년이 앞에 있고 만세는 뒤에 있으니

춘추대의를 아는 사람 있으면

아마도 이 말의 참뜻을 알리라.

라고 하여 그의 굳은 절개와 열렬한 행실을 기리면서, 그의 순국은 나라를 위함이며 동시에 일제에 의해 중화문물을 잇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맺음말

이근주는 1860년 홍성의 사족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업으로 한 선비였다.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독학으로 학문을 일궜다. 특히 맹자의 웅어장(熊魚章)을 좋아했다. 이에 따라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을 숭상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에 항의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에는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지 울분을 이기지 못했다. 이로부터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이 생겼다.

그는 을미의병 이후 홍주의병 기록인 「을미록」을 비롯한 여러 항일사적을 편찬하였다. 「절의가」에서는 삼강오륜을 지키고 인수(人獸)와 화이(華夷)를 구별하는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하였다. 이 외에도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순국을 기린 혈죽시(血竹詩)와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 풀려난 직후인 1906년 순절한 홍주의병장 이설에 대한 만사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10년 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그는 자결로 항거하고자 하였다. 그는 큰형의 환갑이 지난 뒤에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자결하였다. 그는 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도 끊어짐에 살아갈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 8자는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알게 해준다.

그의 죽음은 김복한이 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의로움을 취했으며 인을 이루었다(‘取義成仁’) 할 것이다. 그의 순국은 개인의 희생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항일투쟁을 고취한 민족운동의 한 방략으로 후세에 기리 전해질 것이다.

참고문헌

ㆍ송상도, 『기려수필』, 「이근주」.

ㆍ민황기 역주, 『대한의사 청광자실기』, 청운대학교 남당학연구소, 2015.

ㆍ김상기, 『한말의병연구』, 일조각, 1997,

ㆍ김상기, 『호서유림의 사상과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16.

ㆍ김상기, 「1910년대 지방 유생의 항일투쟁」,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 1999.

ㆍ김상기, 「이근주의 삶과 자료」, 『대한의사 청광자실기』, 청운대학교 남당학연구소, 2015.

각주

1) 1910년 국망 후 자결 순국한 이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김상기의 「1910년대 지방 유생의 항일투쟁」(『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 1999, 62 ~ 71쪽) 참조.

이근주에 대하여는 그가 남긴 글과 기타 행장 등을 모아 민황기 교수가 역주한 『대한의사 청광자 실기』(청운대학교 남당학연구소, 2015)가 있다. 이 책에 대한 해제로 김상기의 「이근주의 삶과 자료」가 참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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