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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교헌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77년

주요공적

1916년 대종교 2대 교주

2월 대한독립선언 39명 중 1인으로 서명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청산리전투에 승리를 거두는데 기여

1923년 재만교포학살을 보고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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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김교헌 , 1868 ~1923 , 독립장 (1977)

“이 어른은 우리나라의 역사(歷史)에 관한 공부 발견이 제일 만타.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가 이만치라도 역사(歷史)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모다 이 어른의 공이라 할지니 그 공의 큰 것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가 세운 공보담 더 큰 것이다.”

- <동아일보, 1924. 1. 13> -

머리말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대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종교로 일제침략에 대항한 항일투쟁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과 성과를 남겼다. 또한 한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하였고, 대부분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도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대종교가 독립운동 선상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

대종교 중심인물은 제1세 교주 홍암(弘巖) 나철(羅喆), 제2세 교주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과 함께 대종교 삼종사로 불리우는 백포(白圃) 서일(徐一)이다. 그 외에도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을 비롯하여 신규식(申圭植)·김두봉(金枓奉)·박찬익(朴贊翊)·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김좌진(金佐鎭)·지청천(池靑天)·이범석(李範奭)·홍범도(洪範圖)·이상설(李相卨)·안희제(安熙濟) 등 대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대종교의 조국광복을 위한 활동은 일제에 의해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체성을 회복하고 유지해 나가는 밑바탕이 되었다.

본고에서는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의 생애와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명문거족의 후예로 태어나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

1867년 7월 5일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 외조부 조희필(趙熙弼)의 집에서 부친 김창희(金昌熙)와 모친 풍양 조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이며, 대종교에 입교한 후 이름을 외자 헌(獻)으로 바꾸었다.

선생은 명문거족의 후예로 수원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7대조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은 숙종의 장인이며, 아버지는 공조판서 김창희(金昌熙)이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로 판관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자택은 영조 때 왕자궁으로 쓰였던 340칸 대저택을 하사 받은 것인데, 김교헌이 집안의 종손으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전 가산을 처분한 뒤 보성학교와 명성여자실업학원(현 동국대 사대부고)을 거쳐 조계사에서 인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선생은 18세 되던 해인 1885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고, 그 후 권지부정학(權知副正學)·예조참의(禮曹參議)·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官檢閱兼春秋館記事官)·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敎理)·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수찬(修撰)·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하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좌절되어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에는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纂輯委員) 편집위원이 되었다. 그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시기는 1903년 문헌비고 찬집위원 활동에서이다. 김교헌이 5년에 걸쳐 완성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는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책이다.

1906년에는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김교헌이 항일의식을 고취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할 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이권 운동을 징계하여 다스리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친일파 송병준(宋秉畯)의 모함으로 해직되었다. 해직된 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시 복직되어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奎章閣副提學)으로서 국조보감감인위원(國朝寶鑑監印委員) 가선대부(嘉善大夫)까지 승진하였다. 선생은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 감인위원을 겸직하였는데,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대종교에 입교하여 저술을 통해 우리 민족사(民族史)의 정통성을 체계화하고 민족주체(民族主體) 사관(史觀)을 정립(定立)하다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 재동(齋洞)에 모여 단군교를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하였다.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로는 강우(姜虞)·최전(崔顓)·유근(柳瑾)·정훈모(鄭薰謨)·김인식(金寅植)·김윤식(金允植) 등 수십명으로 주로 나철과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와 을사오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다음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敎名)을 바꾸고 포교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매진하였다. 나철은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략으로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를 창시하고,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하여 이를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하였는데 대종교인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고 그의 관직경력 등으로 제1세 교주인 홍암 나철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선생은 입교 다음해인 1911년 총본사 요직을 거쳐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의 중책을 맡아 4년간 직무를 수행하였다. 유근과 함께 '단군의 사적을 살핀다'는 뜻의 단군 기록 모음집인 『단조사고(檀祖事攷)』(1911)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남도본사 전리(南道本司典理), 1915년에 남도본사 도강사(南道本司都講師) 및 전강(典講) 등 중책을 맡으면서 종리(倧理)와 종사(倧史)를 연구하던 중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저술하였다.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것인데, 이는 처음 이 교의 교명이 단군교(檀君敎)인 것처럼 단군을 종조로 내세워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檀君史)를 밝힌 것이다. 이는 일제에 나라는 강탈 당하였으나,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족의 시조가 있고 민족사가 있으며 민족의 고유한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종교서인 동시에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서이다.

『신단민사』는 상고(上古)1), 중고(中古)2), 근고(近古)3), 근세(近世)4) 등으로 나누어 시대구분을 하였다. 김교헌의 『신단민사』의 시대구분에서의 목차 중 근고(近古)에서 요금(遼金)도 포함시켰다는 것은 만주를 지난날의 역사에서 우리 영역 즉 구강(舊疆)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민족사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체계화하였다.

신단민사
신단민사

이 두 저서는 우리의 건국 시조인 단군(檀君)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淵源)을 역사적으로 규명하였고, 이는 우리 민족사(民族史)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思想)을 불식하고 민족주체(民族主體) 사관(史觀)을 정립(定立)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의 민족사학(民族史學)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최남선(崔南善)도 그에게 사사(師事)하였고, 김교헌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그의 서적 대부분을 최남선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종교 제2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를 넓히다

1916년 9월 1일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 교주(敎主)]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15년 '대종교 포교금지령' 이후 국내에서의 대종교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제령 제83호로 '포교규칙'을 발포(發布)하고 대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선생은 나철이 순교한 다음해인 1917년 3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和龍縣)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선생은 교단 정비와 교세 확장을 주도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교단 하부조직인 46개소의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고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22년 종경회(倧經會)에서 『신고강의(神誥講義)』·『신리대전(神理大全)』·『회삼경(會三經)』·『신사기(神事記)』·『조천기(朝天記)』·『신단민사』·『신가집(神歌集)』 등 7종의 교적을 간행하였다. 이어 시교회(施敎會)에서 성손금(誠損金)을 모금하여 교경(敎經)을 간행하였다. 이듬해인 1923에는 종경회(倧經會)에서 『종리문답(倧理問答)』·『중정신가집(重訂神歌集)』·『증책종례초략(增刪倧禮抄略)』·『국한문삼일신고(國漢文三一神誥)』·『신리대전(神理大全)』 등을 검정한 후, 시교회에서 『국문현토신고강의(國文懸吐神誥講義)』·『신리대전』·『신사기』·『회삼경』·『국한문신단민사(國漢文神壇民史)』·『배달족강역형세도(倍達族彊域形勢圖)』 등을 간행하여 이를 바탕으로 포교활동과 교세확장에 이바지하였다. 그중에서도 김교헌의 『신단민사』와 이원대(李源臺)의 『배달족강역형세도』는 대종교종인 뿐만 아니라 당시 독립운동지도자를 양성했던 사관학교 학생들은 물론 재만한인사회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김교헌이 대종교 제2세 교주로 재임한 시기인 1916년~1923년까지 신자수가 30만 명을 넘었다. 당시는 대종교 전성기로 급속한 교세확장과 교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김교헌과 함께 대종교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바로 서일(徐一)이다. 1919년 김교헌이 서일에게 교통을 전수하고자 하였으나 항일무장투쟁에 매진하기 위해 5년간 교통 전수를 유보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서명하고 주도하다

1919년 2월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 등 39인의 명의로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일명 무오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다. 발표일자는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로 되어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주체는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다. 선언서 내용에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가 언급되어 있고 발표장소도 대종교 총본사인 것으로 보아 대종교와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39인 중에서 이세영(李世永)·한흥(韓興)·최병학(崔炳學)·이승만(李承晩)·김약연(金躍淵)·이대위(李大爲)·황상규(黃尙奎)·안창호(安昌浩)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대종교 중심인물들이다. 선생은 대한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하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모두 35행 1,725자로 되어있다. 선언서에서는 우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라고 하여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둔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이어서 외세의 지배는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고 세계각국에 대해 소위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강조하였다.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안도현(安圖縣)에서 대종교도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안도현 덕수동 자신의 집을 방문한 대종교도와 학생 50여 명과 함께 독립운동 대책을 논의하였다.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다

1919년 10월 대종교 교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조직되어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부총재 현천묵(玄天默) 등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종교 제2세 교주 선생은 1920년 10월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등이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지도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서일이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시킨 후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하였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대적인 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 장차 연해주로 이동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한군정서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인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다시 밀산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서일이 순국하였다. 선생은 1922년 청산리대첩 이후 흩어졌던 대종교도들을 모아 본부를 밀산에서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겨 대한군정서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영안현 대종교총본사 수도실에서 56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종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당시에 희생당한 대종교도들만도 수만 명에 달하였다. 그 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1923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김교헌, 나철, 서일 묘역
김교헌, 나철, 서일 묘역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약화되고 서일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아 병을 앓다가 1923년 11월 18일 영안현 남관(南關) 대종교 총본사 수도실에서 윤세복(尹世復)에게 도사교(교주)의 지위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남기고 56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맺음말

선생은 명문거족의 후예로 태어나 1910년까지 관직에 있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대종교에 입교한 후 선생은 국조 단군을 모신 민족종교로서의 이론체계를 정립하였다. 아울러 『신단실기』·『신단민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화하고 민족주체 사관을 정립하였다. 1916년 대종교 제2세 교주로 취임하여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 대종교총본사로 망명하여 교단을 정비하고 46개소의 시교당을 설치하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또한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여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가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서일의 순국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병을 얻어 1923년 순국하였다. 선생은 대종교 제2세교주로, 민족사학 권위자로 많은 저술을 통해 민족사관의 기틀을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13일자 「고김무원추도식(故金茂園追悼式) 일월십삼일에 상해에서 열어」 기사에서 "이 어른은 우리나라의 역사(歷史)에 관한 공부 발견이 제일 만타.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가 이만치라도 역사(歷史)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모다 이 어른의 공이라 할지니 그 공의 큰 것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가 세운 공보담 더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족사학의 선구자로서의 탁월함과 더 나아가 한민족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한 김교헌의 공적을 중국의 사마천에 비유하여 평가하였다.

또한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4일자 「무원 김교헌선생(茂園金敎獻先生)」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업적을 평가하였다.

"선생은 무언(無言)한 애국자였섯다. 그가 말이 없으나 조선과 조선인을 어떻게 깊이 사랑하였던 것은 그의 일생 생활이 증명한다. 선생은 가위(可謂) 문한가(文翰家)의 예(裔)로 한학에 자못 조예가 깊었음은 지인이 모두 경앙(敬仰)하여 하는 바이어니와 그에게는 한학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그의 사랑하는 조선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문학을 탐구하고 표창한 만이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조선의 역사에 관한 것이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수집하였고, 조선인의 저작이라 하면 편언척구(片言隻句)라도 등한히 아니하여 그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정신을 찾으려하였다. 그가 빈한하여 의식을 구하기에 분망한 동안에도 조선광문회의 조선고서 간행에 수년간 편찬과 교정의 격무(激務)를 사향치 아니함도 실로 이 '무언(無言)의 민족애(民族愛)'에서 나온 것이다.

대세가 변(變)하고 민심이 날로 부박(浮薄)하여져서 조종(祖宗)의 정신을 잊으려함을 볼 때에 그의 통심(痛心)함이 얼마나 하였스랴. 그는 조선을 가장 잘 연구한 학자요,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애국자이기 때문에 '조선정신'의 미점(美點)도 가장 잘 포착(捕捉)하고 애착(愛着)하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조선정신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귀의찬앙(歸依讚仰)의 종교적 열정으로 화(化)한 것이다. 전교도의 숭앙(崇仰)을 받던 선생의 장서(長逝)에 대하여 대종교의 애도하여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애국자요, 다시 구하기 어려운 국학자를 잃은 것에 대하여는 전민족적 손실로 애도의 뜻을 표할 것이다. 진실로 선생은 애도할 만한 '참된 조선 사람'이었다."

그는 '무언의 민족애'를 가진 애국자요, '조선정신'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사랑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정신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종교적 열정으로 승화하였다. 그의 서거에 대해 대종교의 애도는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애국자·국학의 선구자를 잃은 슬픔을 전민족적 손실로 애도하였다. 아울러 그를 진실로 애도할 만한 '참된 조선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각주

1) 신시시대(神市時代), 배달시대(倍達時代), 부여시대(夫餘時代), 종교(宗敎), 제도(制度), 문학기예(文學技藝), 풍속(風俗)

2) 열국시대(列國時代),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종교(宗敎), 제도(制度), 문학기예(文學技藝), 풍속(風俗)

3) 려요시대(麗遼시대), 려금시대(麗金時代), 고려시대(高麗時代), 종교(宗敎), 제도(制度), 문학기예(文學技藝), 풍속(風俗)

4) 조선시대(朝鮮時代), 종교(宗敎), 제도(制度), 문학기예(文學技藝), 풍속(風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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