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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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덕기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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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

전덕기 , 1875 ~1914 , 독립장 (1962)

머리말

전덕기의 본직은 개신교(감리교) 전도사이자, 목사였다. 1896년 선교사 스크랜턴(W. B. Scranton)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1902년 이후부터 상동교회 전도사, 목사로 봉직하다 1914년 3월 39세로 향년을 마친 목회자이다.1) 이러한 관계로 전덕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주로 한국교회사에서 주목되었을 뿐 일반사에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목회자에 그치지 않았다. 1896년 독립협회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공옥여학교, 공옥소학교, 엡윗청년회, 그리고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견인하는 등 구국계몽기 민족운동을 선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구국항일 비밀결사체인 신민회 창립과 조직의 인적·물적 토대를 제공한 민족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올해(2014)는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마침 국가보훈처에서 매년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중 올해 3월의 독립운동가로 전덕기 목사를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사적 측면에서 구국민족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전덕기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숯장수’ 고아출신에서 ‘민중 목회자’로

전덕기는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全漢奎)와 모친 임씨(林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本)은 정선(旌善)이며 덕기(德基)라는 이름 외에 ‘봉운’이라 불리었다. 본래 집안이 넉넉지 못했으며, 9세 되던 해(1884) 부모 모두를 여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은 덕기는 당시 남대문 일대에서 숯장수를 하던 삼촌 전성여(全成汝)의 양자로 입적하여 고아와 같은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숯장수 삼촌댁 양자로 어렵게 자랐으나, 근본이 총명했던 소년 덕기는 이웃집 서당을 기웃거리며 어깨 너머로 듣고 배운 한문 실력이 제법 수준에 이르렀다.

孤院紀念式狀况
孤院紀念式狀况

한마디로 소년 덕기는 예민한 유년기와 소년기를 매우 가난하고 곤고하게 보내었기에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을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기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스크랜턴(W. B. Scranton) 선교사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소년 덕기가 17세 되던 해(1892) 당시 서울 정동(貞洞)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스크랜턴은 의료선교사(Medical Missionary) 자격으로 1885년 5월 내한하여 정동에 시병원(施病院)을 설립,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M. F. Scranton)은 교육선교사(Educational Missionary)로 이화학당을 설립한 분이다. 한 마디로 스크랜턴 모자(母子)는 개화기 조선의 근대의료사업과 여성교육의 문을 연 개척자였다.

스크랜턴 모자 중 아들 스크랜턴과 전덕기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그 만남이 전덕기 생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양인의 직접적인 만남은 서울 정동이 아닌 상동(尙洞)에서였다. 1892년 5월 1년간 미국에서의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스크랜턴은 정동에 있던 시병원을 상동으로 옮기었다. 병원은 대중의 요구에 맞도록 번잡한 곳에 있어야 하는데, 이 점에서 외국인이 주로 거주하던 정동에 비해 상동은 “주변의 교통량이나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민중이 있는 곳’(where the people are)이기에 정동을 떠나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2) 이러한 의미에서 스크랜턴 선교사는 ‘민중 지향적 선교사’라 불릴만하다.3) 그리고 이러한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은 전덕기로 이어졌다.

18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양인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눈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기에 1894년 전국적으로 궐기한 동학혁명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보듯 서양인과 그들이 전파하려는 야소교(耶蘇敎)는 무군무부(無君無父)한 ‘오랑캐 종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와 서양인 선교사에 대한 인식이 호의적일 수 없었다.

소년 전덕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어린시절 정동에 살면서 자기 동네에 거주하고 있는 서양인 선교사 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등 서양인을 배척하는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사회분위기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소년 덕기와 서양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와 배경이 있었다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소년 덕기가 여러 번에 걸쳐 서양인 사택에 돌팔매질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서양인의 반응과 태도가 생각 외로 공손하고 친절하여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를 향해 욕을 하며 돌팔매질을 하면 당연히 화를 내고 붙잡으려 했을 법한데 오히려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그 태도에 사뭇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 덕기가 서양인 선교사에 호감을 갖게 된 계기는 서양인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과 생활하면서 더욱 큰 감동을 받았다.

소년 덕기가 선교사 스크랜턴이 운영하는 시병원의 고용인으로 언제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한 선교사(W. A. Noble)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소년 전덕기는 처음에는 “스크랜턴 박사 부부 집 부엌 일꾼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요리사가 되어 수년간 일을 하면서 스크랜턴 부부의 가정생활에 깊은 영향을 받아 ‘스크랜턴 박사님같이 되고 싶어요’라고 한 인물이 지금 훌륭한 목사가 된 전덕기 목사였다”고 한다.4)

그러나 전덕기가 서양인의 일꾼과 요리사로 인연을 맺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소년 전덕기의 당시 삶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이 가장 주요 요인이었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년 전덕기의 당시 사회경제적 여건이 남의 집에서 일을 해야만 할 만큼 어려웠던 형편이 스크랜턴 집의 고용인이 된 주요 배경이었다 하겠다.

이 시기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의 학생이나 보조원으로 연을 맺는 경우 거의 고아출신이거나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운 집 자녀들이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소년 덕기의 경우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전덕기 경우 스크랜턴 부부와의 인연이 곧 기독교인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스크랜턴 부부와 생활한지 만 4년이 지나 그의 나이 21세가 되던 1896년에야 비로소 기독교에 입교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말하자면 서양인 선교사와 함께 생활한다는 분위기에 쓸려 피동적으로 입교한 것이 아니라 4년간의 장고 끝에 기독교에 비로소 입교했던 것이다.

오랜 기간의 고민 끝에 기독교에 입교한 그의 이후 생활과 활동은 매우 역동적이고 적극적이었다. 4년간 스크랜턴 가정의 고용인과 요리사로 생활하면서 스크랜턴 부부의 기독교적 삶을 직접 목도한 그는 자신의 이후 삶 역시 스크랜턴 박사 부부의 삶, 곧 기독인으로서의 헌신적인 삶과 복음전도 사역자로서의 방향을 굳게 잡았던 것이다.

이 같은 결단과 다짐은 곧 교회활동으로 이어졌다. 스크랜턴 부부를 도와 상동교회 창설사업에 참여한 그는 1898년 상동교회 속장(屬長)이 되었고, 1900년 상동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때 재정 일체를 담당하는 유사(有司) 일을 맡았으며, 이어 1901년에는 권사(勸師)에 임명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902년 드디어 미국 감리회연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사(傳道師) 파송을 받았다.

이렇듯 서양 선교사 집의 고용인 겸 요리사로 출발한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후 빠른 기간에 미국 감리회가 정식 인정하는 전도사로 임명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정적인 전도활동 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전도사 전덕기의 활동은 상동교회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구제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민중 선교’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은 곧 상동교회의 부흥을 가져왔고 그 결과 ‘민중 전도자’로서의 전덕기의 이름이 점차 교계에 넓게 알려졌다. 그 결과 1905년 6월 미국 감리회 한국선교연회는 “전봉운 형제는 무거운 짐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아주 유능한 인물로 성장하였기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본처 집사 목사로 안수받도록 추천”했다. 이로써 이후 전봉운 곧 전덕기는 ‘민중 목회자’에서 구국민족운동 선구자로서 활동의 지형을 넓혀나갔다.

2.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설립과 ‘상동파’의 구국운동

상동교회와 그 안에 설립된 상동청년학원이 1900년대 구국계몽기 민족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으며 그 중심에 전덕기가 있었다. 상동교회 안의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모체는 1897년 9월 조직된 ‘만엘루청년회’에서 비롯되었으나, 본격적인 활동은 1903년 5월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부터였다.5) 1903년 당시 상동교회 전도사 신분이었던 전덕기는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 자신이 회장을 맡고 부회장 정순만(鄭淳萬), 서기 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즉 1889년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가 세력의 재규합이 엡윗청년회의 인적토대가 되었다. 엡윗청년회가 조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원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음은 당시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6)

韓國靑年會의 狀況 및 商業界恐慌 件
韓國靑年會의 狀況 및 商業界恐慌 件

엡윗청년회의 표면적 취지는 종교적 목적 즉 성경공부와 토론회 그리고 전도운동 등을 내세웠으나 그 이면은 청년들에게 애국심과 구국정신을 고취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미 상동엡윗청년회는 강력한 민족구국단체로 형질화되어 갔다. 더 나아가 전덕기는 상동교회 내에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7)을 설립, 1904년 10월 15일 개교식을 가졌다.8) 요컨대 상동청년학원은 1896년 독립협회 결성 이후 민(民)의 자력에 의해 설립된 대표적인 구국계몽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전개된 항일민족운동의 조직력과 운동력 및 인적 토대를 제공했던 것이다.9)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활동은 전국적인 조직체로 확대되면서 정치적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평남 진남포 감리교회 엡윗청년회 대표로 청년회 집회에 참석했던 김구(金九)10)가 그의 자서전에서 “1905년 11월 을사오조약이 발표되자 상동청년회에서는 연일 수천 명이 모여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전개하고 각 도의 청년회 대표가 모여 교회사업을 토의하나 이면에는 순전히 애국운동이다”11)라고 회고했듯 당시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 회원들은 애국심에 불타던 젊은 투사들로 결성되어 있었다.12)

이렇듯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초기 성격은 교회 내의 종교적 단체로 출발했으나, 규모가 커지고 1904년 노일전쟁을 전후하면서 시대의 추이가 급변하자 점차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인 단체로 변화 발전하였다. 여기에 1907년 2월 안창호의 귀국을 계기로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인적·물적 토대가 신민회 창립과 조직의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1910년 일제측이 작성한 아래와 같은 기독교 단체 동향 기밀문서인 <만국야소교청년회> 보고서 내용이 주목된다. 일제측은 이 보고서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필자 주)보다 상동청년회 측을 더욱 주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년회는 종교를 표방하는 일종의 단체로서 상동청년회와 황성청년회(YMCA-필자 주)의 2파로 나뉜다. 상동청년회는 미국인 스크랜턴이 창설에 관계할 당시 독립협회의 잔여세력이 회당에 모여 포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명치 37년(1904) 교육 및 종교에 관한 각종 결사집회가 발흥하면서 점점 세력을 회복하여 회장에 전덕기, 부회장에 정순만 등이 협력하여 회원을 널리 전국에서 모집하여 크게 확장을 꾀했다. (중략) 시국의 추이에 따라 일·한 관계가 확장되어가자 조야(朝野)의 배일주의에 열중하여 시사(時事)에 관한 정치문제를 의결하고 또한 지방지회는 사법행정에 관한 관헌의 시위에 간섭하는 등 홀연히 종교의 범위를 벗어나 일진회와 대결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13)

말하자면 상동청년회 조직은 처음에는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 그 잔여세력 중 기독교 교인들이 모여 전도활동을 표방했으나, 1904년 이후부터 그 성향과 활동이 종교적 측면보다는 실추되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정치단체로 변모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비교적 정확했다 할 것이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일 저녁 나라를 위한 기도회로 남녀교인 수천 명이 구국집회로 모였다. 동시에 전덕기, 정순만 등이 평안도 장사 십 수명을 모아 박제순(朴濟純) 등 5적(五賊)을 암살할 모의를 계획한 것도 상동청년회였다.14)

또한 상동파의 일원으로 이후 신민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던 상동청년회 회원인 이준(李儁), 이동녕, 옥관빈(玉觀彬), 조성환(曺成煥), 김구 등이 회합을 갖고 “도끼를 메고 조약 반대의 상소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제 실천에 옮긴 주체도 역시 상동청년회였다.15) 이밖에도 1907년 8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견인해낸 모체가 또한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이었다.16)

이렇게 볼 때 상동청년회가 단순한 종교단체에 머물지 않았던 기독교구국단체였음이 분명하였다.17)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 회원 외에도 뜻을 같이하는 구국청년 1천4백 명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대운동과 부패한 구한말 관료 및 일진회 등 친일어용단체에 대항하는 반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이상과 같이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을 중심한 당시 전국규모의 반일구국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을 일컬어 ‘상동파’(尙洞派)라 지칭한다.

한편 이 시기 전덕기를 중심으로 한 민족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족교육사업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897년 상동교회 안에 공옥여학교(攻玉女學校)와 1899년 공옥남학교(攻玉男學校)라는 초등과정의 학교를 설립·운영하였는데, 이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대부분이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은 물론 ‘상동파’의 인적·물적 토대가 되었다. 1904년 9월 상동청년학원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18) 초대 교장 이승만(李承晩), 부교장 박승규, 한글학자로 유명한 주상호(주시경), 장도빈(張道彬), 최남선(崔南善) 등 당시 최고의 교사진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당대 최고의 교사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전덕기의 폭넓은 평소 인맥의 결과였다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상동청년학원 교장이었던 이승만은 “년 전에 시목사( 스크랜턴)가 (미국으로) 떠나신 후로 전도사 전덕기 씨가 주장하여 다른 교사나 목사의 주관함이 없이 몇몇 믿는 형제들로 열심히 전도하며 공부하여 청년회가 점점 흥왕하여 찬조하는 자가 많은지라”19)라고 했다. 이에서 보듯 상동청년학원은 스크랜턴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고 있던 동안 상동교회 운영 책임을 맡고 있던 전도사 전덕기에 의해 전적으로 운영되었다.

다시 말해 상동청년학원의 운영 일체를 전덕기가 운영했으니 상동청년학원의 교사진이 당대 최고의 민족지도자급 인사들로 구성될 수 있었던 것도 전덕기의 폭넓은 인맥과 활동의 결실이었다. 요컨대 전덕기는 1900년대 초 국내 민족구국운동의 인적·물적 토대와 민족운동의 공간을 제공하고 마련한 장본인이었으며, 이를 비밀결사 신민회로 연결시킨 중심에 또한 전덕기가 있었다.

3. 신민회에서의 전덕기의 역할과 활동

1900년대 한국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꼽는다. 1907년을 전후 국내에 비밀결사체로 조직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사건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신민회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한 창립시기 등이 불분명한 상태이다.20) 이 글에서는 전덕기와 상동청년학원 등이 중심이 된 ‘상동파’가 신민회 조직의 인적·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동안 신민회 창립시기를 1907년 4월 설로 보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보다 1년 앞선 1906년 4월 설도 주목할 만하다.21) 이렇게 비정하는 근거는 첫째 신민회 중앙조직의 총서기를 맡았던 이동녕(李東寧)이 1906년 4월 이미 러시아로 망명했기 때문에 1907년에는 국내에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신민회 재정을 총책임지고 있던 전덕기를 중심한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주요 인맥인 이른바 ‘상동파’가 1906년에 이미 국내 신민회 창립의 모체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1907년 2월 미국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가 신민회 조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과 1906년 여름부터 이회영(李會榮), 이상설(李相卨), 이동녕 등이 추진한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확보 사업이 신민회 사업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신민회 창립 시기를 1906년 4월경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의 전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1903년 이후 전덕기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상동청년학원, 즉 ‘상동파’의 활동은 신민회 창립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 무방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신민회 창립의 모체는 당시 상동교회 내에 결성되었던 상동청년학원을 중심한 ‘상동파’ 인맥이 주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전덕기가 있었다.22)

전덕기가 신민회 창립 발기인 7인23)의 한 사람이었고, 신민회 중앙총회 평의원 겸 경성부 총감을 맡았다는 점 외에 특히 신민회 운영에 필요한 재무를 총괄했다는 점에 주목할 때 신민회 조직과 운영에서 점했던 전덕기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가늠할 수 있다.24) 재정적인 업무와 관련한 전덕기의 역할과 활동은 이미 독립협회 시절부터였다.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된 후 전덕기는 이동휘(李東輝), 지석영(池錫永), 이만수(李晩壽) 등과 함께 재정 책임 부서인 서무부장급으로 활동한 바 있다.25) 이밖에도 1900년 상동교회 건축 때 ‘유사’ 곧 교회건축 재정관리 책임을 맡았으며,26) 1906년 6월 상동청년학원에서 발간한 『가뎡잡지』 창간 때도 회계를,27) 1912년 감리교연회에서도 선교회 재정위원으로 선임되는28) 등 그는 자신이 관계된 조직이나 단체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재정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렇듯 전덕기가 자신이 관계된 조직체에서 재정과 관련된 책임자로 선임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높았음을 의미한다. 어느 조직과 단체이든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자금을 모으고 관리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여간한 능력과 신뢰를 받지 않고는 재무 일을 맡을 수도, 맡겨지지도 않는 법이다. 이같이 어렵고도 중요한 재정 책임을 신민회에서도 맡았다는 점은 신민회에서의 그의 위상이 안창호와 동일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재무(원)’는 신민회 비밀조직에서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 곧 “신입자의 입회 자격을 심의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듯, 전덕기 역시 신민회 조직과 운영에 필요한 재정 전체를 총괄하는 ‘재무(원)’를 총괄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안창호와 동일한 위상에 있었다 할 수 있다. 전덕기에게 이렇듯 중요한 역할이 부여된 것은 재무와 관련된 그의 과거 경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가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의 중심 지도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이끌어가기 위한 인적·물적 지원에 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안창호가 귀국한 후 제일 먼저 신민회 창립문제를 상의할 대상이 전덕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자료상으로 안창호가 귀국 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양기탁(梁起鐸)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29) 양인은 10년전 독립협회 때부터 함께 활동한 동지였으며, 당시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로 실제 신문을 관장하고 있었으며 사회적 지명도가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밖에도 양기탁이 상동파 회원이었고 전덕기 역시 과거 독립협회 시절부터 동지였다는 점, 그리고 그에게 신민회 운영에 필요한 재정총괄의 책임이 맡겨진 점에 주목할 이들 3인 사이의 회합이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한편 신민회 창립을 위한 준비 모임 공간 또한 상동교회 내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 근거로 전덕기가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우선 이 같은 기밀을 요하는 모임 장소로서 당시 교회만큼 좋은 장소가 없었다. 또한 이들이 평소 상동청년회 및 상동청년학원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터라 더 없는 장소였다.

전덕기의 권유에 따라 신민회에 입회했다고 증언한 바 있는 김진호는 신민회 회합 장소가 상동교회였다고 하면서 “그때에 지하실에 모인 사람은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 이회영(李會榮), 이승훈(李昇薰) 씨 등이다. 그 회의 집회는 매주 목요일 하오 7시에 교회에 모여 잠깐 예배를 보고 난 후에 여러 지사들의 열렬한 강설(講說)이 있었고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씨도 자주 와서 강설하였는데 예전 독립협회 후신들이다”30) 라고 증언한 바 있다. 요컨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 등 국운이 숨가쁘게 기울어가던 시기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원을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이 결집·활동하였고, 이렇게 형성된 ‘상동파’의 인맥과 기맥이 바로 신민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그 중심에 전덕기가 있었다.

4. 105인사건과 말년의 활동

105인사건은 일제의 국권강점 직후 국내의 반일민족세력, 특히 기독교계 반일민족 인사들을 한숨에 제거할 의도에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正毅)총독 모살미수’라는 허위의 조작사건을 말한다.31) 이 사건에 피체된 인물만 70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기소자 123명 중 제1심에서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아 이를 ‘105인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여러 면에서 주목되어 왔지만 그중 이 사건을 통해 신민회의 실체가 처음으로 밝혀졌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 사건을 통해 밝혀낸 신민회의 실체는 매우 과장되고 왜곡되었다. 따라서 일제가 105인사건을 통해 밝혀낸 신민회를 실제의 신민회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신민회 중앙과 지방조직의 지도부 인사들의 면면과 초기 신민회의 표면적인 활동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검증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여기서는 전덕기와 관련 사항만을 추려 소개하기로 한다.

후술하듯 전덕기는 105인사건 때 불기소 명단에 나올 뿐 123명의 기소자 명단에는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105인사건과 신민회 등과 관련된 전덕기가 직접 진술한 경찰신문조서나 검사조서 및 공판기록도 없다. 이 외에도 105인사건과 관련된 전덕기의 회고담이나 글도 없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전덕기는 신민회의 주요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서울지역 신민회 총감과 신민회 재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동교회를 비롯한 여러 조직과 단체 회원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던 터라 그의 권유에 따라 신민회에 가입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32)

105인사건 기소자 123명 명단에는 전덕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105인사건 피의자 진술 가운데는 신민회 회원으로 전덕기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한편 불기소자 266명 명단에는 전덕기의 이름이 보인다.33) 105인사건에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대거 구속되었는데 발기인의 한 사람이자, 경성부 총감 및 재무총책을 맡고 있던 전덕기가 기소자 명단에 없고, 단지 불기소자 명단에만 들어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배경과 이유에서 기소되지 않았을까? 그동안 105인사건 기소자 명단에 전덕기의 이름이 빠진 이유는 105인사건 때 피의자로 구속되었으나, 신문(訊問) 과정에서 받은 심한 고문과 그 여독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34)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 전 연구에서 밝혀졌다. 그에 따르면 전덕기는 105인사건에 피의자로 구속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105인사건 때 받은 심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그간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가 1914년 3월 사망한 것 역시 그의 오랜 지병인 폐결핵 때문이었음도 밝혀졌다.

이를 밝혀낸 이덕주 교수의 연구35)에 따르면 전덕기는 105인사건으로 700여 명의 피의자들이 구속당하던 기간(1911.9~1912.6)에도 그는 국내외적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예컨대 그는 1911년 8월 ‘조선목사청년회역원일본시찰단’(朝鮮牧師靑年會役員日本視察團)의 일원으로 현순(玄楯), 양전백(梁甸伯), 한석진(韓錫晉), 이상재(李商在), 김일선(金日善), 이원긍(李元兢) 등과 함께 1911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일본 기독교계를 방문하였고36) 귀국 후 2개월만인 그해 10월 다시 일본감리교회 총회 참석차 도쿄를 다녀왔다.37) 또한 그해 12월 20일 정동교회에서 거행된 협성신학교 1회 졸업식에 참석하여 졸업축사를38) 하는 등 105인사건 와중에 전덕기는 평소와 다름없는 활동을 하였던 것이 밝혀졌다.39)

105인사건을 통해 신민회의 전모가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전덕기가 신민회 조직상 주요간부였음이 밝혀졌는데 왜 일제측은 전덕기를 구속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이해는 간단치 않다. 그러나 우선 쉽게 상정해 볼 수 있는 원인은 일제측이 105인사건을 조작한 의도가 서북지방의 반일적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익히 아는 대로 105인사건은 당시 총독(寺內正毅)이 1911년 말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가하기 위해 경의선 철도를 따라 서순(西巡)할 때 평양, 정주, 선천 등 경의선 주요도시에서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허위 날조사건이다.

요컨대, 이 사건은 지역적으로 서북지역으로 한정시켰기 때문에 피의자 거의 전원이 당시 서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로 제한되었다. 이 점에서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덕기를 얽어매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사건 주모자로 연루된 양기탁, 유동열, 임치정 등 역시 서북인이 아닌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념하면 ‘한성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전덕기가 당시 한국 기독교계에서 점하는 위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105인사건 어간의 전덕기 행적에서 보듯 이 사건 와중에 그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 자격으로 일본을 두 차례나 방문하였다. 바로 이 점, 곧 당시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한 인물을 허위사건에 얽어매는 데 일제당국이 부담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전덕기를 105인사건에 연루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일본 방문 등을 통해 회유하려는 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40)

그러나 일제 당국의 ‘회유책’은 그에게 가당치 않았다. 105인사건 때 구속되지 않았고, 일본을 두 차례 다녀오는 등 일본의 은밀한 회유책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1914년 3월 23일 3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올곧은 행적은 변함이 없었다. 즉 105인사건 이후 신민회 조직이 와해되고 그동안 뜻을 함께하던 많은 동지들이 국망 이후 국외로 망명길에 올랐던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실의와 좌절에 빠질 법했다. 설상가상으로 육신의 병까지 하루가 다르게 더욱 깊어지면서 마음도 몸도 약해질 수 있었다.

오호 전덕기 씨의 별세
오호 전덕기 씨의 별세

그러나 전덕기는 달랐다.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해 온 구국운동을 향한 선구자의 면모를 그는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견지했다. 와해된 신민회 조직을 재구축하는 일과 신흥무관학교로 대표되는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 밖에도 105인사건으로 구속된 이승훈의 오산학교와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의 운영을 맡아 보는 등 깊은 병중에도 목회자로의 올곧은 신앙심과 한결같은 애국정신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구국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흔치않은 애국인사의 한 사람이었다.

맺음말

全德基氏 碑式 尙洞례배당에서 攻玉學校 同窓會主催로
全德基氏 碑式 尙洞례배당에서 攻玉學校 同窓會主催로

이상에서 보듯 구국운동의 선구자 전덕기의 생애는 길지 않았지만, 그의 전 생애는 헌신과 사랑의 기독교 정신을 온 몸으로 구현한 ‘민중 목회자’이자 국망(國亡)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구국운동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였다. 우리나라의 타율적 근대화의 단초(端初)가 된 병자수호조약(1876)이 체결되기 한해 전 12월에 태어나 1914년 3월에 타계했으니 그의 생애는 39년에 불과했다. 동년배인 이승만과 비교하면 너무도 짧은 생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돌아보았듯 그의 짧은 생애는 역사적으로 매우 높이 평가받기에 충분한 삶이었다.

독립운동선구 고 全德基 목사 23일 추도회
독립운동선구 고 全德基 목사 23일 추도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숯장수 삼촌댁 양자로 입적, 고단한 어린시절을 보내던 중 선교사 스크랜턴을 만난 이후 그의 활동은 영육간에 찌들려 있던 이웃을 돕는 ‘민중 목회자’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생애는 단순한 전도사, 목사의 삶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단순한 신앙적 목회자의 삶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나라를 걱정하며 구국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다했던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상동교회를 공간으로 그 안에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조직하고 이를 확대시켜 ‘상동파’라는 방대한 항일민족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과 인맥이 신민회 조직의 기반이 되었고 그 중심에 늘 전덕기가 있었다.

금년 3월이면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을 맞는다. 이러한 기념비적인 때를 앞두고 국가보훈처에서 2014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전덕기를 선정하고 기리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주석

1) 전덕기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송길섭,『민족운동 선구자 전덕기 목사』, 상동교회, 1979; 윤춘병,『전덕기 목사와 민족운동』,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6; 임용택,「전덕기의 신앙관과 민족의식 고찰」, 감리교신학대학원, 1989; 이덕주,「전덕기의 생애와 사상」,『나라사랑』(전덕기선생 특집호) 1998, 제97집 등을 참조.

2) Annual Report of Foreign Mission Board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93, p.255.

3) 이덕주 앞의 논문, 29쪽.4) W.A. Noble, “Pioneers of Korea”, Within the Gate, C.A. Sauer ed, The Korea Methodist News Service, Seoul,1934, p.29.(이덕주, 앞의 논문 31쪽 재인용).

5)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란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J.Weseley)의 고향인 영국 ‘엡워드’를 따 미국에서 1889년 청년단체로 조직된 후 우리나라에는 1897년 처음 조직되었다.(<대한크리스도인 회보>,1897.9.8.‘청년회’); 조이제,『한국감리교청년회100년사』,1997,47-53쪽.6) 노불, <승리생활>, p.51; 김진호, <전덕기목사 약사>(1949)에서는 청년회 수가 수천 명이라 했다.

7) 교장에 이승만, 부교장에 박승규, 교사로는 스크랜턴 대부인(영어), 주시경(국어), 류일선(수학), 헐버트(Homer B. Hulbert, 역사), 김창환(체육), 이필주(군사) 그리고 성경과 종교 관계는 전덕기가 맡았다(리승만, “상동청년회의 학교를 셜시함”, <신학월보>, 1904.11. 영인본, 440-450쪽; 윤춘병, 앞의 책, 21-22쪽).8) 이날 개교식에서 개회사는 교장 이승만, 학교설립취지는 청년회장인 전덕기, 축사는 게일, 헐버트, 스크랜턴, 학사소개는 부교장 박승규, 교과목 설명은 교사 주상호(주시경)가 맡아 진행했다(<신학월보>, 11월호 , 104, 444쪽).

9) 상동교회 내에는 이미 1897년 공옥여학교와 1899년 공옥남학교를 세워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등 일찍부터 신교육 보급에 앞장섰다. 상동청년학원은 이러한 점에서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중등교육기관이었다(윤춘병, 앞의 책, 23쪽).10) 金九自敍傳, <白凡逸志>, (尹炳奭 直解本), 輯文堂,1995, 144-145쪽; 金九, <白凡逸志>, 敎文社, 1979, 146-147쪽.

11) 김구자서전 <백범일지>(윤병석 직해본), 집문당, 1995, 144-145쪽.

12) 전택부,「상동파-그역사와 독립꾼들」,토박이 신앙산맥』,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158-159쪽.

13) <萬國耶蘇敎靑年會>,『顧問警察小誌』,韓國內部警察局,1910.; 3.1운동 직후 일제측이 작성한 기밀문서에서도 상동청년회에 대해 “ 명치37년(1904) 가을, 즉 일로전쟁이 가장 치열할 때 耶蘇敎 전도란 이름 아래 상동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 회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스클랜튼-오기)의 알선으로 출옥한 李承晩을 원장으로 한 청년학원을 경영하여 유력한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친다고 위장하였지만 실은 日露戰爭의 대세가 친로파의 감퇴하는 경향으로 나타나자 이전의 獨立協會가 耶蘇敎의 가면을 쓰고 대두한 것이다, 청년회의 간부는 이동녕, 이승만, 정순만, 李喜侃, 박용만, 趙成煥 외에 야소교 목사 전덕기를 회장으로 현 上海 假政府 국무총리인 이동휘 등도 참가했으며 閔泳煥, 李始榮, 이상설 등 대관들의 후원도 있어 그 회원이 4만을 칭하고 그 주의 주장 물론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도 배척하지만 러시아를 대신하여 심각하게 침입하는 일본제국의 대한정책에 반대하는데 있다”고 하여 상동청년회의 반일적 성향과 인맥이 상해 임시정부까지 연결되었다고 보고 있다(「朝鮮獨立運動の根源」,『齋藤實文書』第9卷, 民族運動編(-), 高麗書林, 影印本,350쪽).

14) “本國耶蘇新敎人 全德基, 鄭淳萬 등 自新條約調印後 每日會于尙政丞洞(在崇禮門內)內 敎會堂, 自下午七時至九時爲國家祈禱于上天 男女敎人至者數千 後德基淳萬 敎友平安道壯士 十人 屢廣欲誅朴濟純等數人”(鄭喬, 『大韓季年史』(下), 國史編纂委員會, 影印本, 1974, 191쪽).

15) 金九, 『白凡逸志』, 白凡記念事業會, 1968, 162-163쪽 참조.

16) 이 부분에 관해서는 윤춘병,「해아만국평화회의에 특사파견 전말사건」, 앞의책, 115-125쪽 참조.

17) 주요한, 『安島山全書』, 三中堂, 1963, 124쪽.

18) <제국신문>, 1904.10.4.

19) 리승만, ‘상동 청년회의 학교를 셜시ᄒᆞᆷ’, <신학월보>, 1904.11, 440-450쪽; 원문을 현대어로 옮김.

20) 신민회 창립 시기와 신민회 실체 등에 관해서는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증보개정판), 한성대학교출판부, 2013. 참조.

21) 尹春炳,「全德基牧師와尙洞靑年學院考察」,『全德基牧師와民族運動』, 韓國監理敎會史學會,1996, 57-58쪽.

22) 물론 신민회 조직에는 상동파 조직 외에도 (1)梁起鐸, 申采浩 등 <大韓每日申報> 언론계열,(2)李東輝, 李甲 등 무관출신계열 (3) 安昌浩, 李剛 등 美洲 公立協會계열, (4)李昇薰, 安泰國 등 西北地方의 상인과 민족자본가 계열 등 5개 계열의 지도력 인사들이 이 결합하여 결성된 全國規模의 秘密組織體였다.(愼鏞廈, 앞의책,18-19쪽 참조).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중 상동파 계열과 전덕기 활동으로 제한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23) 신민회 창립 발기인 7인은 전덕기 외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이었다.24) <安昌浩豫審訊問調書>(1932),『續編島山安昌浩,』,도산기념사업회, 1954, 87쪽.

25) 慎鏞廈,『独立協会研究』,一潮閣, 1976, 101쪽.

26) <상동교회약사>

27) 상동청년학원,『가뎡잡지(창간호), <본샤샤원>란, 1906. 6.

28) <감리교 연회록>(1912), 2쪽.

29) 1907년 2월 20일 귀국한 안창호는 이틀 뒤인 2월 22일 <大韓每日申報>로 양기탁을 방문하여 美洲共立協會 이름으로 國債報償金 35圓을 전하고 있다(<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4일자(제447호) 雜報란 참조).

30) 김진호, <81세 회고>(1953년)『궁정교회80년사』(부록), 1991, 275-76쪽.

31) 105인사건 전반에 관해서는 윤경로,『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개정증보판), 2013, 한성대학교출판부 참조.

32) 이와 관련해서는 김진호, <81세 회고>(1953년)『궁정교회80년사』,(부록), 1991, 275-76쪽 참조.

33) 윤경로 위의 책, 23쪽.34) 백낙준,「한국교회의 핍박 특히 사내총독암살미수음모에 대하여」,『신학논단』제 7집, 1962, 23쪽 ; 송길섭,『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 100쪽.

35) 이덕주,「전덕기의 생애와 사상」,『나라사랑』제 97집, 1998. 65-77쪽.

36) <그리스도인회보>,1911년 7월 30일자;8월 15일자 ; <매일신보>,7월 25일자 ; 8월 15일자.

이 시찰단은 일제가 한국을 합병한 후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시도한 프로그램이었으나 참가자들이 일본의 한국 합방을 비판함으로써 일제 측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37) <그리스도인회보>, 1911년 10월 30일자.

38) 위의 주.

39) 이 부분에 관한 좀더 상세한 내용은 이덕주 앞의 발표문 참조.

40) 김진호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전덕기 목사를 회유하기 위해 사람을 중간에 세워 한일교회연합집회를 인도하자는 등의 제의를 하였으나 전목사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고 한다(金鎭鎬,<81세회고>,『궁정교회80년사 』(<부록 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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