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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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강기동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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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동

강기동 , 1884 ~1911 , 대통령장 (1962)

강기동 선생은 일제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되어 근무하다가, 헌병부대로 끌려온 의병들을 보고 이들을 탈출시키고 본인 스스로도 의병활동가로 변신하여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이은찬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은찬의 피체 이후에는 의병장이 되어 제2창의원수부를 이끌며 일군과 수십 차례의 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일제의 대대적인 의병토벌작전으로 피체, 28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병투쟁이 쇠퇴할 즈음, 투쟁 반열에 나서다

한말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지키고자 했던 운동이 의병전쟁이다. 특히 1907년 8월 일제의 한국군대 강제해산을 계기로 의병전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후기의병전쟁이라 한다. 후기의병전쟁은 1908년 5월까지는 유림 출신 의병장들이 연합의병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와 ‘임진강연합의병’을 조직하여 서울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5월 이후 의병장 허위를 비롯한 대다수의 유림 출신 의병장들이 순국, 피체되고, 1908년 6월부터 일제가 대대적인 의병 탄압을 목적으로 헌병보조원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전통시대의 병법에 따른 대부대 중심의 연합의병으로 전투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08년 6월 이후 후기의병전쟁의 양상은 산악을 근거로 한 소규모 부대 중심의 유격전 형태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유림 출신의 보수적 의병장들은 사상적, 계급적 한계로 말미암아 국외로 거점을 옮기거나 전투대열에서 이탈해 나갔다. 이때 유림 출신들을 대신하여 후기의병전쟁의 전면에 등장한 세력이 지휘능력을 갖춘 평민 출신의 의병장들이었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제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란 이름으로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옴에 따라 이들 평민의병장들의 투쟁도 점차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반일 투쟁의 대열에 나선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의병장 강기동(姜基東, 1884. 3. 5 ~ 1911. 4. 17) 선생이었다.

의병을 탄압하는 헌병보조원에서 의병장으로의 전환

선생은 1884년 3월 5일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제가 의병들의 토벌과정을 기록한 ‘폭도에 관한 편책(編冊)’에 의하면 선생은 1909년 1월 당시 26세로 오랫동안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다소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형제들과의 불화로 가족들이 경기도 부평군으로 이사하자, 그 자신도 식솔을 거느리고 이 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성장 후 일본군 기병대에 입대하여 근무하였으며, 일본어가 능통한 것을 계기로 1908년 6월 이후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되어 경기도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인식 등 2명의 의병이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그가 있던 헌병분견소 내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이들 의병을 탈주시키고 자신도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09년 1월 15일 그는 옥문을 부수고 의병 길인식 등을 탈주시키는 한편, 총 2정, 권총 1정, 총검 5정, 탄환 300발을 탈취하여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투신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일제의 첨병인 헌병보조원으로 의병들의 무장투쟁을 일선에서 저지하던 그가 어떠한 심적 변경을 일으켜 의병으로 투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의병전쟁이 거의 소멸되어 가는 단계에 의병으로 투신한 그의 행동은 지금까지 그가 해 온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민족으로부터 찾으려는 결단이었음에 분명하다.

일 헌병 시절 얻은 정보를 의병부대에 제공

선생이 투신한 창의원수부는 중군장 이은찬을 정점으로 우군장 윤인순, 좌군장 정용대가 포진한 경기 동북지방 최대의 연합의병부대였다. 창의원수부는 1909년 1월 한 달 동안 포천, 양주지방의 산악을 배경으로 약 27회에 걸친 반일투쟁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창의원수부는 연일 계속되다시피 한 전투로 인해 군량미와 탄약 결핍, 의병들의 부상과 사망으로 인한 병력 감소, 의병장 이은찬의 부상으로 이탈자가 발생하는 등 진영 내부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이은찬은 의병들의 사기 진작과 군자금 확보, 무기와 군량미 보급투쟁, 병력 보충 등을 목적으로 휴식기를 취하며 부대를 재정비하려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 창의원수부에 투신한 선생은 의병장 이은찬에게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계획을 건의하였다. 우편물을 단순히 편지로만 생각하고 있던 이은찬은 1909년 2월 9일 “금번 우리 당(黨)에 관여한 전 헌병보조원의 말에 의하면 재무서에 납부하는 공금은 우편국에서 취급, 현금은 우편물과 일괄하여 경성에 송부하는 것이다. 고로 금후 지포(芝浦)와 의정부 사이에서 공금이 있는 우편물을 약탈하고자 한다”고 한 데 이어, 2월 24일에는 경기도 영평군에 나타나 “당 지방으로부터 경성행의 우편물에는 확실히 다액의 현금이 있을 것이다. 전 헌병보조원이었던 강기동으로부터 듣고 알았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은찬이 구상한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계획은 선생이 헌병보조원 시절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계획되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이 제안한 군자금 확보계획은 이은찬으로 하여금 “우편물 중의 현금은 한국 신민으로부터 징수한 것으로 왜적 관리의 회(懷)를 배불리하는 것이다. 이를 약탈하여 한국 빈민을 구휼함은 우리 의병의 의무”라는 인식을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선생의 군자금 확보계획은 세금탈취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와 매판정부에 반대하는 전시효과를 노림과 동시에 의병부대의 군자금 확보를 목적한 다각도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선생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헌병대 내부의 사정을 의병장 이은찬에게 제공함으로써 창의원수부의 반일투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선생은 투신한 지 불과 1개월여 만인 1909년 2월경 일약 의병장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몸 담았던 이은찬 의병부대의 해산

1909년 2월 한 달 동안 19회에 달하는 전투를 전개한 이은찬 의병부대는 2월 25일 양주군 석곡면 부근의 ‘돌압산(乭壓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전력을 거의 소진한 이은찬 의병부대는 이틀 후 다시 전투를 벌임으로써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은찬 의병부대가 타격을 입은 것을 계기로 일제는 3월부터 양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이은찬 의병부대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3월 16일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이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 중 사망한 데 이어 3월 31일에는 의병대장 이은찬마저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의병대장 이은찬의 피체는 사실상 이은찬 연합부대의 와해를 뜻하는 것이었고, 경기북부 의병들에게는 구심점을 잃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다수 의병들은 서울로 올라가거나 십 수 명씩 집단을 이루어 강원, 황해 방면으로 도주하는 등 몸을 숨기기에 분주하였다. 어떤 의병들은 가족을 이끌고 어디론가 이사하여 행방을 감추거나 민가에 잠복하여 무기를 숨기고 양민으로 생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동요 속에서 1909년 6월 이은찬의 처형소식이 전해지게 된다.

선생이 헌병분견소에서 도주하였다는 내용을 여주경찰서에서 보고한 문서. (1909년 1월 17일)
선생이 헌병분견소에서 도주하였다는 내용을 여주경찰서에서 보고한 문서. (1909년 1월 17일)

제2의 창의원수부 결성과 의병 투쟁

이은찬이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선생은 곧바로 4월 초 남학서, 오수영, 임명달 등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이은찬이 사용했던 ‘창의원수부 중군장’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계승,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 후 선생은 1909년 6월경부터 본격적인 대일항쟁을 시작하면서 경기 동북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생은 일본군의 의병토벌 기간 동안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면서 군자금 확보와 군기 마련 등 조직 강화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 등을 통해 조직을 정비한 선생은 1909년 6월 8일 의병 20여명을 30년식 보병총 4정과 스나이돌식 총으로 무장시키고 양주군 ‘바뎅이’촌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고안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추격해오자, 양평군 남종면 우천동으로 유인한 그는 계속 추격해 오는 헌병대원들과 우천동 부근 한강연안에서 교전을 벌인 뒤 양주군 분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선생이 이끄는 의병부대를 보고 일제조차도 보고서에서 “그의 행동은 자못 교묘하여 산병선(散兵線)을 펴고 그 퇴각함에 당하여서도 30년식 총을 소지한 자 4명을 전부(殿部)로 하고 질서 정확하게” 퇴각하였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909년 7월 당시 일본군이 포착한 선생은 “헌병보조원의 모자와 다갈색의 양복을 착용하고 권총을 휴대하였으며 의병의 총기는 무라타(村田)총 3정, 나머지는 전부 모-젤 총을 휴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빈약한 무기를 소지하고서도 선생은 일본군 및 친일주구를 상대로 한 게릴라전을 계속 감행해 나갔다. 1909년 6월부터 8월까지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벌인 세 차례의 전투를 제외하면 의복, 식량,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보급투쟁과 밀고자 처단 등이 그 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급투쟁적 성격의 강기동 의병부대가 본격적으로 대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9월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1909년 9월 13일 선생은 22명의 의병을 이끌고 퇴계원에서 주재헌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후 9월 중, 하순경 의병 양평군 면종면 매곡을 습격하였으나, 양주군 마석우리 헌병대의 추격을 받아 1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한강을 건너 양주군 하도면 백월리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고안헌병대의 습격을 받은 의병부대는 재차 한강을 건너 양평군 북면으로 이동하였다. 9월 하순경 20여명의 부하를 대동한 선생은 가평군 외서면 대성리 화랑동에 나타나 군자금을 모집한 뒤 양평군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이와 같이 9월 한 달간 17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인 선생은 일본군과 직접적 전투는 될수록 피하고 소규모로 부대를 편성하여 산악을 근거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의병 대토벌작전으로 피체, 28세 나이로 총살로 순국

한편 일제는 선생의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천금을 내거는 등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10년 2월 10일부터는 두 달에 걸쳐 순사와 밀정들을 변장시켜 그가 활동하던 광주, 포천, 양주지방을 샅샅이 뒤지는 등 선생의 체포에 혼신을 기울였으나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헌병대의 활동으로 1910년 3월경부터 선생 부대의 한인수와 김순복이 피체되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소규모 부대의 유격전으로는 일본군을 궤멸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선생은 군자금을 모집, 저축한 후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액수가 부족한 까닭에 필요한 액수를 모을 때까지 국내에 잔류하면서 다시 활동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강화되는 일제 토벌대와 이에 대한 항전 속에 선생의 의병부대는 많은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부대를 해산한 다음,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본 경찰을 넘어뜨리고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다시 의병 대열에 합류하였다. 선생을 놓친 일제는 다시 강기동과 그의 의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임시파견소를 설치하고 일대 토벌을 단행하였다. 선생은 끝까지 토벌을 피해 강원도로 이동하며 활동하였으나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한 일제가 1910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40여일 간에 걸쳐 황해도 지역 내 의병 대토벌작전을 단행함에 따라 더 이상의 활동 근거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강 선생은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으나 북간도로 이동하던 도중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피체되고 만다. 서울로 압송된 선생은 4월 17일 오전 8시 28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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