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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채원개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8년

주요공적

1934년 한국독립당에 입당, 광동지부 간부로 활동

1940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

1944년 광복군 제 1지대장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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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곳곳에서 독립전쟁을 치르며 항일 자취를 남긴 광복군 지휘관

채원개

채원개 , 1895 ~1974 , 독립장 (1968)

3·1운동을 시작으로, 재만 독립군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및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에 두루 참여하였고, 낙양강무학교 유학과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거쳐 중국군에 복무한 다음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이 같은 그의 독립운동 역정은 일제 침략기 중국대륙을 무대로 전개된 한인독립운동의 범주와 규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서론

일제 침략기 독립운동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국내, 중국동북지역(만주), 중국관내지역, 러시아 연해주 지역, 미주 지역, 일본 지역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각 지역이 처했던 지정학적·사회적 환경에 의해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 및 성격도 특징지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각 지역의 독립운동은 개별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가운데, 지역적 범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분산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지역별 양상을 아우르고 연결시켜준 인물들이 있었다.

채원개도 그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한 다음, 국외로 망명하여 중국동북지역을 무대로 한 무장투쟁을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 중국 군벌전쟁 참여 및 중국군 복무, 한국광복군 활동으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항일역정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기에 채원개의 독립운동을 살피는 일은 독립운동의 광활한 지역적 분포와 전개 형태의 다양성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재만 독립군 활동 참여

본관은 평강(平康). 본명은 형석(瀅錫)이며, 호는 거평(居平)이다. 활동 과정에서 형세(衡世, 중국관내지역 활동 시), 군선(君仙, 중국동북지역 활동 시) 및 군선(君善), 형석(瀅錫)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평안남도 영원(寧遠) 출신으로, 병묵(秉默)의 외아들이다. 고향에서 의명소학교(義明小學校)를 졸업하였다. 1910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자, 21살 때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여 4년간 복무하였다.

스스로 “군사기술을 전수(專修)하면서 내일을 기대하였다”고 하였듯이, 4년이라는 청년기의 짧지 않은 조선보병대 복무 사실은 채원개의 독립운동 역정이 군사활동 부문 쪽으로 두드러지게 되는 발단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조선보병대는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 근위보병대(近衛步兵隊)와 근위기병대(近衛騎兵隊)가 남겨졌는데, 1913년 이중 근위기병대는 해산되고, 보병대는 조선보병대로 축소 개편되어, 1920년대 말에 직면한 경제공황 상황을 배경으로 해산되었다. 참고로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투탄 의거의 장진홍(張鎭弘) 의사와, 1921년 거물 부일배 민원식 처단 의거의 양근환(梁槿煥) 의사 등이 조선보병대 출신이다.

무단통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1910년대 후반기 그가 조선보병대에 근무하며 체득한 군사적 실무능력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의식은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신의 항일진로를 결정해 나가는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 때 귀향하여, 3월 28일 예준기·홍태번·백윤□·이운서 등 고향 친구들과 동서면 주민들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다음, 장진·강계 등지에 잠시 피신한 다음, 8월 16일(음) 북평면장(北平面長) 김 모(某)의 안내로 북하동(北下洞)에서 국경선을 넘어 안동(安東縣)현의 남평여관(南平旅館)에 투숙하였다가, 이륭양행(怡隆洋行) 선편으로 상해〔上海, 상하이〕에서 귀국 중이던 김진성(金振聲)이라는 인물을 만나, 상해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정황을 청취하고, 북만주행을 결심했다.

그래서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해 흥경현(興京縣)과 유하현(柳河縣)을 지날 때, 통화현(通化縣) 쾌대무자(快大茂子)에서 신흥학교(新興學校) 분교(分校)를 시찰하던 중, 조선보병대 동료 강노국(姜魯國) 참교(參校)를 만나 그로부터 군사훈련 교관으로 참여하자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도총재: 朴長浩, 부총재: 白三奎, 총단장: 趙孟善〕 본부에서 조맹선을 만났다. 그의 요청으로 북만행을 접고, 군사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는 “태극기 게양 하에 거행되는 경축식전에 참가하여” “감개무량하였다”고 회고했다.

1920년 가을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이 전개되자, 채원개는 출동부대 지휘 책임을 맡아, 통임지대 관구(通臨支隊管區, 通化縣과 臨河縣 지역)의 제1지대에게는 유수(留守) 임무를 맡기고, 제2지대를 동원하여 집안현(輯安縣) 쌍분구(双岔溝)에 집결하여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향했다.

11월 9일 새벽 영변군 고성면 북쪽 산속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려 전투를 벌인 끝에 채원개는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관전현(寬甸縣) 소아하(小雅河)에 있는 임시기지로 철수하였다. 이후 일제의 토벌이 끝나자 그는 “군용(軍容)을 정돈하며, 병력을 확충하며, 지방 적성분자(敵性分子)를 숙청하며, 교포 자치조직 강화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병사(兵舍)도 훈련장도 교육용 시설도 없었다. 피복이란 바지·저고리 1벌, 배낭 1개, 짚신 1켤레, 두건 1개였는데, 급식은 옥수수·좁쌀의 주식과 된장·소금이 부식이며, 영사(營舍)란 산간수림(山間樹林) 중에 건설된 나뭇가지와 풀로 만든 천막이었다. 이도 장기적인 것이 아니다. 위치는 시시(時時)로 변경해야 했으며, 행동은 주복야행(晝伏夜行)이었다”는 그의 회고는 당시 독립군이 열악한 조건에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야간에 활동을 전개했던 상황을 알려준다.

1921년 겨울 통의부(統義府) 대표로 김창환(金昌煥)·심용준(沈龍俊)·김이대(金履大) 등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고, 이후 상해에 머물며 임정 활동에 참여하였다.

잠시 채원개가 생각한 국민대표회의의 경과와 성격을 살펴보면, 임정에 대한 기대가 식어가고 독립운동의 ‘총영도 기관’으로서 권위가 흔들리게 되자, 안창호의 주도로 “체계 있는 이론의 실천과 통일된 영도기구”를 만들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다.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대표 200여 명이 상해에 모여 1921년 12월부터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독립운동 영도기구’를 만드는 방안으로 ‘임정을 개조·강화하자’는 주장과 ‘따로 새로운 정부를 창설하자’는 주장으로 갈라져, 갈등과 분열만 확인한 채, 1923년 중반에 이르러 결렬되고 말았던 것이다.

2. 중국군 유학 교육과 군벌전쟁 참전

1923년 3월 25일 열린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7회 이사회에서 최천호·강창제와 함께 특별회원에 선임되었고, 6월 3일에는 심용준과 함께 ‘천마산대(天摩山隊) 대표’ 자격으로 “우리 대표들은 대성질호(大聲疾呼)하여 윤해·신숙 등 소수인이 국민대표회의 명의를 절농(竊弄)하여 전민족의 의지에 반하여 독립운동의 앞길에 지장을 주는 행동을 감행하고 있다”는 요지의 성명서 발표에 참여하였다. 당시 창조파의 중심인물인 윤해·신숙 등을 비난하는 데 참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는 ‘임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6월에 열린 한국노병회 10회 이사회 결의에 따라 그는 최천호‧박희곤과 함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입교를 위해 상해〔上海,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상해에서 내하 륜선(內河輪船)을 타고 장강(長江)을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강음〔江陰, 장잉〕-진강〔鎭江, 전장〕-남경〔南京, 난징〕-무호〔蕪湖, 우후〕-안경〔安慶, 안칭〕-구강〔九江, 쥬장〕을 거쳐 한구〔漢口, 한커우〕에 이른 다음, 경한선〔京漢線, 北京-漢口, 粤漢線(漢口-廣州)과 연결되어, 중국대륙을 종단하는 철도 중에서 가장 긴 노선〕 철도로 정주〔鄭州, 정저우〕에 이르러, 다시 롱해선〔隴海線, 隴山(陝西省과 甘肅省 경계에 위치한 산)-海州(중국 동해안에 위치), 중국대륙을 횡단하는 철도 중에서 가장 긴 노선〕 철도편을 이용하여 하남성〔河南省, 허난성〕 성도〔省會〕인 낙양〔洛陽, 뤄양〕에 도착한 채원개는 중국군 제3사단 교관으로 복무 중이던 김유신(金攸信, 구대장)‧조송평(趙頌平, 포병교관, 保定講武學校 졸업)의 영접을 받았다. 이들의 안내로 오패부〔吳佩孚, 우페이푸〕를 예방한 채원개는 “중‧한 양국이 순치관계(脣齒關係)에 있는 한 적극 원조할 터이니, 노력 분투하라”는 오패부의 격려 속에 낙양군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하였다.

채원개 등에 앞서 낙양군관학교에는 1921년 4월 입교한 김유신이 있었다. 김유신과 채원개의 기억에 의하면, 1923년 말에서 1924년 초 사이 낙양군관학교에는 50여 명의 한인 입교생과 함께 30여 명의 ‘유년학생(幼年學生)’이 입교하였다. ‘유년학생’은 정 사관 교육과정의 전 단계인 예비교육 과정으로 추측된다.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의 교도대(敎導隊) 과정〔金宗鎭의 경우〕 및 귀주강무학교〔貴州陸軍講武學校〕 입오생(入伍生) 과정〔金弘壹의 경우〕과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사관 정도의 하급간부 양성 과정에 해당될 것이다.

두 사람의 회고를 토대로 입교생의 신원을 살펴보면, 한국노병회 소속 채원개‧최천호‧박희곤과 재만 대한독립단 소속 박태열‧김동명‧한국량‧김필렬, 국내에서 모집한 오동기‧서종우‧조석구 등 17명을 비롯하여, 박우정‧조광국‧장동준 등 7~8명이 낙양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채원개 등 한인 입교생들은 1924년 9월 제2차 직봉전쟁(直奉戰爭)에 직군(直軍)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는데, 그는 ‘직계’ 즉 오패부 군대 총사령부에서 전령(傳令)으로 산해관〔山海關, 산하이관〕·진황도〔秦皇島, 친황다오〕 일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이때를 “대부대 작전은 참여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나의 견학이요, 실습이었다. 실로 얻은 바가 컸었다”고 회고하였다.

잠시 살펴보면, ‘직봉전쟁’이라 함은 1922~1924년 사이 영·미 세력을 대변하던 직계(直系) 군벌(曹錕、吳佩孚)과 일본의 지지를 받던 봉계(奉系) 군벌(張作霖)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의 군벌전쟁을 가리킨다. 1920년 직환전쟁(直皖戰爭) 후, 직계와 봉계는 공동으로 북경〔北京, 베이징〕의 북양정부(北洋政府)를 장악하였는데, 이후 내각 인선,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이 차지하였던 산동반도(山東半島) 처리 등을 둘러싸고 양자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922년 4월 하순, 장작림〔張作霖, 장쭤린〕을 총사령으로 한 12만 봉군이 산해관을 넘어, 29일 오패부의 직계군과 싸움을 시작하였으나, 봉군이 패배하고, 1923년 6월 조곤〔曹錕, 차오쿤〕이 북양정부(北洋政府) 대통령에 취임하고 직계가 정부를 독점하였다. 이를 ‘제1차 직봉전쟁’이라 한다.

제2차 직봉전쟁이라 함은 1924년 9.15~10.23 사이 직계 군벌(曹錕、吳佩孚)과 봉계 군벌(張作霖) 사이에 벌어진 군벌전쟁을 가리킨다. 1924년 9월 15일 장작림은 15만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 적봉〔赤峰, 츠펑, 內蒙古 경내〕, 승덕〔承德, 청더〕 3개 지역으로 진공해 왔고, 오패부는 ‘토역군사령(討逆軍總司令)’에 올라 20만 군대를 조직하여 응전하였다.

그런데 10월 23일 오패부의 부하인 풍옥상〔馮玉祥, 펑위상〕이 ‘북경정변(北京政變)’을 일으켜 대통령 조곤을 구금하였다. 풍옥상은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으로 선포하고 손중산〔孫中山, 孫文, 쑨원)을 초청하여 정권을 이양하기로 하였다. 풍옥상의 쿠데타로, 전황은 봉군(奉軍) 쪽으로 유리하게 되었으며, 오패부의 주력부대는 거의 전멸되었다. 그러나 손중산이 북경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25년 3월 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북양정부(北洋政府)는 봉계 장작림에게 장악되었다.

1925년 11월 경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진황도에서 해로로 당고〔溏沽, 탕구〕로 왔다가 북경으로 와서, 이옥산(李玉山)이라는 인물의 집에 머물며 신익희〔申翼熙, 당시 胡景翼 부대 參議〕·신숙·이진산·김성숙·김승만·김중량·조동호 등을 만났다. 이때 직봉전쟁에 참전했던 한인 학생들도 북경에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현지 한인들의 도움을 받고 각지로 흩어졌다. 한인 학생들의 해산을 마친 다음, 그는 박태열과 천진〔天津, 텐진〕으로 가서 이회영(李會榮)을 방문하였는데, “그 생활 상태가 비참하였다”고 회고했다.

오패부 군벌군대에 복무하며 직봉전쟁에 참전하여 실전 경험을 통한 군사적 소양을 습득하였겠지만, 외세의 침략 상황 하에서 동족상쟁을 벌이는 군벌들 간의 세력다툼이 갖는 모순을 직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직봉전쟁 참가는 독립운동가 채원개 개인에게는 군사적 역량을 제고하는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그가 헤쳐 나가야 할 중국근대사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3. 임정으로의 귀환과 재만 독립군 진영 파견

직봉전쟁은 봉군의 승리로 끝났고,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이동한 이후, 채원개는 최천호와 함께 천진을 경유 상해〔上海,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정에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고, 독립신문사에서 함께 머물다가, 서애함사로〔西愛咸斯路〕에서 김동명(金東明)·박희곤(朴熙坤)·박영(朴英) 등과 자취 생활하였다.

1925년 2월 “교포들의 권(勸)에 의하여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 후보로 나서” 임시의정원 평안남도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3월에는 임정 대한민국탄핵재판소 심판위원에 선임되어, 이승만 대통령 탄핵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채원개·김현구·최석순〕의 한 사람으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서’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구실을 외교에 가탁하여 직무지를 떠나서 5년간 원양(遠洋)의 한 구석에 격재(隔在)하여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아무런 성의도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刊布)하여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케 하였음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하며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여 공결(公決)을 부인하고, 심지어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며 임시헌법에 의거 의정원의 선거로써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의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인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여 한성(漢城) 조직 계통 운운함과 같음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둠은 대업 진행을 기약할 수 없고 국법의 신성을 보장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순국 제현이 눈을 감을 수 없는 바이며, 또한 충용(忠勇)의 소망이 아니기로 주문과 같이 심판함.

1925년 봄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駐滿參議府)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이유필(李裕弼) 임정 내무총장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와 참의부(參議府)의 유혈충돌 조정 임무를 띤 임정대표 자격으로 만주지역에 파견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내무부장 이유필 씨는 비서 채원개 씨를 데리고 지난 5월 2일경 흥경현 하남(河南)에서 일박하고, 길림성 반석현(盤石縣) 반석으로 향하였는데, 그 임무는 동지에 있는 정의부와 중동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 있는 신민부 사이에 조정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바, 본시 정의부는 산업중심주의(産業中心主義)요, 신민부는 군사중심주의(軍事中心주의)이므로, 두 단체가 늘 충돌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우려하던 임시정부에서는 오는 7월 10일에 개최할 독립당 대회에 □만한 집합을 만들기 위하여 그와 같이 분주히 조정에 노력한다고 한다.

두 사람은 상해를 출발하여 해로로 천진〔天津, 텐진〕으로 가서, 다시 경봉철도〔京奉鐵道, 北京-奉天〕로 봉천에 이르러, 일경의 감시망을 돌파하고 마차로 몇 달 후 흥경현 신빈보(新賓堡)에 도착하였다. 오동진·김동삼·이청천 등이 마중을 나왔고, 정의부 중앙 소재지인 왕청문(汪淸門)에 도착하자, 큰 환영회를 열어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이유필은 임정을, 김동삼은 정의부를, 채원개는 참의부를 대표하여, 두 단체 간의 감정 화해 공작으로,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군대와 지방단체 및 유지인사들을 방문 유세하였다. 특히 유하현 삼원포에서 양기탁·이탁·김창환 등을 방문한 다음, 참의부 중앙 소재지인 통화현 강산(岡山) 이도구와 집안현 화전자(花甸子) 및 패왕조(覇王槽)에 가서 참의부 중앙간부인 윤세용·심용준·김유하·박응백·계탐(桂耽) 등의 환영을 받았고, 환인현 횡도천과 이분구(裏坌溝)에서 양기하·김승학·맹철호를 방문하였다. 그 결과 화해공작은 성과를 거두었고, 김동삼과 이유필은 원대 복귀하였고, 채원개는 참의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단편적인 사실로 1925년 6월 20일 개회한 제14회 임시의정원 회의(9월 3일 폐회)에 참석하였음이 확인되며, 이어서 8월에 열린 ‘임시정부 주만 참의부’ 제1회 행정회에서, 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4. 황포군관학교 교관 부임 및 중국군 복무

1924년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성립 후, 중국국민당정부는 북벌전쟁에 필요한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는 임정에도 한인 입교생의 추천을 의뢰하였다. 일례로 중국국민당의 핵심인물인 진과부〔陳果夫, 천궈푸〕는 임정의 조소앙‧박찬익이 소개한 한인청년을 광둥(廣東)으로 보내는 등, 입교생 모집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한인을 황포군교에 입교시켰다.

임정과 황포군관학교의 연계 사실은 채원개‧공주선(孔周宣) 등의 황포군교 교관 재직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두 사람은 임정계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국노병회에 의해 1923년 중국군벌정권 군사학교에 파견되었던 인물들이었다. 특히 공주선의 교관 재직 시 통신연락처가 ‘상해 프랑스조계 백래니몽(白來尼蒙) 마랑로(馬浪路) 숭일리(崇一里) 16호 해동공사(海東公司) 내 최우강(崔友江)’이었던 사실은 임정과 황포군교의 연계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런데 공주선의 연락처인 ‘최우강’은 최석순(崔錫淳)을 가리키는데, 당시 최석순은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한국노병회 경리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겨울 임정으로부터 안경근(安敬根)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파견 명령을 받은 그는 참의부 3중대의 ‘함(咸)·장(張)’ 두 학생과 함께 광동행(廣東行)에 올랐다. 환인현을 출발하여 평정산(平頂山)·무순(撫順)을 지나 봉천〔奉天, 펑텐〕에서 중국국적(中國國籍)을 취득한다는 명목으로 신사와 학생으로 변장한 다음, 경봉선(京奉線) 열차편으로 천진에 도착하여, 다시 윤선(輪船)을 타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프랑스조계 천문대로(天文臺路)에 거주하는 최석순(崔錫淳) 집에 머물며, 이동녕·안창호·김구·여운형·이유필을 방문하고 만주 정세를 보고하였다. 1주일 정도 머문 후 프랑스 윤선편으로 산두〔汕頭, 산토우〕를 거쳐 3일 만에 광주〔廣州, 광저우〕 백아담(白鵝潭)에 도착하였다.

황포군교에 도착하여 기술교관 양녕(楊寧, 楊林), 교본부 부관 손두환(孫斗煥)·김철남(金鐵男), 학생대 구대장 최추해(崔秋海, 崔庸建)·공주선 등 한인 교관들을 만났고, 양녕의 안내로 교장대리 겸 교육장 방정영〔方鼎英, 팡딩잉〕을 예방한 다음, 5기생(1926. 11. 15.~1927. 8) 제1학생대 부대장 직을 맡았다. 최추해·박효삼(朴孝三)이 구대장(區隊長)이었고, 5기 한인학생으로는 장흥(張興)과 신악(申岳) 두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하였다.

황포군관학교 5기생 학생대 교관 명단(아랫줄 왼쪽에서 6번째)
황포군관학교 5기생 학생대 교관 명단(아랫줄 왼쪽에서 6번째)

6기생(1928. 4. 23~1929. 5. 15) 때에는 외국인 학생을 중국인 학생과 분리하여 독립학생대(獨立學生隊)를 편성하였는데, 그가 학생대장에 임명되었다. 6기생 입교시기 황포군교에 근무한 인물은 박효삼(제2학생 총대 보과 제3중대 제1구대장, 上尉)‧공주선(孔周宣, 제2학생총대 포과중대 제1중대장, 上尉)‧채원개(편집위원회 위원, 少校)로 판명된다.

채원개의 회고에 의하면, 6기생은 입오생(入伍生) 과정 이수 후 정식 사관교육 과정 시작과 함께 외국인학생 600여 명을 독립학생대로 별도 편제하였는데, 독립학생대는 3개 중대로, 1개 중대 병력은 200명이었다. 제1중대는 한국인, 제2중대는 베트남인, 제3중대는 말레이시아인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채원개가 독립학생대 학생대장에 임명되었고, 박효삼은 한인들로 구성된 제1중대 중대장 직을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5·6기 입교생 시기 그와 함께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한 양림·최추해·안경근 등이 항일운동 과정에서 남다른 역량을 과시한 인물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임정에서 채원개를 파견한 배경에는 그에 대한 높은 평가와 믿음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10년이 되는 1929년, 그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겼다.

거족적인 운동 기세는 쇠퇴함을 느낀다. 적의 세력은 점익팽창(漸益膨脹)하여 가며, 적의 강폭한 탄압에 불승(不勝)하는 국내동포의 지기(志氣)는 다시 대두하지 못하고, 표면운동으로부터 지하운동에 잠닉(潛匿)하였으며,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사회주의운동에 전입(轉入)하는 경향이 엿보인다.

해외운동에 있어서는 진전을 보였으니, 대체로 사상의 체계적 이론과 영도기구(領導機構)의 통일화를 통감하며 이구동성으로 전선 통일과 역량 통일을 호소하며 추진하고 있다.

192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시도되었으나,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종료된 상황에 대한 유감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아울러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한 사회·공산주의 진영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한편, 세계적 경제공황 등으로 인한 민족모순이 크게 대두되는 등의 상황을 배경으로, 사회주의운동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던 식민지 한국사회 내부의 실상과, 중국지역에서는 우파 민족주의세력이 ‘상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면서 협동전선의 결성이라는 성과를 내고 있던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 그간 재직했던 황포군관학교 교관에서 중국군 59사(師) 작전참모로 전임하였고, 이듬해 봄 제2사 교도단장 등으로 공산당 토벌작전 등에 참가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上海事變)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 침공이 본격화된 이후, 중국군 독립 제4사 참모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일제자료에 따르면, 1934년 6월 현재 상해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소재지: 廣州市 東山瓦窑後街 41호) 당원이었음이 확인되는데, 일제 자료에 따르면, 책임대표: 김붕준, 간사: 이경산·양명진·이두산·김창국·김웅·채원개〔거주지: 廣東 中山大學 기숙사〕·김종화·이일봉 등으로 밝혀진다. 이는 그가 광동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음을 알려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제19집단군 총사령부에 파견되어 작전참모로 근무하던 중, 남경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방문하여 요담하기도 하였다. 1938년 봄 제4로군(路軍)으로 복귀하여 고급참모 직을 맡았다. 그러던 중 전 정의부 중앙군사위원장을 지낸 이준식(李俊植)이 4로군 총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해 왔고, 두 사람은 후일 장사〔長沙, 창사〕에서 광주로 이전해 온 임정을 돕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광주청사 추정지(동산백원)ⓒ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주청사 추정지(동산백원)ⓒ독립기념관

즉 1938년 7월 20일 광주에 도착한 임정 일행이 9월 20일까지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 때 광주에서 중국군에 재직하고 있던 그와 이준식은 중국 측과 교섭하여 동산백원(東山栢園)을 임정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여관을 임정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중일전쟁 이후 독립운동 진영의 협동과 단결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국독립당 및 조선민족혁명당 등 주요 독립운동세력이 참여한 ‘7당 통일회의(한국독립운동통일 7단체 회의)’가 사천성〔四川省, 쓰추안성〕기강〔綦江, 치장〕에서 열리고 있던 1940년 7월 말 무렵, 채원개의 연락처가 군사우편함〔‘廣東軍郵 72局 劍字 89號 附’〕으로 파악되는데, 이것이 7당 통일회의에 참석 중이던 ‘조소앙의 일기’의 내용임을 감안하면, 당시 중국군에 복무 중이던 그가 통일회의 진행 및 한인 참석자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개연성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군 제78사 참모장 등으로 근무하며, 1940년대 초반 광복군에 합류할 때까지, 중국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5. 임정 복귀 및 광복군 활동 참여

1) 임정 활동

1942년 2월 25일 임시의정원 의장․임시정부 고문․회계검사원 원장 등으로 활동한 송병조(宋秉祚) 선생이 돌아가시자, 임정 국무회의에서 장례위원〔治喪委員, 이시영, 김구, 조성환, 유동열, 홍진, 조완구, 조소앙, 박찬익, 차리석, 윤기섭, 이상만, 이청천, 최동오, 최석순, 김붕준, 신영삼, 박건웅, 문일민, 채원개, 엄항섭, 김의한, 양묵, 민병길 등〕에 선임되었다.

1942년 9월 9일자로 ‘귀하에게 감사하는 한국인 친구들’ 명의로 “귀하가 우리의 대의에 고귀하고 관대한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경〔重慶, 충칭〕 지구에 있는 우리 한국독립당 당원들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고, 우리의 대의명분을 지원하는 귀하의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에 대해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의 워싱턴에 있는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 주소지: 콜롬비아 빌딩 워싱턴 D.C.) 법률고문 존 스태거즈(John W. Staggers)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름을 올렸다.

서명인은 김구·김성호·김관·이청천·민영숙·김귀선·조소앙·민영구·조완구·금성음·조인재·박찬익·조시원·조시재·김상직·박수복·엄항섭·김석동·문덕홍·박영준·전월성·차리석·민석린·심광식·민병길·엄도해·이준식·송철·안원상·이시영·뢰명·최문영·류자명·채원개·양소벽·신환·한대원·이규원·이정개였다.

1942년 11월 5일에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왕해공(王海公, 신익희) 등과 참석하여 약헌 수정안(約憲修正案) 토의 과정을 방청하였음이 확인된다.

1943년 5월 8일 중경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각 당파의 통일 혹은 연합 방식으로 혁명진선을 공고히 하는 안’을 결의하는 한편, 중앙집행위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는 조소앙·홍진·최동오·송면수·조시원·유동열·조완구·박남파·김의한·양묵·안훈·이준식·김구·이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에는 조소앙이, 중앙상무위원으로는 최동오(비서장), 김의한(조직부장), 안훈(훈련부장), 송면수(선전부장), 양묵(재무부장)이 선임되었다. 또 중앙감찰위원으로는 차이석·김자동·이복원·이상만·최용덕이 선임되었다.

3차 대회 결과로 미루어 보면, 한국독립당의 지도체제가 김구체제에서 조소앙 체제로 개편되었고, 그는 ‘조소앙 계열’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가 “전체 한국혁명단체의 통일을 통해 임시정부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추진하자는 ‘통일파(統一派)’,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반통일파(反統一派)’로 나뉘어 있었는데, 전자는 홍진(현 임시의정원의장), 조소앙(현 임시정부외교부장), 유동열(현 임시정부참모총장 겸 교통부장)등이 영도하고, 후자는 김구, 조완구, 박남파(박찬익) 등이 영도하였다”는 분석에 근거하면, 3차 전당대표대회가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주장하는 조소앙 중심의 그룹(‘비주류’)과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운동에 부정적인 김구 그룹(‘주류’)간의 세 대결 형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10월 당시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 직에 있던 그는 유동열(柳東說) 등 16명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는데, 이들은 탈당 성명에서 “통일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한국독립당이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모순으로 그 자신의 분열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만일 계속 이러한 모순 중에서 분열을 면하려고 의도한다면 당내의 분규와 마찰을 더욱 심각하게 할 것이고, 심지어 전 민족혁명 운동의 진전에 미치는 저해는 막대할 것이다.” “당 자체를 위해 당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혁명의 이익을 위해 당이 필요한 것이다. 똑같이 통일 자체를 위하여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민족이익을 위해 통일을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일단 그 당에 남는 것이 오히려 혁명운동에 이롭지 않다고 인식될 때는 단연코 그 당과는 분리해야 하고, 억지로 한 당의 통일 국면을 유지하는 것이 전 민족 통일에 불리하다고 인정될 때는 의연히 그 통일을 희생해야 한다. 통일을 위해서는 한 당의 분열은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독립당을 결연히 떠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인물은 유동열(임정 교통부장), 채원개(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 김자동(광복군총사령부, 과장), 이석화(광복군총사령부), 최덕신(광복군총사령부), 송철(인도에서 공작 중), 이준식(광복군 고급참모, 의정원 비서장), 김응만(임정 직원), 김성호(인도에서 공작 중), 이진영, 이규광, 나동규, 김병일, 최상철, 김병인, 김상준, 유미영 등이었다.

임정 내 주류와 비주류 간의 갈등 관계가 폭발하는 상황에서, 그는 비주류 측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3월 15일자 민석린(閔石麟, 閔弼鎬) 명의로 작성된 자료에서는, 그가 유동열·김자동·김승만·최덕신 등과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朝鮮民族革命者統一同盟) 소속인 동시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집행위원으로도 적혀 있는 사실도 이러한 상황을 뒷받침한다.

광복군 제1지대 대원들
광복군 제1지대 대원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7일 자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국정부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그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중앙위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그가 광복군 1지대장 직도 맡고 있었던 사실과 연관지어 살펴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941년 상반기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주력이 화북지역으로 이동한 뒤, 잔류했던 조선의용대 병력은 광복군에 합류하여 제1지대로 편제되었고, 이후 1지대장은 김원봉에서 이집중을 거쳐 채원개로 이어졌다. 그래서 채원개가 1지대장을 맡은 사실을 통해서는 그가 민족혁명당 당원이었거나, 이들과 친분이 있고 소통이 가능했던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2) 광복군 활동

임정이 한국광복군 창건을 준비 중이던 시점인 1940년 8월 10일, 그는 이복원·이준식·김학규·공진원과 함께 광복군총사령부 참모에 임명되었고, 총사령부가 성립된 이틀 후인 9월 19일 김구 명의로 중국국민당정부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참모처장 직에 있었다.

성립 시기 광복군 총사령부의 직제와 담당자를 보면,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 참모처장: 채군선(채원개), 부관처장: 황학수, 정훈처장: 조소앙, 군법처장: 홍진, 관리처장: 김붕준, 군수처장: 차리석, 군의처장: 유진동 등이었다. 당시 그는 중국군에 복무 중이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복군 지휘부를 구성하는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가을 그간 몸 담았던 광동성 주둔 중국군 제4로군 총사령부를 떠나, 중경으로 와서 광복군 활동에 합류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총사령부에서 근무하였는데, 광복군에서의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한 다음 이루어진 편제 개편에서, 그는 고급참모〔少將, 1인〕에 임명되었다.

10월 27일자로 군무부에서 임시의정원에 보고한 ‘총사령부 임시 편제표’에 따르면, 그는 ‘직능별: 고급참모, 계급: 소장, 나이: 48세, 본적: 한국’으로 기재되어 있다.

지엽적이지만, 광복군 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실로, 1942년 11월 28일자 ‘한국광복군 관병소비합작사(官兵消費合作社) 사원 명단’에 따르면, 그가 소유한 주식은 2주(株), 금액 800원이었다. 참고로 다른 인물들의 소유 상황을 살펴보면, 이청천 20주-8000원, 김약산 25주-10000원, 조시원 5주-2000원, 이준식 5주-2000원, 김자동 5주-2000원, 박영준 5주-2000원 등이었다.

명칭이 ‘유한책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로, 광복군 장교와 사병의 복리 증진 도모를 목적으로, 중경시 사회국의 허가를 받아, 1942년 10월 17일 설립되었다.

사원의 범위는 본부 및 제1지대 장교와 사병이었다. 1주 당 4원으로, 사원은 최소 1주 이상 소유해야 하되, 한 사람이 전체 주식의 2할 이상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되었다. 밀가루·연료·설탕·옷감·문구·잡화 등의 일상 생활용품을 구매하여 사원들에게 판매하는 등의 업무를 취급하였다.

1943년 7월 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당시 광복군 참모처 고급참모로 재직하던 그는 광복군 총무처장으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6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광복군총사령부 임시편제표에는 송수창(宋壽昌, 宋虎聲)·이복원·김자동과 함께 고급참모로 등장한다.

1944년 5월(?) “만주에서 역전(歷戰)의 경험이 있고 또 중국군의 요직과 광복군 총사령부의 고급 참모 등 고위직에 있은 바도 있는” 그가 제1지대장에 임명되면서, 그 동안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광복군 1지대도 차츰 정비 강화되었다”고 한다. 당시 제1지대의 진용은 지대장: 채원개, 제1구대〔重慶市 南岸區 주둔〕구대장: 김준(金俊), 제2구대〔浙江省 주둔〕구대장: 이소민(李蘇民), 제3구대〔제9 전구 주둔〕구대장: 이병곤(李炳坤, 雷明)이었다.

1944년 8월 ‘한국광복군 9개 활동기준〔韓國光復軍9個行動準繩〕’이 폐지되고, 군수처〔처장엔 중국인 임명〕가 신설되며 단행된 편제 개편에서, 그는 총무처장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1945년 5월 1일자로 단행된 광복군 총사령부 인사 이동에서, 그는 이집중·김자동·이복원과 더불어 고급참모에 임명되었다.

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 시절ⓒ한국광복군 제1지대 사진첩(한국광복군 제1지대 사진첩 발간위원회, 2000)
광복군 제1지대 지대장 시절ⓒ한국광복군 제1지대 사진첩(한국광복군 제1지대 사진첩 발간위원회, 2000)

이때 단행된 인사 이동 상황을 보면, 참모장: 김홍일(王逸曙), 참모처장: 최창석(최용덕), 정훈처장: 이두산, 군법실 주임: 조시원, 부관실 주임: 이석화, 고급참모: 채원개·이집중·김자동·이복원, 제1지대장은 송호였다. 1945년 12월 현재, 그는 참장(參將) 계급에 고급참모 직에 있었다.

이와 함께 1945년 8월 3일자 중국 전구(戰區), OSS 소속, 비밀첩보과에서 발신한 2급 자료에 따르면, 중국 군사위원회는 성도〔成都, 청두〕에 있는 중앙군사학교에서의 한국 청년들을 위한 훈련을 승인했다. 이를 위해 왕일서(王逸曙, 김홍일)가 학교장에 임명되었다. 채원개는 교육부서를 책임지고 이두산(李斗山)은 정훈교육, 김자동은 총무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중앙군사학교는 8월 첫째 주에 개교할 계획이며, 중경의 광복군 제1지대의 약 15명의 훈련생만이 훈련을 받기위해 등록하였다. 제2지대와 제3지대는 이 훈련에 어떠한 대원도 보낼 능력이 없다고 통고하였다. 이들 대원에 대한 훈련비용은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조달할 것이라고 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각 부대의 편제 상황에 따르면, 그는 제1지대 지대장이었다. 참고로 당시 제1지대의 조직편제 상황을 살펴보면, 지대본부(주재지: 중경, 관좌: 14명, 사병: 30명, 소계 44명)와 제1·2·3구대로 편제되었고, 인원은 장교 433명, 사병 110명, 소계 533명이었다.

6. 귀국 후 활동과 국군 합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그는 “이로써 세계대전은 古終되고, 한국독립은 이루어졌다. 누구의 힘으로 되었든지, 적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에서 더 기쁨이 어디 있을까마는 나의 뽑았던 검(劍)으로 일격지하(一擊之下)에 적을 굴복시킬 만큼 통쾌하지 않았다”고 기쁨과 아쉬움이 뒤섞인 소회를 털어 놓았다.

이후 그는 가족을 교포 일행과 함께 출발시킨 다음, 광복군 1지대를 이끌고 중경을 떠나 장강(長江)을 내려가 무산〔巫山, 우산〕-만현〔萬縣, 완셴〕-의창〔宜昌, 이창〕을 거쳐 한구〔漢口, 한커우〕에 도착하여 장사〔長沙, 창사〕 방면에서 이동해 온 전 일본군 내 한적사병(韓籍士兵)으로 구성된 1개 대대 규모의 한인부대와 함께 다시 남하하여 구강〔九江, 쥬장〕을 거쳐 남경〔南京, 난징〕에 도착하였다.

한편 1945년 5월 강서성〔江西省, 장시성〕 계동〔桂東, 궤이동〕에서 학도병과 징병 출신의 한적사병들을 토대로 성립된 3구대〔3개 분대와 공작반, 3개 지구대로 편제〕는 8·15 직후 강서성〔江西省, 장시성〕 풍성〔豊城, 펑청〕에 집결했다가, 해를 넘긴 후 남창〔南昌, 난창〕을 경유 구강을 거쳐 다시 한구에 집결하여, 1지대장 채원개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는 기술은 그가 1946년 초반 제1지대를 인솔하고 한구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당시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였기에,” 부대를 해체한 다음, 1946년 초 남경을 떠나 상해에서 선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부산항에 도착하여 세관창고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열차편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가족과 재회한 그는 서울역 앞 수용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장충동에 있는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조완구·조경한의 주선으로 남산 밑 한미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귀국 후 미군정 통위부장(統衛部長)으로 재직 중이던 유동열(柳東說)과 송호(宋虎) 경비대 총사령 등의 권유를 받고, 육군사관학교 3기 특과에 입교하여 3주간 훈련을 마친 뒤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하였다. 1947년 여름 소령으로 특진하고 7연대장으로 전임하였다. 같은 해 겨울 총사령부로 옮겼고, 1948년 대령으로 특진하여 제3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11월 2일 대구의 국군 제6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3여단장(대령)이던 그는 오후 7시 15분 특별군용차로 용산을 떠나, 도중에서 충청북도 청주 주둔의 제7연대 병사 약 5백 명을 인솔하여 3일 오전 6시 40분에 대구역에 도착하여 진압 작전을 지휘하였고, 소요는 4일 오전 10시 현재 대부분 진압되었다고 한다.

이해 겨울 제2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49년 여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7. 독립운동 일생의 의미와 가치

이전 출국 시에 맨손으로 출국하였고, 환국 시에 역시 맨손으로 환국하였다. 일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농사도 상업도 하지 않았으니 경제에 무슨 능력이 있으리오. 나의 생애란 구걸이었다. 향리에는 선조의 유산도 있다. 그러나 그도 향유함이 없다. 처지와 환경은 빈곤 한길에로 압박을 가할 뿐이니, 자식에게 돈을 남겨 줄수 있을 리 없고, 자식에게 재주 한 가지 가르쳐 주지도 못하였다. 옛글에 말하길, 자식을 키우며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애비의 잘못이라 하였으니, 이 심정 원통함을 어디다 비할 것이요, 영원히 한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지나 온 독립운동 일생을 되짚어 보며,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가족들을 향한 마음의 빚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자신의 독립운동 일생을 정리하며 반추하던 1960년대 초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및 독립운동사를 향한 시선 등을 의식하며, 남겼을 토로이기에 그 울림이 진하게 되살아온다.

이제 그의 독립운동 역정에 함축되어 있는 독립운동사 상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 보겠다. 재만 독립군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에 두루 참여하였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거쳐 중국군 복무와 광복군 합류로 이어지는 그의 항일역정은 중국지역을 무대로 전개된 한인독립운동의 범주와 규모를 대변하고 있다. 그가 경험하고 헤쳐나간 북벌전쟁·국민혁명·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중국근대사의 다양한 환경은 이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923년 무렵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결성한 통의부 대표로 선출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사실, 임정으로부터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된 사실, 임정으로부터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파견된 사실 등은 그가 1920년대 초중반 서간도 독립군 진영과 임정 지도부로부터 군사방면의 능력을 평가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보병대 교육 및 재만 독립군단체인 대한독립단 활동 등에서 축적된 군사 방면의 능력과 경험이 높이 평가받았고, 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진영의 범주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 탄핵재판소 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립 초기 임정 운영에 있어서 평안도 출신 인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평안남도 출신이라는 지연 또한 이러한 유추를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광복군에 참여하여 고급참모 직을 수행하였는데, 고급참모 직은 중국 측 군정기관과의 공조협의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 부임 이래 십여 년 간 쌓은 중국군 복무 경험과 인적 기반은 -중국 측의 지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고, 중국 측의 지휘와 간섭에도 적절히 대처하며 임정의 국군으로서 독자성을 견지하고자 했던- 광복군의 운영과 활동에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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