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을 선고 받고, 거사 이유를 밝히는 저술에 심혈을 기울여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거 직후의 안중근 의사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역사』를 끝내고,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의사는 당초 『동양평화론』을 ①서(序) ②전감(前鑑) ③현상(現狀) ④복선(伏線) ⑤문답(問答)으로 구성하여 저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필 도중 형 집행으로 말미암아 실제는 서와 전감의 일부만 남기게 되었다.
『동양평화론』을 통해 거사의 이유를 새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의사는 자신의 시대를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인 약육강식의 시대로 이해하고, 그와 같은 생활방식에 따라 발생한 러일전쟁을 서양과 동양의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하는 일왕의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문에 따라 청·한 두 나라 국민은 일본을 지원하여 일본의 승전을 도왔음을 거론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패전하고 동양은 서양에 패하여 동양평화는 영구히 깨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이에 공헌한 청·한 두 나라 국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청․한 두 나라 국민은 동양평화의 수호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승전한 후 곧 약속을 파기하고,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여 동양 평화를 파괴하였는데, 그 원흉이 이토라고 보았다. 때문에 의사는 이토가 한국의 국권을 박탈한 주범이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원흉이므로 처단하였음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의사
그러면 의사가 생각한 동양평화의 길은 어떤 것인가. 의사는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 그런 다음 서로 '독립한' 청국·한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 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의사가 순국한 뒤 세계사의 진행 상황을 보면 이는 참으로 빛나는 견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의사의 이러한 충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지속적인 전쟁의 확대와 그로 인한 인류의 피해로 결판났을 뿐이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동양이나 서구,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의 전개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에도 의사의 사상은 새삼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