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남 고성(固城)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20일 경남 산청군 신등면(新等面) 단계리(丹溪里)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신등의 만세운동은 이웃 면인 단성면(丹城面) 성내리(城內里)의 시위와 연결되어 일어났다. 즉 3월 20일 단계리 만세시위에 불을 붙인 시위대는 다음날인 3월 21일에 성내리 장날을 이용하여 성내리 만세시위로 번져 나갔다.
이러한 신등과 단성의 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因山)에 참례하러 상경했다가 김상준(金相峻)과 윤규현(尹圭鉉)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만세소식을 고향에 알리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김상준의 아버지인 김영숙(金永淑)은 인근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림으로써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에 이호용은 김영숙과 뜻을 같이 하여 만세운동 준비에 가담하였다. 당초 이들은 거사일을 3월 19일로 정하고 추진해 갔으나 거사 당일 아침에 동지 일부가 일경에 붙잡히는 바람에 계획대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호용 등은 긴급 모임을 갖고 3월 20일에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정하기로, 단계리 시장에서 6,7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이호용은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시위행렬을 이웃의 단성면 성내리 시장으로 향하였고, 행진 과정에서 시위대의 규모는 수천으로 늘었다.
이들 시위대는 일본 헌병대 앞에서 전날에 구금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 거창과 진주에서 8,90여 명의 일본군이 출동하여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해옴으로써 시위군중 가운데 11명이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8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9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한 이후에도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면서 단성청년회(丹城靑年會)에 참가하면서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경남독립운동소사(변지섭, 1966) 상권 17∼22면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3·1운동실록(이용락) 656∼660면
- 한국청년운동사(선우기성, 1973) 4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318∼322면
- 판결문(1919. 9. 17. 대구복심법원)